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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Jan 25. 2021

[산티아고 순례길]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16일]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가는 길

오늘은 벨로라도에서 12킬로 거리에 있는 마을,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머물기로 했다.


<알아두면 좋아요>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VillVillafranca Montes de Oca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자랑으로 삼는다. 맑은 개울과 야생동물의 은신처가 되는 숲이 둘러싸여 있다. 수령이 오래된 떡갈나무 서식지이자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 숲도 볼 수 있다. 로마 시대에는 아우카로 불리고 주교가 살던 곳이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와 부르고스의 중간 마을로 신비로운 전설과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오까 산은 오랫동안 순례자들을 노린 도둑들이 들끓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순례자가 도둑에게 돈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을 때 그 부모가 간절히 야고보에게 기도하자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실제로 도메니꼬 라피라는 순례자는 오카 산 숲에서 길을 잃고 오랫동안 빠져나올 수 없다가 버섯을 먹고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야 뽀드리다(Olla Podrida; 썩은 냄비라는 뜻)라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고-



이심전심


아침, 꼭두새벽에 자객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이들이 많은데, 오늘 청년 무리들은 아침부터 요란한 식사를 한다. 이미 유리잔까지 와장창 깨 먹으며 설거지까지 마쳤다. 다른 순례자들은 구석에서 소심한 아침식사를 했다. 어제부터 방에서 뭘 해먹을지, 누가 요리를 할지,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소리를 방 사람들이 다 들어야 했다. 결국 부엌도 그들 차지였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식당에서 했지만, 부엌을 쓰려던 사람들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아침은 간략하게 먹을 줄 알았더니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다행히 숙소 마감 시간 10분 전에 테이블이 비워졌다. 미친 듯이 먹을 수 있는 시간! 그런데 그들이 막판에 빵을 내민다. 일반 슈퍼에서 파는 빵이다. 우리의 삼립빵 정도 되시겠다. 새 빵도 아니고 먹다 남은 빵이라니! 다들 시큰둥한 표정이다. 먹다 버린 껌도 아닌데, 테이블 분위기가 냉전시대 포로교환 테이블처럼 서늘하다. 모두 빈정이 상해 있던 거다.


내가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빵을 건네받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 그래, 호의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숙소를 떠나고 다른 순례자들에게도 맛보라며 빵을 건네자 다들 대놓고 맛없다고 인상 쓴다. 그 정도야? 먹어보니, 음, 정말 맛없다. 빵이 이렇게 맛없을 수 있다니! 뭐야! 그래서 준 거였어? 어째 이상하다 했다. 어제부터 잘 차려 먹었으면서도 뭐 하나 건네지 않던 그들이 자기 짐 덜려고 떨구고 갔나 보다. 버리기는 마음에 걸렸나 보군! 또 하나의 교훈이다. 내가 맛없으면 남도 맛없다. 혀가 마비되지 않은 한, 남들이라고 그 맛을 모를 리 없다. 주고도 욕먹는 일은 하지 말자. 안타깝다. 그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고마움으로 기억할 수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격언이 있다. 음식 가지고 장난하면, 음식 가지고 야박하게 굴면,  '호 오온~나~!'


창문녀에게 어제 슈퍼에서 산 요플레와 빵을 내밀었다. 감동의 눈빛!  그래, 이거야 이거! 흔해 빠진 빵이지만 내 의중은 전달된 거다. 전에 창문 전투씬은 잊어라! 나는 너에게 칼을 내밀지 않았다. 꽃이다. 캬! 뭔가 시 같고 좋다. 물론 꽃 대신 빵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예전부터 꽃을 들고 온 남자에게 말했다. 꽃 대신 빵을 달라고! 뭔가 생존이 담긴 절규! 운율도 마음에 든다. 창문녀는 잠시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래, 빵이 먹고 싶었던 게지? 아까 그 녀석들 것보다 맛있는 빵이라는 걸 알아봤네? 그걸로 됐어! 나의 이런 속마음과 달리 그녀는 좀 더 진지한 메시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창문을 여네 마네, 티격태격했던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생존에 대한 염려를 한 것이다. 빵이 생존의 상징! 그 빵 한 조각에 담긴 상징을 서로 알아본 것이라 치자. 서로 이해가 담긴 눈빛을 발사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 역시 두려움이 큰 사람일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걸 우려한 나처럼, 그녀도 바이러스로 건강을 해치면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이다. 결국 같은 이유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줬을지 모른다. 그녀도 아픔 하나 가슴에 담고 길을 걷는 듯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깊은 우물 속에서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그 간절한 눈빛! 애쓰며 걷다가 때론 무너지고, 때론 추스르며 자신과 다르지 않은 남을 통해 길을 안내받을 것이다. 그래 다시 길을 떠나야지, 부엔 까미노!





