1. 프롤로그 {마음의 달}
인간의 의식을 시로 환치한다면 이미지는 시의 줄기를 형성하는 중심이 된다. 이 중심으로부터 가치를 만들고 또 잎새들을 부추길 때, 바람은 노래를 부르고 비로소 세상에 태어난 한 구루의 나무에 미감을 입히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다.
분명 해와 달은 천상에 하나로 존재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달을 소재로 변형을 위한 장인의 솜씨를 발휘하여 시의 길을 재촉한다. 하늘에 달이 있고 물에 또 하나의 달이 있으며 그달은 마음속에 달이 있기에 달은 3개가 되는 것이다. 사실 마음속에 있는 달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왜냐하면 천상의 달은 시의 소재로서의 달이며 이 소재를 끌어와 물속에 있는 달 -
물론 비존재의 달이지만 시인의 의식을 움직이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시의 창조의 문을 여는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므로 시인의 마음에 달을 바라보는 중추 의식이 곧 핵심 역할을 감당한다. 달은 바로 마음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세 번째의 달 – 우리는 이것을 시적인 달이라 말한다. 설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술에 취해 호수 위 달을 건지기 위해 빠져 죽었다는 고대 중국 시인의 에피소드를 대입한다면 이해는 더욱 빠를 것이다.
아이를 낳고 나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문제가 이름 짓기일 것이다. 이름이란 개성을 입히는 그릇이고 여기서 세상 풍파를 지나는 부호로 임무를 다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아름답게 혹은 기억을 윤나게 하는 방법으로 의미나 리듬을 생각하면서 골몰하는 이름 짓기 -
시집의 제목은 그렇게 중요할 것이다. 물속에 뜬 달은 상상력의 극대화를 유발한다. 일차적인 느낌은 도시적인 것보다 전원 혹은 미각을 자극하는 토장 맛이나 들판 소리의 삽상함이 들어있고 성숙한 나이에 곰삭은 뉘앙스가 손짓하는 언어의 풍만한 상징성 – 시집의 제목에서 홍은석의 시는 상상의 길을 이끌고 가는 느낌이다. 이제 그 길의 맛을 음미할 계제(階除)인 듯하다.
2. 비유의 그물에서 살아있는 것들
1) 생동성
시는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비유를 통해 실감을 자극할 때, 언어의 탄력과 절제된 의미의 풀림이 먼 여정을 소화하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다. 좋은 시란 언어의 탄력에서 리듬이 나오고 이미지 조합에서 풍광이 탄생될 때 미적인 의상은 화려한 변신을 감행한다. 때문에, 시의 의상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도 칙칙한 리어리티의 표정만도 아닌 변화의 장면과 장면이 엮어지는 결과물에서 시의 맛은 신선함을 유지하게 된다. 일정한 상온에서는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냉장고는 필요를 갖춘다.
나는 지금 비에 감금되고
빗방울에 찬란한 비명소리에 눌려있다.
참깨 단을 두드릴 때
깨알 쏟아져 자리 잡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안다
<어떤 장마>에서
언어는 화석이 아니다. 비록 문자로 앉아 있을 때는 아무런 미동도 없는 정물화처럼 고요하지만 시인이 조합하고 꾸미고 바람을 불어넣어 줄 때면, 팔랑거리면서 말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이런 기교는 시인의 재능이 알아서 하는 몫- 이를 창조라 말하는 것이다. 홍은석 시인의 언어 표현은 감각과 비유가 상징으로 나타나는 의도적으로 튄다. 그러나 경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격조가 있으면서도 품위를 갖는 것 같을 때, 흥미의 유도가 선명해진다. 다소 칙칙하거나 꼬인 것이, 아니라 직선적이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음을 느낀다. 빗소리는 그냥 빗소리가 아니라 깨알 터지는 소리와 비가 결합하면 우두둑거리는 상상을 톡톡 튀게 한다.
비를 사랑했기에
땅에 뿌리박고 하늘 향해 손을 모았다.
햇살이 바삭하게, 튀겨지는 날은
가장 높이 들어 올려진 곳에서
하늘이 가라앉지 않도록, 단단하게 뭉쳐진 핏줄로 떠받쳤다.
