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듯했다. 맙소사, 나는 이때까지 가난한 사람의 소비를 해온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나의 물건에 대한 취향은 맥시멀리즘에 가까운 편이다. 주기적으로 이른바 꽂히는 분야가 있어서 뭔가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래서 20대 시절 나의 소비욕은 엄청났다. 대부분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에 가까운 소비재들을 사모으면서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곤 했다. 사고 싶은 것을 검색하고 주문해서 택배가 오기까지의 과정, 또는 직접 가서 구경을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집으로 가져올 때의 그 모든 과정을 즐겼다.
종류별로 사모은 대표적인 물건들로는 귀걸이, 향수, 마스킹 테이프, 노트, 색조화장품이 있다.
꾸미기에 관심이 많던 20대 시절 귀걸이는 사도사도 끝이 없었다. 세상에는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예쁜 귀걸이가 얼마나 많던지. 매일 옷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른 귀걸이를 하는 것이 아침 출근길의 즐거움이었다.
향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다른 향으로 몸을 감싼다는 느낌으로 외출 준비 마지막에 뿌렸다. 다른 향수를 뿌릴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색다른 기분이라 점점 가짓수가 늘어만 갔다.
게다가 뭐든 노트에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문구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동반자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쁜 노트나 펜은 말할 것도 없고 꾸미기에 필요한 마스킹 테이프, 스티커도 종류별로 사모았다. 지금 당장 쓰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화장을 시작하며 화장품에도 저절로 관심이 많아졌다. 특히 색조 화장품은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같은 느낌이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말을 신봉하며 남들이 보기엔 똑같지만 내가 보기엔 미세하게 다른 색조 화장품들을 사모았다. 흔히들 말하는 '코덕'까지는 아니어도 '코덕 지망생'정도는 되었다. 블러셔, 립스틱, 아이섀도까지 색깔별로 모으다 보니 가짓수가 많아져서 급기야 진열대까지 샀다. 엄마는 빽빽하게 채워진 나의 진열대를 보며 기겁을 하셨다. 평생 써도 다 못쓸 거라고 잔소리를 하셨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 없이 소비를 해봐서 이제는 욕구가 많이 줄었다는 것. 뭔가에 꽂혀 소비욕을 불태우던 시기가 지나가면 저절로 시들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사놓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큰 애정이나 쓰임이 없는 물건도 사모을 때의 과정이 생각나서 쉽게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 때도 꿋꿋이 나의 물건들을 사수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온 나의 생각을 전환시켜준 책이 있었다. 프랑스 출신 수필가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이다. 이 책에서는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쓸모도 없는 물건을 계속 보관하고 있는 것, 오히려 그게 낭비다. 우리는 공간을 채우느라 공간을 잃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물건은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것을 가져야 하며 적게 소유하되 제일 좋은 것을 소유하라고 한다. 개수가 아닌 질에 집중하라는 문장을 읽을 때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과거의 나는 뭐든지 다양하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고 내 주변을 한없이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이건 저번에 산거랑은 또 다른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사들였다. 싼 물건을 자꾸 사들이다 보면 좋은 물건 하나 살 때보다 결국은 더 많은 돈이 나간다. 그 결과 큰돈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통장 잔고는 초라하고, 시간이 지나 처음의 설렘이 가라앉은 후 살펴보면 처음처럼 애정이 느껴지는 물건은 거의 없었다.
물론 맥시멀리스트였던 내가 책 한 권으로 하루아침에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제 다다익선을 추구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나치게 많은 물건에 욕심내지 않고 나에게 꼭 필요하고 내 마음에 꼭 드는 물건만 신중하게 사자고 다짐한다.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만 곁에 두고 사는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소비하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지만 부자들은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소비 중에는 본인을 증명하고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것도 많다. 내 돈을 쓰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그럴듯한 물건을 많이 가지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통장 잔고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돈이 많지만 딱히 쓰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고 한다. 소비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본인이 부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꼭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에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
이것이 부자들의 소비다.
돈이 너무 많아서 쓰고 싶은 생각이 안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돈을 모아야 될지는 모르겠지만...(정말 그런 경지가 가능한 걸까..?! 하긴 워런 버핏 정도 된다면 그럴지도..) 이제 나도 가난한 사람의 소비에서 벗어나 부자의 소비를 목표로 나만의 소신 있는 소비 습관을 만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