가라앉는 날



전날 메디가 동키를 보낸다고 해서 나도 보내기로 했다. 일정표 대로라면 24킬로를 가야 했지만 반 타작만 하기로 했다. 이유는 12킬로 마을에서 더 12킬로를 가야 하는 구간에 마을이 없단다. 비 소식도 있고, 먹고 쉴만한 곳도 없다니, 부담스러웠다. 첫출발도 아니고, 기운 빠지는 지점에서 계속 걸어야 한다니! 메디는 발목이 아프단다. 나도 며칠 무리한 탓에 컨디션이 바닥이다. 둘 다 버스로 이동할 마음은 없는지 12킬로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침부터 걷는 게 힘들다. 마음도 무겁다. 세미는 좋겠다. 버스를 타고 다다음 일정표 마을로 간단다. 솔과 함께! 이즈음 되니까, 세미와 내가 같은 길 위에 설 날이 이젠 없겠다 싶었다. 버스를 타고 아예 두 날을 건너뛰겠다는데, 무슨 수로 따라잡겠는가! 솔이라는 친구도 나랑 함께 걸어본 적이 없다. 세미와 버스로 동행하는 것만 보게 된다. 아무래도 이 친구들은 그렇게 이동할 듯하다. 일정이 많지 않은 탓에! 오늘은 나도 버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놀고 싶은 마음이랄까? 계속 지루하게 홀로 걷는 게 힘들었나 보다. 전날 성당에서 신나게 춤춘 후유증인가? 세미가 같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자고 했을 때, 그래, 하고 따라갈 뻔했다. 정신을 차린 이유는? 보고 싶어서였다. 길이 보고 싶었다. 800킬로 구간, 1000년간 순례자들이 걸어왔다는 그 루트를 온전히 보고 싶었다. 어디부터 어디가 지루해서 건너뛰라는 구간마저도 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호기심일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이 길을 오게 된다면 그때는 버스로 여행할 수 있겠지! 편하게 풍경들을 구경하며 여유를 누리는 여행도 재미있을 테다. 물론 일정 구간 걸어야 알베르게에서 재워주겠지! 그때는 지금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고 오겠지? 그렇다면 두 발로 걷는 이 순간이 제일 나은 상태일 테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냥 걷자!


밤새 비가 내렸는지, 길이 젖어있다. 흙길을 갈 때는 조심해야 했다. 마음이 가라앉는 날, 비까지 내려서 발걸음도 무겁다. 논두렁 같은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웃는 소리가 난다. 돌아볼 힘도 없다. 지나가면 '부엔 까미노' 인사나 해야지! 그런데 익숙한 웃음소리다.

"히히히!"

미소 천사 메디다.

"어? 숙소에서 먼저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천천히 움직였어요."

영국 아저씨와 어울리던 메디가 오늘은 혼자 걷는다. 이제는 조금 떨어지려나 보다. 영국 아저씨 때문인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눈치다.

“메디, 젊은 친구들이랑 어울려 봐! 어서 먼저 가. 이따가 숙소에서 보자!”

좁을 길을 터주자 메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특유의 미소와 함께 긴 팔다리를 구름 산책하듯 가볍게 흔들면서!

“수, 걱정마요. 나도 천천히 걷고 싶어요. 지금 발목이 아파요. 혹시 혼자 걷고 싶어서 나를 보내려는 거예요?”

“아니야. 메디가 나한테 속도 맞춰 걷다가 늦어질까 봐 그래!”

“얘기하면서 걸으면 금방 도착하잖아요.”

