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날개 Nov 26.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자가 지켜야 할 덕목은 무엇?

[10일] #1. 로스 아르꼬스에서 비아나(Viana) 가는 길

산솔(Sansol)이라는 작은 마을, 슈퍼 앞에 있는 간이 의자에 배낭을 놓았다. 사과 한 알을 사서 돌아오자 어느새 옆 테이블에 다른 여인들이 앉았다. 각자 슈퍼에서 먹을 것 한 개씩 사서 '에휴 힘들다'며 웃었다. 기본적인 먹을거리는  배낭에 있지만, 슈퍼에서 잠깐 쉴 겸 간단한  간식 한 개씩 산 것이다. 한 여인은 과자를 한 봉지 사서 나왔다. 자기들끼리 우작 우작 씹다가 우리에게도 내민다. 의외였다. 서양 친구들은  웬만해서는 나눠 먹지 않는다. 초면에 마구 나눠주는 한국인들을 비롯, 동양권 사람들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 것을 왜 굳이 줘야 하는지, 별다른 인식 없이 혼자 묵묵히 까먹는 사람인데, 이들은 좀 달라 보였다.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며 과자 몇 개를 집었다. 사과를 먹는 중이라 별로 당기지 않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응해야 했다.




아침부터 강한 햇살로 지쳤다.


다들 멍하니 앉아 기계적으로 간식을 입에 넣고 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말 시키지 않는 게 도와주는 분위기! 그늘 속 청량함으로 저절로 힐링이 된다. 그런데 이게 뭔고? 당나귀가 한 마리 우리 앞에 섰다. 엥? 어제 그 녀석이다. 주인장도 같다. 이 마을에서 사는 녀석이었나 싶었다. 여기가 집이냐고 물으니, 그들도 우리처럼 계속 가는 중이란다. 영어를 잘 못하는 주인장과 많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어제 우리가 생각했던 슬픈 운명의 당나귀는 아닌 듯 반지르르한 모습이었다. 왠지 마음이 놓였다. 짐만 조금 줄이면 좋겠는데! 이유를 몰라 답답하지만 주인장의 당나귀 사랑이 충분히 느껴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음, 모르겠다이다. 과자를 먹고 있는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받은 일정표대로 로그로뇨까지 가려면 28킬로를 가야 한다. 아무래도 다 못 가고 중간 마을에 묵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 ‘비아나’라는 마을에서 묵는다는데 여기가 20킬로 정도 지점이다. 순례자 협회에서 제안한 일정표에는 비아나에서 묵는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부터 순례자들이 템포가 엇갈리며 일정도 달라진다. 부르고스 역시 대도시로 한 이틀 쉬어가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부르고스에서도 많은 만남들이 스친다.


슈퍼 여인들과는 일정에 대해서 깊이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왔다. 먼저 떠나왔지만 중간에 우리를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들도 쉬엄쉬엄 걷는 사람들인가 싶었다. 공동 식수대에서 물을 받고 다시 햇빛으로 나가기 위해 전력을 다졌다. 햇빛이 무서우면 안 된다. 가자! 이래서 아침을 일찍 시작하려고 부지런들을 떠는 것이리라.







<알아두면 좋아요>

로스 아르꼬스(Los Arcos)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일정은 상이하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받은 일정표에는 로스 아르꼬스에서 부르고스까지 6일간 갈 수 있도록 잡혀있다. 3일 동안은 마의 구간처럼 28킬로 정도를 걷게 된다. 로스 아르꼬스에서 로그로뇨까지가 28킬로, 로그로뇨에서 나헤라까지 28킬로(벤토사 들리면 29킬로), 나헤라에서 그라뇽까지 28.3킬로이다. 나머지 3일은 20킬로 안팎으로, 그라뇽에서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까지 22킬로,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에서 아따뿌에르까까지 18.6킬로, 아따뿌에르까에서 부르고스까지가 19.8킬로로 짜였다.

