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혼의 기록
시는 무엇으로 쓰는가의 시인은 물음을 항상 갖는다. 누구나 펜으로라는 답을, 하겠지만 도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란 시인 영혼의 기록이며 체험과 상상력의 결합이 주는 맑은 정신과 수수를 가질 때, 시의 진액을 문자로 의탁하여 시인의 정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때론 주술사이거나 냉엄한 현실을 자로 잰 듯 치밀한 정신을 엮어내는 논리적인 사람 특별한 사람이라고 칭하여야 한다. 귀걸이 목걸이 등의 치장으로의 시가 아니라 들끊는 내면의 순화를 거치면서 걸러낸 영혼에서는 독자 앞에 꾸밈없이 감동의 길을 만들게 된다. 치장하고 꾸미고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고 순수한 민낯일 때, 가장 평범한 언어의 조립에서도 생명을 득(得)하는 시의 길이 강물을 이루게 된다. 비유하자면 꾸밈이 없는 자연의 일부를 옮기는 시는 곧 좋은 시가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꾸밈이 없는 천의무봉에는 진솔하고 질박한 순수가 호흡하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는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진실로의 가치에 무게가 담기게 된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자유정신의 발현이 당도할 때, 가능한 임무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 7>에서 억지로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듯 자유의 영혼은 지식을 습득하는데도 자유의 영혼이라는 말로 쇠사슬도 얽혀서는, 안된다는 뜻을 피력했다.
물론 도취의 심연에 빠지기 전에 자기 영혼을 희망으로 날리는 정신의 모음이 전제될 때, 시 또한 자유로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철학의 산파술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산파술이라고들 말한다. 깨달음의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알려 주기보다는 알 수 없는 길을 제시하고 암시하는 역할이 선행된다. 시 또한 그런 교훈적인 목적으로 다가들 때, 독자의 가슴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직접적인 교훈이 아니라 포장까지 감싸는 간접의 방도로 독자에 다가들 때, 오랜 관습의 사리들이 비유로 인용된다. 어쩌면 전통이 현대로 이어오는 길을 상징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가 갖는 영역의 일환일시 분명하다.
화로 부 젓갈에 얹혀 자글자글 끓던
뚝배기 장맛을 아느냐 너는
그렇게 지진 장에 횐 쌀밥에 갓김치 걸쳐 먹던 그 맛을
찌그러진 양재기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부어 한숨에 쭉-욱 들이키던
차디찬 막걸리 맛을 너는, 아느냐
아랫목 뜨끈한 구들장에 열십자로 드러누워
날 잡아 잡 수, 곤한 낮잠 맛을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중에서
세상이란 늘 변하며 작금엔 변화의 속도가 우리네가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어제의 지식은 오늘에 와서는 사용 불가의 이름으로 변하는 것도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속도에 휩쓸리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제4차 5차로 이어지는 혁명의 예고는 미처 숨고를 틈도 없는 지경에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아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미래가 불투명할 때, 추억은 위로의 단맛을 알려준다. “뚝배기 장맛과” “횐 쌀밥”과 “막걸리” 그리고 “곤한 낮잠”의 맛을 설의법으로 독자를 자극하는 “아느냐”로 다그칠 때, 향수의 이름이 회고의 길을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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