<피뢰침>에서
“햇살이 바삭하게 튀겨지는 날은”의 표현은 기막힌 자극을 준다. 이런 갈증은 결국 비의 중요성을 유도하고 “비를 사랑하는”이유를 해소하는 시원함이 절로 스며든다. 또한 너무 많은 비로 젖게 하는 아픔을 방지하기 위한 예단의 지혜는 피뢰침의 필요가 대두된다.
비록 “실핏줄”로 연결된 하늘과 땅의 조화에서 피뢰침은 지상의 아픔과 천상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고 방지하는 중간 지대의 평화 공간으로 임무를 다한다.
2) 자연의 리듬을 읽는 안목과 지혜
홍은석의 시를 일별 하면 자연의 리듬이 음악으로 환치된다. 보통 소나타나 협주곡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고, 교향곡은 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시작의 의미를 갖는 5악장의 구성이나 “5악장 끄트머리/나는 세상 밖으로 나올 때/내가 평생 협연해야 할 악보를 가지고 나왔다/약... 이미 광속으로 멀어져 간 다섯 개의 악장, 내일은 새 악장이다/내일은 새 하늘 새 땅이다 <사람 냄새가 좋다>와 같이 자연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 새로운 악장으로 꿈을 그리는 일이 곧 자연과의 교감에서 비롯되는 시심의 분출이 암시된다. 5악장은 3악장이나 4악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연속성의 표출이고 시작의 프롤로그에 해당될 때, 시인의 흥취는 자연의 깊이에서 통찰의 시선이 분주해진다.
온몸으로 하늘에 번제를
성대하게 울렸던 숲이
푸른 수의를 걸치고 부활하여 투명한 캔버스 안에서
벌거벗은 춤을 춘다.
사각의 틀 속에 갇힌 나의 눈은
창틀에 걸린 화폭을 뚫고 나가
낮과 밤의 경계가 겹칠 때 하늘의 깊은 협곡에서
노란 지느러미를 흔들며
밤하늘에 수수히 찍어 놓은 달의 투명한 발자국을
쓰다듬었다
아직 노을의 끄트머리가 꺼지지 않은 서편의 언저리
실핏줄을 담은 눈들이
불을 댕겨 어둠의 벼랑으로 빛을 모은다.
<유리창>에서
모든 시인에게는 마음의 창문이 있다. 이를 의식의 창문이라 칭하면 바로 소재와 대면하는 창구를 의미한다. 직접 시인이 불러들이기도 하고 또는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자기와의 수순을 거쳐 변용된 자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최종으로 삼을 때, 자연은 아주 좋은 천연의 묘미를 생성하는 곳이다.
시인은 유리창을 통해 의식으로 끌어당기는 자의적인 행위가 있다. 이는 개성의 일환이며 즐기는 표현법으로의 개성미라 할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의 일종인 의식을 통해 숲과 시인은 하나의 정서 쪽으로 프리즘을 이동시키면서 장면을 숲으로 설정하고 그 숲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부활과 춤을 느끼고 비로소 밤으로 나갈 용기를 얻어 ‘불을 끌어와 부활의 숲’을 ‘빛’으로 받아들이는 경건한 의식이 유리창을 통한 제의에 상상이 자연과 결합될 때, 신선한 느낌이 양산된다.
3) 숙명의 문 지나기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있다. 여기와 저기 또한 일인칭일 때, 갖는 소회라면 공간을 왕래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시는 항상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표현에서 의외에 의미가 다가든다. 이곳일 때는 나의 위치가 되고 저곳일 때는 객관의 풍경이 존재한다. 이는 이곳이 있기 때문에 저곳을 인지하는 요소로 작동되는 점을 강조하는 뜻도 담길 것이다.
피 흘리는 침묵을 담은
수술실 안쪽 위도는 위기의 수호천사들이
두 손을 모으는 곳이다.
메디컬 다큐에서 흔하게 보았던
수술실 문 앞 장면들이
이른 아침부터 새로 등장한 얼굴로 재연되기 시작했다.