반면, 순례자 협회에서 제안하는 일정표는 좀 더 쪼개진다. 로스 아르꼬스에서 비아나까지 19킬로, 비아나에서 나바라떼까지 22.5킬로, 나바라떼에서 나헤라까지 18킬로, 나헤라에서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까지 21.5킬로,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서 벨로라도까지 23킬로, 벨로라도에서 산 후안 데 오르떼가까지 24.5킬로, 산 후안 데 오르떼가에서 부르고스까지 29.5킬로로 7일간의 일정이다. 순례자 사무실 일정표 보다 수월하게 걷다가 부르고스 도착 날 30킬로를 힘들게 걷는 일정이다. 이게 무리다 싶으면 나름대로 조절해서 갈 수 있다. 다만 일정이 너무 늘어지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일정표에 나온 마을 외에 작은 마을들은 알베르게가 문 열었는지가 관건이다. 비수기에 작은 마을들은 알베르게들이 거의 문을 닫는다.  

부르고스(Burgos)는 빰쁠로나처럼 한 챕터 쉬어가는 도시다. 순례자 사무실에 나눠준 일정대로 3일을 힘들게 28킬로를 걷다가 나머지 날을 20킬로로 슬슬 갈지, 순례자 협회 일정표처럼 마지막 날만 무리를 할지! 하루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하면 된다. 아직 걷기가 힘든 사람에게는 근력을 더 다지는 시간이 필요한 순례자 협회 일정이 나을지 모르겠다. 무리 없이 가다가 부르고스 도착 날에 힘들게 걸으면 되니 말이다.







커피를 마시려고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또레스 델 리오(Torres del Río)라는 마을,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공터에서 집시 커플과 강아지가 보였다.

“아, 개다!”

개 이름이 마치카(Machika)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들 집시 커플은 독일인이었다. 이레체에서 꼬질꼬질했는데, 더 더러워진 모습이다. 지친 표정과 함께! 집시 커플도 여행 초반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날이 갈수록 쌀쌀해지는데 여전히 텐트에서 잠을 잔단다.

“알베르게 한편에서 자면 안 되는 거야?”

“개를 받아주질 않아!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어.”

자기들끼리 손을 꼽는데, 한 손으로 다 못 꼽지 못해 다른 손들이 모인다. 밖에서 지낸 날들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란다. 나는 마치카와 사진 찍느라 바빴다. 세미 정보에 의하면 그 집시 커플은 페이스북에서 유명한 인사란다. 자신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페이스북 주소를 건네받았다. 나중에 보니, 페이스북에서 만인의 연인이었다. 마치카가 큰 몫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 많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눈빛 안에 자연을 담고 떠도는 치유의 바람 같았다.


남자가 내게 열매를 내밀었다. 무화과란다.

“먹어봐! 맛있어!”

나는 그들이 건넨 무화과를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더 따줄게!”

남자는 나무에 올라 열매 따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여인네는 수다를 떠느라 바빴다. 정성껏 딴 무화과를 받아서 서로 나눠 먹었다. 나머지를 어찌할까 싶을 때 나보고 가져가란다. 고맙다며 주머니에 넣으려니 안 된다며 남자가 막았다.

“주머니가 더러워져. 그냥 비닐봉지에 담아!”

남자가 가리킨 곳은 내 등 뒤 배낭! 비닐봉지를 밖에 매달아 놓은 걸 용케도 봤다. 어쨌든 열매서 너 개를 확보했다. 이들을 언제 또 만나게 되겠는가.


느리게 걷는 내가 이들을 만난 것은 순전히 마치카 때문이다. 녀석의 템포에 맞춰 천천히 이동한 탓이리라. 매 순간 스치는 인연들, 길 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사람의 소중함을! 우린 서로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까미노를 축복했다. 진짜 순례자의 향이 이런 것일까? 그들에게 전해져 오는 사람 냄새, 마치카의 개 냄새! 오래전부터 이 길을 걸었던 천년의 순례 향이다.







 

다시 천천히 길을 나섰다. 얼마간 걷다가 아몬드 나무를 발견했다. 집시 커플이 말해준 나무였다. 그들이 알려준 대로 나무에서 아몬드 열매를 따서 돌로 찍어 꺼내 먹었다. 이미 앞서 지나간 순례자들이 흔적을 남긴 도구들! 도구를 사용하는 고등 침팬지가 맞는구나! 과연 내가 '고등'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아몬드는 정말 맛있었다. 견과류를 열심히 돌로 깨는 중에 한국 청년 하나가 지나갔다. 그에게도 몇 알 건네고 나서 또다시 열심히 깼다. 나중에 이게 뭔 짓인가 싶었다. 아, 힘들어! 깨 먹기 힘들어서 더 욕심내지 않기로! 돌로 깐 아몬드 몇 알만 봉투에 담은 뒤 떠나왔다. 물론 이 몇 알조차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자랑삼아 맛보라며 건네주고 끝냈지만!