메디가 히히히 웃는다. 나도 덩달아 히히히 웃는다.





실없는 농담



오늘은 아주, 아주, 아주 버스가 그립다. 대도시에 가서 쉬고 싶다. 정말, 정말, 정말, 많이, 많이, 많이, 놀고 싶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자! 가는 데 까지 가보자고 걷는 길, 어쩐지 고행길이 되어간다. 이럴 때 나타난 메디 덕에 위안을 얻는다.


메디는 전형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가씨다. 신앙의 힘으로 부모님이 좋은 사람으로 잘 키워낸 듯하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며 교조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보다 진정성 있고, 사랑 넘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신앙인의 참모습이랄까? 나는 날라리 신자다. 단아하고 청아한 사람들, 깊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너무 예의 바른 사람들은 불편하다. 적당히 농담도 하고 살짝 반칙도 하며 기본을 지키는 사람들이 좋다. 예의를 차리느라 너무 진지한 이들은 재미가 없다. 마음속에 CCTV가 자유를 막는 듯 하기에! 실없어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좋다. 인생을 달관한 자들이다. 어리숙하고 덜떨어진 빙구 상태가 세상을 헐렁하게 대하는 모습이라 좋다. 아재니 아주머니니 그런 개그를 때리는 사람들, 너무 뼈 때리게 혼내지 말자. 심심해서 놀고 싶은 거다. 부장님 코드로 헤아려 조금만 놀아주자. 물론 버릇되면 안 되니까, 적당히 빠져나올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그게 바로 인생 타이밍이다.

 

“메디, 너 어디에 뒀어?"

"뭘요?"

"날개! 배낭 안에 날개가 구겨져 있는 거 아니야?”

"수, 너무 웃겨요. 수만 보면 웃음이 나와요!"

메디가 너무 대놓고 웃는다. 메디의 개그 코드는 천사다.


영어로 개그를 하는 건 의외로 쉽다. 허를 찌르면 된다. 인도 여행 때 터득한 것이다. 네팔로 넘어가면서 40대 자유로운 영혼 언니를 만났다. 골목을 누빌 때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며 성가시게 했다. 여자라면 겪는 과정이다. 보통은 눈도 안 마주치고 불러도 모른 척한다. 그런데 이 언니는 이 남자들에게 다 아는 척하며 인사까지 일일이 다했다. 묻는 말에 대꾸도 다 해주며 지나다녔다. 어쩔 때는 하트를 날리고 윙크까지 해준다. 뮤지컬 주인공 같은 이 액션 뭐지? 충격이었다. 대부분 남자들이 말을 거는 레퍼토리는 뻔했다. 이름이 뭐니? 어디에서 왔니? 이 기본 질문에도 다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참으로 유쾌하다.

"어디에서 왔니?"

보통은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답한다.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나? 어디서 왔냐고? 나, 우리 엄마 다리 밑에서 왔어! 하하하!”

나는 물을 마시다가 뿜었다. 어릴 때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은 '다리에서 주워왔다' 개그 아닌가? 그런데 그때, 골목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 월드컵 함성과 맞먹는 환희가 골목에서 터져 나왔다. 치근덕거리는 무리들이 골을 넣은 것처럼 유쾌하게 그 언니의 농담에 반응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는 사람들과 골목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뮤지컬 같았다. 사람의 매력은 외모나 나이에 있는 게 아니었다. 농담 안에 상대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서로 유쾌하게 다가가는 농담은 신의 온정이다. 그 뒤로 나도 외국 친구들과 만나서 느닷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외국 친구들은 그런 나를 유쾌한 사람, 흥미로운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세상 모든 남자들과 자보겠다는 그 언니의 꿈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이생에서는 진정 못 이룰 꿈인가? 사실 혼자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을 두고 이래저래 음흉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온전히 혼자 여행을 해보지 않은 자들이 분명하다. 인연이 그리 쉽게 만나게 되던가? 마음 없이 온 세상 사람들과 잘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능력자! 부러운 대상!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일단 철이 안 든다. 40대에도 50대에도 60대에도 꿈을 꾸는 사람은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한다. 나 역시 철없는 인간에 가깝다. 나의 언니가 오죽하면 나이를 먹어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냐고 물을 지경이다. 내가 가진 최종 꿈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나는 유쾌한 농담으로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늙어가고 싶다. 아침부터 동네 카페에 모여들어 "오늘도 안 죽고 살아있다. 굿모닝!" 하며 틀니를 장착하는 것이다. 인류가 사라져도 천년은 끄덕 없이 지낼 기본 텃밭을 일구고, 간단한 삼시 세끼에 밀크티와 빵, 초콜릿을 먹으며 화분에 물 주는 일과! 남은 시간은 책과 음악, 영화에 어쩌다가 찾아오는 마음 친구들과 간단한 요가와 명상으로 생을 정리하고 싶다. 이따금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며 그들의 모험담도 들어야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눈빛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나의 주름진 나의 눈을 보며 자신의 판타지를 펼칠 수 있기를! 그것이 나의 꿈, 이생에서 이루고 싶은 나의 꿈이다. 아! 빠진 게 있다. 남자는 덤으로 주워와야지! 그리고 그에게 이 모든 걸 시켜야지! 오늘도 여전히 이런저런 꿈을 꾸며 살고 있다.    


