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 떠올려보는 나의 '수능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by 글짓는약사

그렇다. 나는 수능을 2번 봤다.


시험을 볼 때 실전에 강한 유형과 실전에 약한 유형이 있는데 무척 심약했던 나는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던 나에게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거는 기대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수능날이 가까워질수록 걱정과 불안으로 초조해졌다.


3학년이 되고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모의고사 성적은 대부분 좋았다. 주변에서는 다들 부담 가지지 말고 평소 실력대로만 하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게 어려웠다는 것이다.


멘탈 관리가 안 되었던 나는 9월 모의고사를 시작으로 성적이 점점 내려갔다. 긴장하다 보니 아는 문제인데도 실수해서 틀리고,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그것대로 '멘붕'이 와서 다른 문제도 놓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자괴감과 불안에 남 모르게 우는 날도 많아졌다. 지금 떠올려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고 3 수능 시험 전 날,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와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잠을 못 잤다. 걱정과 불안을 안고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마치 심장이 몸 밖에서 뛰고 있는 듯 쿵쾅거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해보고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셔봐도 소용이 없었다.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는 그날따라 또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결국 못 참고 일어나 시계 건전지를 뺐다. 야밤에 혼자 '쌩쇼'를 했다.


수능날 아침, 제대로 잠을 못 잤으니 컨디션도 좋을 리가 없었다.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며 시험장으로 향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좌석을 찾아 짐을 풀고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갔다. 그런데 생리가 시작되었다.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심술궂은 신이 '이래도 정말 괜찮아?'하고 훼방을 놓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친구에게 생리대를 빌리긴 했지만 이미 나의 멘탈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망했구나...'

점심시간,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겨우 몇 숟갈 먹었다. 그마저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배가 고픈 느낌도 없었다. 오후에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시험을 봤다.


혼란과 좌절 속에 시험을 다 보고 집으로 오니, 내 사정을 모르는 부모님과 친척들은 고생했다며 이제 푹 쉬라는 덕담을 건넸다. 고깃집에서 친척들과 다 같이 넘어가지 않는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채점을 했다. 시험을 보면서 어느 정도 느끼긴 했지만 가채점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궁금해하시는 부모님에게 점수를 공개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으시다가 나중에는 말문을 잃으셨다. 큰 기대에 따라오는 큰 실망이었을 것이다. 한순간 우리 집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고 엄마는 몸져 누우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재수를 하게 되었다. 사실 재수 학원은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연령대가 다양한 각양각색의 수험생들이 함께 있었고 남녀합반이라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같이 노는 재미도 있었다.(재수 학원에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하지만 수능 때가 다가오자 어김없이 초조해졌다. 그래도 두 번째라 처음보다는 조금 나았고, 같은 반에 있었던 장수생들의 조언 덕분에 어느 정도 멘탈 관리를 하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거의 하루 종일을 학원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공부했기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멘탈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수능 역시 평소 성적만큼은 안 나왔지만 첫 번째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였다.




만약 고3 시절로 돌아가 다시 한번 수능을 볼 수 있다면, 미리 피임약을 먹어서 생리 주기도 조절하고 천왕보심단도 복용하여 멘탈 관리도 할 것이다. 약사가 되고 나서 알게 된 지식을 그때도 알았다면 나의 첫 수능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덧붙이자면 천왕보심단은 '안정액'이라는 상품명으로 요즘 광고도 하는데 나처럼 심약한 사람의 긴장, 초조, 불안 증상에 좋은 일반의약품이다. 시험이나 면접을 볼 때 긴장을 풀기 위해 먹는 약으로 우황청심원은 많이들 아는데 천왕보심단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황청심원은 대체로 건강한(실증의) 사람이 갑자기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생긴 큰 불을 꺼주는 약이고, 천왕보심단은 약간 허약한(허증의) 사람이 지속적으로 걱정, 불안에 빠져 마음을 졸일때 촉촉하게 적셔주며 작은 불씨를 꺼주는 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일반약 강의를 들을 때 강사님이 두 약품을 비교하며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는데 직관적으로 와닿는 내용이라 기억에 남는다. 우황청심원은 아들이 도박으로 억대의 빚을 지게 된 것을 알게 되어 충격받았을 때 먹는 약, 천왕보심단은 아들이 집을 나가 안 들어와서 걱정되고 불안할 때 먹는 약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평소 잘 놀라거나 가슴이 자주 두근대는 심장이 허약한 수험생이라면 우황청심원보다 천왕보심단이 나은 선택지일 수 있다.


약사가 되어 공부하고 보니 천왕보심단이 과거의 나에게 꼭 필요한 약이었다.


그때는 수능 시험 한 번에 대학이 결정되고 인생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했고 나 역시도 그렇게 믿었기에 절대 실수해서는 안된다는 불안,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정도의 멘탈만 있었어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혼자서 너무나 힘들었던 그때의 나에게 시험 한번 잘못 본다고 인생이 망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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