길가 포도나무에 포도가 말라 붙어서 매달렸다.


이미 수확을 끝내고 남은 찌꺼기였다. 말라붙긴 했어도 포도가 나무에 아직 붙어있다는 게 신기했다. 못 먹는 것이라 놔둔 것일까? 우리식 까치밥 연시처럼 뭔가 의미가 있나? 포도 한 송이에 말라비틀어진 포도 알갱이 다섯 알이 붙어있다. 한두 알을 조심스러게 따먹어봤다. 우와 뱉어낼 수 있다는 각오로! 아, 아까웠다. 이렇게 달콤하다니! 남은 포도알은 버려질 것 아닌가! 어차피 바닥에 떨어지면 썩어질 텐데! 막 따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나중에 먹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말라붙은 녀석들의 야윈 몸뚱이! 흠! 그래, 참자! 더는 맛보지 않기로 했다. 잠시 달콤함에 취해서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사실 스페인에서 과일은 비싸지 않다. 싱싱하고 질 좋은 과일을 슈퍼에서 실컷 먹을 만큼 사도 얼마 안 했다. 심지어 1달러어치만 사도 혼자 먹기 흡족할 정도였다. 굳이 남의 소유의 포도밭을 서리의 추억으로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서리도 옛말이지, 우리나라도 이제는 철컹철컹 시대 아닌가! 그만큼 오랫동안 공들인 농작물들이다. 근육이 아플 정도로 힘든 노동 속에 키워진 녀석들이다. 예전 농활 갔을 때 알았다. 어정쩡하게 숙여 포도송이를 싸는 일에 허리가 녹아난다는 것을! 끼니 사이에 왜 참을 먹는지, 양은 왜 그토록 많이 먹는지, 반나절만에 이해가 됐다. 노동 후, 술에 취한 가무들! 백포도주 한 잔에 풀리는 근육의 신비, 정신은 이미 달 기지 사람처럼 둥둥 떠다니며 기분 좋은 상태! 포도주에 대한 나의 단상이다. 그래, 포도밭에서 느끼는 아련한 추억, 더는 포도 향에 취하지 말고, 미련도 두지 말자. 내게는 집시 커플이 알려준 야생 열매 따는 법이 있지 않은가?




언덕 위에 오르자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미가 갑자기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우리는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우리가 그나마 서로 공유할만한 동영상이었다. 첨밀밀에서부터 장국영 노래까지, 세미가 찾아서 틀면 장전된 춤이 풀리면서 노래까지 따라 불렀다. 내가 학창 시절에 장국영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홍콩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첩혈쌍웅이나, 천녀유혼이니, 예스마담, 첨밀밀로 사랑과 의리를 꿈꿨는데! 포도밭에서 포도 몇 알 먹었다고 설마 취한 건 아니겠지? 그 유명한 군인 춤은 국적을 떠나 있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춤사위! 예전 선조들이 추신 관광버스 춤사위 보다 역동적이다. 동양권에서는 이 또래 사람들이 즐겨 추는 춤인 듯했다. 길 위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안 보이니, 막무가내 춤이 더 극에 달했다. 서로 눈 감아주니, 샤먼 같은 홀릭 경지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찾아오셨다.


아, 비다. 비의 여신이 강림했다.


갑자기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피할 곳은 이 길 위에 아무 데도 없었다.

“음, 하늘이 우리의 춤을 기우제로 받아들이셨나?"

"비를 아낌없이 뿌려주시네!”

배낭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역시 꺾이지 않은 기세로 춤추며 걸어 나갔다. 그런데 어? 다시 해가 말짱하게 떴다. 이건 뭐지? 너무 극단적이다. 조짐이라는 게 없이 비가 내리더니, 역시 미련 없이 뚝 그쳤다. 조금 흩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얼마간 걸으니 비옷이 바짝 말랐다. 다시 벗어서 배낭에 걸쳐놓았다. 우린 신나게 또다시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걸었다. 그러니, 비가 또 내린다. 세미와 나는 심각하게 서로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춤 추지 말자. 비옷 입고 벗기가 귀찮아."