한적한 길을 가는 동안 무척 지루하고 외로웠을 길, 메디가 있어주어서 새삼 고마웠다. 20대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다 거쳐온 사람처럼 메디는 꽉 찬 에너지를 가진 좋은 벗이다.  





눈치


커피를 겸해서 아침식사를 할 만한 카페를 찾았다. 첫 번 째 마을, 토산토스(Tosantos)에 문을 연 카페가 없었다. 우리처럼 문 연 카페를 찾던 순례자들이 다음 마을로 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비가 거세졌다. 메디와 나는 얼굴에 들이치는 비 때문에 낄낄낄 웃었다. 그때 카페를 찾던 자그마한 체구의 단발머리 여인이 합류했다.

 

비 때문에 춥다. 따뜻한 커피가 절실하다. 2킬로 조금 못 가 마을 하나가 나왔다. Villambistia 마을! 아까 마을에서 본 순례자들이 아는 척을 한다. 벌써 간단하게 식사를 했단다. 빠르다. 비가 더 쏟아지자 그들이 추천한 카페로 달려가자 싶었다. 그런데 단발머리 여인은 계속 앞서 걸어간다.  길가 카페를 두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단발머리 여인도 커피를 마실 거라고 했는데? 메디와 나는 어쩌지? 하다가 빠른 걸음으로 단발머리 여인을 쫒아갔다. 잠시 동행한 친구니까 같이 가자 싶었다. 그녀는 아마도 길가 카페를 못 본 것이리라.


한참을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카페 다운 카페가 나왔다. 서너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주인장과 아침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린 버거운 배낭을 구석에 내려 두었다. 단발머리 여인이 구석 자리를 잡았다. 왜 많은 테이블 중에 저 구석이냐 싶었지만 확실히 밖이 잘 보이는 유리창이 멋져 보이긴 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단발머리 여인이 주문은 안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어딘가로 전화도 건다. 혼자 분주하다. 메리와 나는 메뉴판을 외우다시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단발머리 그녀가 어느새 자기 것만 주문했다. 뒤이어 메리도, 나도, 각자 주문했다. 간단한 커피와 빵, 직접 구워주는 오믈렛인데, 오믈렛에 치즈를 넣냐 마냐 정도의 선택이 필요했다. 나는 치즈 없는 기본을 주문했다.


빵과 함께 오믈렛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오믈렛! 신나게 포크질을 해서 막 입으로 넣으려던 찰나! 주인장의 다급한 외침!

“잠깐만요! 미안해요. 바뀌었어!”

단발머리 여인이 시킨 오믈렛이란다. 어쩐지 두툼해 보였다. 배고픈데, 더 기다려야 하나? 나는 주인장에게 손으로 징징 우는 표시를 하며 접시를 건넸다.

“잠시 행복했어!”

