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퇴근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대부분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편인데 택배 올 것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OOO님 되시죠?"
낯선 여자의 목소리.
(뭐지, 또 어디 내 정보가 팔렸나. 보험 회사? 카드사? 어디지?)
혼자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네 맞는데요. 어디시죠?"
곧이어 들려오는 세상 친절한 목소리.
"네. 저는 OOOO의 부사장 OOO라고 하고요. 저희는 상류층 전문직을 대상으로 하는 결혼정보회사예요. 실례지만 OO 씨는 혹시 지금 만나는 분이 있으신가요?"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 없기는 한데.. 혹시 제 정보는 어디서 받으셨어요?"
"아~ 저도 약사님이랑 같은 대학교 출신이거든요. 아는 분에게 부탁해서 졸업 명부를 좀 받았어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런 식으로 정보가 막 도용당하는 세상이라니... 그럼 결혼 여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전화를 하는 건가? 결혼했으면 어쩌려고.. 엄청난 실례 아닌가?!)
"저희는 책임 운영제라서 성혼이 될 때까지 소개를 해드리거든요. OO 씨는 특별히 원하는 이성상이 있으세요? 저는 딸한테 항상 서로 코드가 맞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내가 원하는 이성상을 왜 그쪽한테 이야기해야 되죠..? 찾았으면 벌써 결혼을 했겠죠...)
"OO씨도 이제 나이도 있으시고, 약사님이니까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여자는 출산을 하려면 아무래도 서둘러야 되니까요. 저희 본사는 서울에 있고 부산에도 지사가 있으니까 시간 되실 때 편하게 한번 방문해주시고 상담도 받아보세요."
일면식도 없는 부사장님이 나의 출산을 걱정하고 내 결혼을 신경 쓰는 기이한 상황이었다.
"저희는 다른 회사들처럼 적당히 조건 맞춰서 이어주고 성혼비 받으면 끝이 아니고요. 정말 진심으로 고객님들이 원하는 짝을 찾아드리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래서 얼마 전에 제가 주선한 결혼식에도 초대받아서 직접 다녀왔어요."
결혼정보회사의 부사장님은 개업 의사와 어린이집 선생님인 두 남녀의 결혼식에도 다녀왔다는 말로 자신의 진정성을 어필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의사랑 결혼하면 여자가 도대체 뭘 얼마나 해갈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순간 '나 너무 속물인가'하고 현타가 왔지만 내가 실제로겪은 현실이 그랬다.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 종종 선자리가 들어오는데 실제로 한 중매 아주머니는 대놓고 엄마한테 물어봤다고 한다. '괜찮은 의사가 하나 있는데 선 한번 보겠냐고, 결혼하게 되면 뭘 해줄 수 있겠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충격적이었다.
보기도 전에 조건부터 흥정하는 만남이라니! 절대 그런 선은 보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미리 흥정을 하지 않더라도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면 결국에는 그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는 분의 소개로 두어 번 만났던 변호사가 있었다.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그 뒤로 만나지는 않았지만 얼마 후 엄마를 통해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보다 어린 여자와 결혼하는데 여자는 특별한 직업은 없고, 대신 해운대에 아파트를 해온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한다고 했다.
이것이 티브이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아들을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키워내느라 고생한 어머님들의 노고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장사하듯 아들을 내세워 돈을 요구하는 관례는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여자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기 위해 돈을 내고 전문직 남편을 사 오는 건가?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의 호감이 존재하니 결혼도 하겠지만, 결국은 조건을 맞춘 비즈니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결혼하면 살다가 언젠가 본전 생각이 나지는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자만추'가 힘들어지는 여건이기는 하다. 하지만 돈을 내고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여 사람을 만나고, 성혼비까지 내가면서 결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도 든다. 물론 평생을 함께 할 '내 편'을 찾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아등바등 애를 써서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입장도 아니다.
그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기쁜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없다면 굳이 맞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혼을 선택한 한 유튜버의 말을 빌리자면 비혼의 삶은 외롭지만 괴롭지는 않다고 한다. 나 역시도 결혼을 잘못해서 괴로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벗어날 탈출구로 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래서 결혼은 하고 싶지만 너무 간절히 원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른 형태의 삶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며 차분히 인연을 찾아보려고 한다. 너무 간절히 원하고 집착하는 것은 결핍에 집중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인연을 만나는데 방해가 되고 평정심을 잃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삶을 즐기며 여유롭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조급해지는 순간 여유를 잃게 되고 스스로를 '을'로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나의 행복이다.
아이를 낳으려고 결혼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미혼 여성들이 너무 가임기 연령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늦더라도,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도 평생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어른들은 왜 다들 결혼을 못 시켜서 안달일까? 결혼을 안 하면 완성된 인간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걸까? 부모님들은 자식을 결혼시켜야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물론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결혼시키기 위원회'라는 것이 있다면 위원장급의 열정을 가지고 계신다.
엄마, 그리고 전화하신 결혼정보회사 부사장님을 포함한 주변 지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