"우리에게 샤먼의 피가 흐르나?”

그러다가 또다시 신나게 노래하며 춤을 추려다가 워워 말려야 했다.

“비 온다. 노래와 춤 금지!”


희한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그토록 노래하고 춤춘 일은 그 뒤로도 없었다. 농담처럼 기우제니, 샤먼이니, 춤과 노래를 금지한 덕에 세미와는 더는 비에 흠뻑 젖은 일은 없었다. 단순히 비가 오면 비옷을 꺼내기 귀찮아서 금지한 것인데, 맞아떨어져서 희한하긴 했다. 순례길 미스터리가 또 하나 있다. 비 올 때 비옷을 입으면 비가 그친다는 것이다. 벗으면 또 온다. 타이밍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비가 오면 일단 귀찮아서 스쳐 가는 거려니 하며 버틸 때까지 버틴다. 그럼 빗줄기가 굵어진다. 이제 비옷이 절대 필요하다 싶을 때 꺼내서 호들갑스럽게 입으면 딱 그친다. 비옷을 뒤집어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초기에는 길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입혀달라고 한 일도 많았다. 비를 맞은 배낭 위로 비옷이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고 찰싹 달라붙어서 아예 배낭을 벗어서 바닥에 두고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지나가는 순례자들 앞에 서서 비옷을 가리키며 배낭을 보이면 씌워주고 가는 식이었다. 비옷을 뒤집어써서 앞도 안 보이지만 숙제처럼 덤덤하게 씌워주고 가는 것이다.


순례길은 홀로 걸어도 홀로 걷는 게 아니다. 절대적으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중에서야 비가 올 것 같은 날에는 미리 목부분에 비옷을 걸쳐두고 걷기도 했다. 비가 오면 배낭이 젖기 전에 펄럭이며 비옷을 뒤로 펼쳐 뒤집어쓰는 요령이 생겼으니! 그래도 비옷 입고 벗는 일은 귀찮은 일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할 때 계속 입고 걸으면 땀이 난다. 햇빛은 순식간에 강렬하기 때문에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벗지만, 다시 애써 벗어서 배낭에 접어 넣으면 또다시 비가 뿌린다. 나중에는 비옷을 접지 않고 배낭에 걸치거나 옆구리에 꽂아놓고 걷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골탕을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 순례자들이 다 이상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왜 비옷만 입으면 비가 그칠까? 그 많은 순례자들이 각자 길을 걷는데 똑같은 현상을 왜 겪게 될까?   






6시가 다 됐다. 서머타임으로 아직 해가 짱짱하다. 오늘은 비도 내리고, 햇빛도 강렬했다. 극단적인 날씨 탓에 몸이 바빴다. 숙명적으로 ‘비아나’에 머물 수밖에 없겠구나! 근데 왜 '비아나'가 나타나지 않지? 이리 오래 걸릴 거리가 아닌데? 가도 가도 그 자리 같다. 몸이 지쳤다.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도로가로 ‘비아나’ 표지판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쉴 수 있는 뜰에 야외 의자들이 놓였다. 마치 '어서 와, 오늘 힘들었지? 다 안다.'는 듯, 일단 쉬고 보라는 쉼터 같았다.



어느 알베르게에 묵을지 아직 정하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할아버지한테 알베르게는 어디가 좋으냐고 물으니, 언덕 꼭대기를 가리킨다. 괜히 물어봤다. 마을은 여기서부터 인데, 왜 꼭대기까지 가라는 건지!  

“저 위로는 죽어도 못 가!”

우린 반경을 살폈다. 한 군데가 포착됐다. 마을 바로 입구 쪽이라 가까웠다.

“여기다. 여기!”

아무것도 안 살피고, 그저 위치로만 정했다.


햇빛이 여전했기에 당장 그늘진 골목에 있는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었다. 안 쪽으로 들어서자 한 여인이 카운터에 앉아있다. 바로 넓은 주방과 식당 의자들이 보인다. 보기에 깔끔해 보였다. 그런데 주인장이 뭔가 비련의 여인 포스다. 세미랑 오다가 말한 게 있었다. 벙커로 된 도미토리 두 사람 몫에서 더 보태면 방 하나를 쓸 수 있다는데, 룸 가격을 물어보자고 했다.

“둘이 쓸 방 있어요? 얼마예요?”