분장하지 않은 얼굴은 핏기 가신 빈손이었다
생의 가장자리부터 물들이던 육질의 꽃
풍화된 발자국 안에서 그림자처럼 흔들렸다.
이동 침대 바퀴에 칭칭 감긴 초조함이
수술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술실 문은 피 묻히는 아픔과 심장이 타는 고통을
냉정하게 가르는 칼이었으며
세상을 둘로 나눠 놓는 그 문은 중립이었다.
셀 수 없이 마주했던 문
나를 막았던 불투명한 문은 컴컴한 머릿속을 짠물로 절였다.
잔인하게 갈라지는 희망과 절망의 다리
수술 환자 대기실은
가슴 타는 냄새로 가득 찼다.
어느 순간 익숙한 이름이 대기실 유리창에 부딪쳤다
이동 침대를 천천히 밀고 가는 내 뒷모습이 페이드 아웃될 때
까만 가슴을 가진 보호자들은
그들의 배역을 초조하게 색칠하고 있었다.
<모든 문은 중립이다>에서
문장이 긴 시를 인용하는 것은, 문이 갖는 상징성의 문제 더구나 병원을 소재로 한 문의 의미는 삶과 죽음 혹은 전쟁과 평화 등 대척적인 이미지를 갖는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수술실의 이쪽과 저쪽의 풍경은 다르다. 저쪽은 의식이 바라보는 공간이면서 무언가 운명의 결정화를 기다리는 곳이라면 이쪽의 사람들은 단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임을 다한다. 만약 저쪽의 실수가 있다면 – 이를 숙명이라 말해야 할까 아무튼 기도하는 곳이, 인간의 땅이고 저쪽은 무언가를 이쪽으로 전달하는 또 다른 공간에 가로 놓인 문을 통해서 소식을 접해야 한다. 날마다 들어가고 나오고, 그리고 울고 웃고의 교차가 진행되는 문의 임무는 무엇인가?
시는 대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독자는 뜻을 알거나 말거나 선택될 뿐이다.
홍 시인은 둘로 나누는 문을 중립지대로 설정하고 ‘불투명한 문’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술로 바라보는 것 같은 행동을 설득하고 있다. ‘이동 침대를 천천히 밀고 가는 내 뒷모습이 페이드 아웃 될 때/까만 가슴을 가진 보호자들은’ 저마다의 색칠을 열성으로 하고 있다는 에필로그에 여운이 인상적이다.
죽음의 내부를 밟고 선 목마름의 부피, 거울은 왜곡된 지체에서 흘러내리던 핏방울의 아득한 무게를 절대로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하늘로 통하는 비상구가 활짝 열려 있었다.
2.
거울은 앞만 보고 걸었다
거울을 다시 보니 나는 언제나 뒤로 걷고 있었다.
고장 난 내 거울은 하늘을 등에 업고 있었다.
<거울>에서
나르시스 전설은 어디에나 있다. 거울은 나와 또 다른 나의 만남이다. 즉 다른 나를 통해서 나를 확인하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정리한다. 자아가 자아를 볼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기 때문에 인간은 거울을 통해 나를 나로 인정하는 절차를 날마다 반복하지만 실상은 정작 정확한 나로 볼 것인가는 철학적인 목적일 것이다.
4) 삶의 무게
사는 일에 무게가 있을까마는 살아가노라면 확실히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운명의 골짜기를 지나 목적지 – 어딘지도 모르지만 끌려가는 혹은 자기 의지로 설정한 공간을 향해 인종의 길을 가야 한다. 누구라도 피할 수 없고 또 선택의 4 지선다도 아닌 스스로 길에 서야 한다. 끌려가는 수동에서는 운명이 고달파하지만 능동적으로 가려는 길에는 신념의 불이 켜져야 한다. 둘 중에 하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살아야 하는 존재에게 무게는 일상이다. 날마다 사용하는 플라스틱 카드 한 장에는 전 생애의 무거운 짐이 들어 있고 생의 의미가 따라온다.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음식값을 내면서 아침이면 후회의 칼날이 다가드는 섬뜩한 느낌은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월말이면 어김없이 무겁게 다가드는 계산서에서 삶의 고달픔이 상징의 깃발을 흔든다.