가격이 얼마 비싸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1층 주방 옆 벙커 방에 모여 있는 듯했다. 우리가 쓸 방은 위층이라고 했다. 위층 계단으로 오르려는데 서늘하다. 계단에서 주인장에 물었다.

“위에도 사람들이 있죠?”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렇지! 2층 침대가 쭉 놓인 큰 방이야. 하지만 오늘은 너희 둘만 써!”

뭔 소리지? 세미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위에 두 사람이 묵는 방이 없어요? 2층 침대 큰 방이 있다고요?”

“그래. 1층 침대를 각자 쓰면 되잖아!”

“우리가 낸 가격은 벙커 방 쓰는 것보다 비싸잖아요.”

“당연하지. 모두 묵는 게 아니고, 너희 둘만 쓰니까 비싸지!”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다.

“그럼 딱 두 사람만 쓰는 방이 없단 거네요?”

“우린 다 벙커로 된 방이야. 위층을 너희 둘만 쓰게 한다니까!”

사람이 없는 비수기로 접어드니까, 순례자들을 모두 한 방에 몰아놓고, 남은 방은 이런 식으로 돌리는 것인가? 방 하나를 놀리느니 낫겠지? 그런데 비싼데 왜 우리가 굳이 2층 침대에서 또 자야 하나?


오늘은 비까지 내려서 밤에 사람의 온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날이다. 계속 그늘이었을 건물은 습하고 축축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없는 넓은 방에서 둘이 잔다면 저녁에 너무 추울 게 뻔했다. 그 큰 방에 히타를 빵빵하게 틀어줄 리 없었다. 우린 주인장이 왜 이런 장난을 하나 싶었다.

“방도 아니고, 같은 벙커 방인데 왜 비싸게 주고 자요? 우리도 그냥 다른 사람과 같이 쓸게요.”

이미 지불한 숙박비 차액을 돌려받았다. 그녀는 얼굴이 침울했다. 딱 봐도 나 현재 우울증 있어,라고 쓰여 있었다. 자기 의지로 밝게 행동할 수 없는 게 우울증이지만! 건물이 그늘에 있어서 에너지가 다운된 건 아닌가 싶었다. 애초에 방값을 치를 때 저녁 식사를 자기 알베르게에서 먹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못 마땅한 얼굴로 쏘아봤다. 빨래는 어찌해야 하냐고 내가 물었을 때, 세탁과 건조까지 하면 자기가 자리에 가져다주겠단다. 오,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싶어서 부탁한다며 값을 지불했다. 그러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웃는데 왜 무섭지? 좋고 싫고, 극단적인 저 표정, 미저리급 호러물이다.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가까운 식당가를 찾아도 적당한 곳이 없었다. 슈퍼에서 뭔가를 사 온 아저씨가 언덕에서 내려왔다. 슈퍼도 언덕 위쪽에 있단다. 비가 슬쩍 또 내리기 시작했다. 양말도 안 신고 슬리퍼 상태로 언덕을 걸으니 발이 아팠다. 그래도 먹겠다는 일념으로 언덕을 올라갔다. 풍경이 참 좋은 마을이었다. 언덕 위로 본격적인 마을의 모습이 펼쳐졌다. 슈퍼와 카페가 있고, 작은 도로 사이로 가게들이 쭉 늘어선 예쁜 마을이었다. 언덕 위 알베르게는 공립이었다. 넓은 규모로 뷰도 좋아 보였다. 우리 숙소보다 한결 나아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젠장! 아까 할아버지 말을 들었어야 했네! 더 걷기 귀찮아서 말았더니만!”

“어차피 식당이 이쪽이라 올라왔어야 했네. 아, 힘들어!”

우리는 미저리 주인장과 숙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윗 지대에 오르지 못한 것을 더 한탄했다. 모든 생활권이 윗동네에 있는 듯했다. 이왕 올라왔으니, 저녁만큼은 맛있게 먹자 싶어서 맛있어 보이는 순례자 코스를 시켰다. 그런데 몸이 피곤하니까 맛이고 뭐고 대충 먹었다.


<알아두면 좋아요>

'비아나(Viana)'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까미노와 같은 의미인 비아(Via)라는 이름에서 파생되었다는 설, 로마의 여신이자 주술사였던 디아나(Diana)와 관련 있다는 설이다.

비아나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땅에 있다. 오래된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인근 마을과 가까운 탓에 산초 7세가 기존의 성벽과 합쳐 성벽을 만들었다. 비아나는 까미노 순례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발전했다. 양송이, 소시지, 비스킷, 리오하 원산지의 향기로운 포도주가 자랑이다. 외곽에 까냐스 연못은 자연보호 구역이자 조류 보호 구역으로 잉어, 누치 등이 살고, 수많은 황새와 백로, 오리, 가우마지, 거위 같은 조류들도 있다.

산따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은 성당 내부에 쇠로 된 솥이 있고, 못 네 개에 관을 쓰고 있는 그리스도의 로마네스크 양식 십자가 상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9세기까지 여러 기사단의 의식을 치르는 비밀스러운 장소였고, 순례자의 묘지 역할을 했다.    
                                                  
-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알았다. 숙소 주인장은 아마도 아까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건조까지 하면 빨래를 자리에 갖다 준다는 약속은 왜 했을까? 대단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듯하더니, 빨래 바구니에 내 옷들이 널브러져 담겨 있다. 세탁기 앞에 그냥 두고 가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빨래를 다 내다보게 했다. 처음부터 약속이나 하지 말지, 그럼 내가 신경 써서 가져왔을 텐데! 아까 방값 눈퉁이를 못 쳐서 열 받았나? 건조기를 비우지 않아서 누군가 쓰려고 내 옷들을 바구니에 담은 것 같다. 주인장이 건조기를 비우는 작업을 해주지 않은 것이다. 상관없다. 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건조까지 끝낸 양말이 마르지 않았다. 등산용 양말은 두꺼워서 늘 이런 불편을 겪는다. 아무래도 머리맡에 두고 자야 했다.   


방 안이 사람들로 꽉 차서 안온했다.


2층 나무 침대들의 배치가 괜찮았다. 밖에 빨래를 말리는 마당도 보이고, 불빛도 은은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무엇보다 스팀이 잘 나왔고, 사람들이 포근하게 둘러싸인 구조로 따뜻했다. 안에 사람이 꽉 찰 줄 몰랐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까지 모이니 꽤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정말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오늘 지치게 걸어온 탓인지, 차분하고 평온한 상태였다. 여기에서 누군가 코를 곤다면 만인의 타깃이 되려나? 오늘 보아하니, 그런 사람도 없을 듯했다. 느낌상! 주인장만 빼면 괜찮은 숙소였다.


“이제 잡시다. 불 끌게요!”

식당에 앉아있다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불을 꺼줄 거라 생각했지만 10시가 되도록 꺼지지 않은 불! 주인장이 이런저런 신경도 쓰지 않고 퇴근한 것 같다. 벌써 눈 감고 자는 사람들이 절반이다. 보통 알베르게들이 9시경에 불을 끈다. 뭐 그리 일찍?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야행성인 나도 저녁밥만 먹으면 기절각으로 잔다. 아무리 늦어도 10시경에는 대부분 불을 끈다. 내가 불을 끄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꿈틀거리며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침낭 자크 잠그는 소리가 자는 신호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으면 각자 랜턴을 가지고 다니며 해결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오늘 다들 피곤했는지, 일시에 자는 분위기였다.