지구보다 무거운 카드 한 장의 무게
이젠 너를 자르고 싶다.
<플라스틱 카드>에서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카드 한 장에서 애환의 고달픔이 스며 있다.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 혹은 생활용품을 구매할 때마다 카드는 자기를 대신하는 가치의 상징으로 엄격한 룰이 적용된다. 만약 텅 빈 카드라면?
전율할 만한 뒷감당이 엄습해 올 것이다. 지불할 길이 없다고 신호음이 올 때면, 존재는 파산의 쓰나미가 휩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엄청난 삶의 무게를 담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초라하다. 결국 무게에 짓눌리는 결과에 따른 무서움이 말이다.
살아가는 데는 경험의 축적이 의미와 연결될 때, 품격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온실에서 자란 것보다는 신산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고 자란 견고한 내면이 가득해지는 이치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넘어질 줄 알 때 일어나고 때로 일찍 넘어지면 일찍 일어나는 이치는 체험의 귀중함이 생의 길을 가치로 의상을 입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숨을 모아 쉬던 숨결 위로
태초의 새살이 돋았다.
때때로 상처 난 영혼에는 새살 돋는데 쓰라린 아픔이
얼마나 유용한, 처방전인가
깊은 상처 입은 사람이 가장 멀리 본다.
크고 작은 상처로 연결된 세상의 틈
틈 없는 사람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틈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밥상에 둥글게 둘러앉은
식구들의 손가락질이며
뽀송뽀송한 이부자리다.
별빛을 눈에 담고 그의 시선이 달다
숙성된 고통을 먹고 싸이 튼 그의 언어가 너무나 달다
<상처 난 과일이 달다>
잠언적인 시어의 출몰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고통과 슬픔을 건너는 길은 처참한 통증을 견디는 인내와 세월의 강을 건너는 일이 겹쳐야 한다.
사람으로 치면 실패 뒤에 성숙한 삶을 사는 이치와 같을 때, 나무도 상처의 깊이 따라 비극의 강을 건너 희망 앞에 당도한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깊은 상처 입은 사람이 가장 멀리 본다’와 ‘사람 냄새가 난다’와 마주 앉은 식솔과의 다정한 풍경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은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의 경우에 해당된다. 고통은 새살을 돋게 하고 또 숙성된 아니 곰삭은 시간이 지나면 그의 언어에는 고상한 향기와 품격이 높아진다는 교훈은 비단 시인만의 주장은 아니지만 설득이 우회가 아닌 직설적인 교감이 오히려 친밀도를 높인다.
3. 에필로그- 달다 맛깔스럽다.
수많은 시인 작품을 감별한다면 저마다 개성의 소리만 요란하고 정작 맛을 감식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많은 음식점이 있지만 감식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시발되면서 홍은석의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선하고 맛이 있다. 이는 언어 감가의 독특성에서 시발되면서 언어 운용의 그만의 개성을 담보하는 있다는 뜻이다.
그 첫째는 생동감을 끌어 드리는 일상의 소재를 변용시키는 기교가 탁월하다는 뜻이다. 아울러 비유의 신선미는 시의 분위기를 유연하고 부드럽게 작동시키는 기교가 남다르고 음악과 자연미의 조화뿐만 아니라 자연을 숙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내면의 통찰이 뛰어남을 증명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을 통해서 자연의 풍광이 객관적인 미장아, 빔(액자 기법)으로 시원한 바람이 소통하는 것도 특이한 일면의 시가 된다.
문의 상징은 여기와 저기 혹은 경계로 의미될 때, 삶의 길이 숙명으로 연결된다.
보인다.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칙칙하지 않고 다정함을 내면으로 소화하는 시화의 묘미도 홍은석의 시를 특이하게 이끌어가는 재능이 아닌가 보인다.
그러나 현란한 비유의 의상과는 달리 의미의 깊이는 앞으로 나아갈 길에 조언이 될 것을 더하면서 해설의 소임을 마칠까 한다.
2025.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