그런 줄 알았다. 어디선가 강렬한 불빛이 내 눈알을 강타하기 전까지는! 아, 이 빛의 근원은 어디인가? 대각선으로 누운 여인이다. 책을 보겠다며 휴대폰 랜턴을 최강 밝기 상태로 켜고 있었다. 휴대폰 랜턴도 밝기 조절할 수 있다는 걸 대부분 모른다. 그래서 최강의 밝기다. 아 이런! 책을 보려면 아까 보든가, 아니면  나가서 식당 테이블에서 보든가, 이게 뭔 짓인가! 세미가 옆자리에 있길래 “눈 부시지?” 했더니, 비몽사몽 아니란다. 아무래도 그 친구 자리에서 쏘는 빛이 내게만 직접 전달되는 각도인 듯했다. 어쩌면 세미는 이런 빛에 별로 반응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왜 나만 나이트클럽 버전이야. 아무도 그녀의 밝은 빛에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냥 침낭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녀가 고정해서 랜턴을 쏘는 게 아니라, 엎치락뒤치락 불빛을 이리저리 굴리며 쏴댔다. 어디선가 “흠”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만 느끼는 빛이 아닌데,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지? 그녀가 눈치를  보고 있는지, 갑자기 침낭을 뒤집어쓴 채 불빛을 굴리며 책을 보고 있었다. 설마 불빛이 침낭으로 차단될 거라고 믿는 건가? 침대 위에 앉아서 책을 보는 통에 환한 등대가 놓인 것 같았다. 지금 꼭 봐야 할 책인가? 대략 가이드 북으로 보였다. 계속 부스럭거려서 잠이 안 왔다. 어지간히 보다가 말겠지, 30분 정도 기다렸을 것이다. 그사이 꼼지락 거리는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다들 잠을 자는지 아무 말이 없으니, 온전히 깨어 있는 내 몫이다. 아까처럼 누군가 불 꺼주길 바라듯 그녀에게 언질 해줄 사람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총대를 메기로 마음먹었다. 생각 같아서는 '너, 콱 그냥 잠 좀 자자!' 뭐 이러고 싶었으나, 그저 ASMR수준으로 그녀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불빛이, 너무, 강해요.”라고만 했다. 그러자 그녀가 “아, 미안해요!” 하면서 꼼지락 거리길 여러 차례,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가 몇 번을 반복하더니 마침내 랜턴을 껐다. 그러자 사방에서 기침을 하며 돌아눕는 소리, 침낭을 다시 덮고 자크를 올리는 소리, 이어폰 등을 빼고 자는 소리! 이런 소리들이 들린다. 그제야 모두 잠을 청한다는 것! 뭐야, 다들 누가 나서 주길 바란 거야? 그래, 좋다. 그래서 여보세요? 오늘 밤은 다들 평안하게 주무시겠지?




다음 날, 랜턴녀가 살짝 섭섭한 눈빛을 내게 날렸다.


그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나라는 걸 정확히 알았구나! 불빛이 나를 비췄으니까, 알았겠지? 흠! 이를 어쩐다!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바로 어제 산솔 마을에서 내게 과자를 건넸던 바로 그녀였다는 것! 아, 이런! 세미는 알고 있었나? 왜 말을 안 해준 거지? 하여간, 나도 참! 조금 더 참을 걸! 왜 나서서 말이지! 이래서 멀리 내다봐야 하는 거구나! 그녀가 나라는 걸 알고, 얼마나 섭섭했을까? 친구가 되고 싶어서 손을 내민 사람에게 타박을 한 게 아니고 뭔가! 이래서 순례길에서 사람들이 불편을 겪어도 꾹 참는 쪽을 택하는구나! 나중에 오다가다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다. 때로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고, 역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순례자들끼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금 더 예의를 갖춰 대할 필요가 있고, 예의에 어긋난다 해도 너무 힐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다음에는 내 눈알에 누군가 랜턴을 대고 흔들어도 참아야지! 눈알에 강렬한 빛이 스며들면 괜찮다며 수건이라도 뒤집어쓰고 자야지! 앞길을 내다보지 못한 스스로 혼을 내며 배낭을 꾸렸다. 과자를 건넨 랜턴녀에게 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싶었는데, 그녀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래, 많이 섭섭했구나. 미안하다! 정말, 그래도 너의 앞길을 위해, 부엔 까미노!


아침 식사는 어제 슈퍼에서 샀던 간식들이다. 세미와 내가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무리하는데, 밖에 반쯤 내려져 있던 철문이 스르륵 올라가며 열렸다. 앗! 주인장 등장! 이럴 수가! 벌써 8시 반이었다. 빨리 떴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나설 시간을 놓쳤다. 당황스러웠지만 세미가 애써 태연하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어제와 같은 변함없는 우울 모드 플러스 공격형으로 인사는커녕 찌푸린 인상으로 말했다.

“지금 너희가 왜 여기에 있니? 8시에 떠났어야지!”

“아, 이제 갈 거야. 미안!”

우울한 여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어제 조짐이 보이더니, 역시 우리의 아침까지 가라앉게 만들었다. 저 여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런 얼굴로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이유가 뭘까? 세미와 나는 얼른 이 어둡고 칙칙한 여인의 에너지 터에서 나가자고 했다. 우린 동굴 탐험을 끝낸 사람들처럼 서둘러 배낭을 메고 이곳을 빠져나왔다.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미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 아임 파인 땡큐, 엔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