그러자 주인장이 미안한 표정과 함께 애교 섞인 윙크를 날린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오믈렛 줘! 잠시 후 주인장이 오믈렛을 그녀에게 다시 해주고 내가 잘라 놓은 오믈렛 일부를 건넸다. 다 주는 건 비싼 오믈렛을 시킨 그녀에게 섭섭한 일이라 일부만 준 듯하다.

“맛봐!”

“오! 행운!”

메디와 나는 신나게 웃었다. 그런데 단발머리 그녀가 다 먹고 난 뒤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이죠!”

그래서였나 보다. 혼자 담배 뻑뻑 피우고 싶었는데, 우리가 빗속에 뚫고 그녀를 쫒아왔나 보다. 메디에게 그녀가 우리를 따돌렸던 거냐고 물으니, 아무래도 그런 건가 보다고 했다. 어쩐지! 뒤도 안 돌아보고 속도를 내서 걷는다 싶더니만! 메디도 나도 눈치 없는 사람이다. 단발머리 그녀는 속으로 그랬겠지. 아, 놔! 저것들 계속 쫒아오네? 우린 그러거나 말거나 잘 쫒아와서 열심히 먹고 있다. 이런 오믈렛 맛집을 찾아준 그녀에게 고마워하며!


눈치 없는 매디와 나는 다 먹고도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유쾌한 성격의 주인장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열성적으로 포즈를 취하는 주인장, 전형적인 스페인 남성이다. 호탕한 마초 스타일! 이 카페는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되는 곳이었다. 오늘 같은 날,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의 맛있는 오믈렛이나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 배낭을 동키로 보내면 이게 문제다. 즉흥적일 수 없다. 멋진 남자를 만나도 머물 수 없다. 험험! 나는 근육질의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이 참 좋다. 청소하는 모습에 더 감탄한다. 중국 여행에서 멋진 남자가 음식을 만들고 배식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사료를 주는 대형견이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런 거겠지? 날이 추워져서인지 따뜻한 커피와 함께 나온 두툼한 오믈렛이 행복을 주었다. 순례길 내내 먹어본 그 어떤 오믈렛 보다 훌륭했다.


단발머리 그녀에게 조금 더 쉬다가 오라며 마음껏 끽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주었다. 메디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발머리 그녀가 그제야 환한 미소를 날린다. 미안해! 몰랐어!


비가 제법 세졌다. 도로 옆으로 난 길이 논두렁 흙길처럼 좁고 거칠었다. 메디의 비옷이 부실해 보였다.

“메디, 너 비옷이 너무 얇다. 비가 거세졌어. 먼저 빨리 걸어가.”

“그럴까요? 먼저 가도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난 비옷이 튼튼해!”

“그럼 먼저 갈게요! 천천히 오세요.”

"그래!"

메디가 다급하게 걸어갔다. 메디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이제 더 천천히 걸어야지!






<알아두면 좋아요> - 오카산의 도둑  

오까 산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중세 때 순례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곳이다. 도둑과 강도, 불량배가 많았다. 납으로 만든 동전에 도금을 해 순진한 순례자에게 잔돈으로 바꿔달라며 가짜 돈과 바꿔치기하는 사기를 쳤다. 그래서 이 길에 관련된 말이 있단다. “도둑질을 하고 싶으면 오카산으로 가라.”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배낭은 어디에


드디어 마을에 입성했다. 어째 마을 분위기가 썰렁하다. 그 흔한 순례자 한 명이 안 보인다. 마을에 도착하면 한 둘은 식당이든 거리든 돌아다니기 마련인데! 비가 와서인지 아무도 없다.


일단 배낭을 보낸 숙소부터 찾아보자. 식당에 가서 숙소를 물어보니, 주인장이 갸우뚱거린다.

“거기 문 닫았어!”

“엥? 그럴 리가! 내 배낭 보냈는데!”

“그래? 그럼 호텔로 가봐!”

“호텔? 난 거기 안 묵을 건데!”

“지금 이 마을에 문 연 숙소는 거기밖에 없어. 배낭도 그리로 보냈을 거야.”  

난감했다. 호텔이라니! 하루 1만 원도 안 되는 숙박비를 지불하는 순례자에게는 부담이다. 메디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괜히 닫힌 숙소에 가서 배낭이 안 왔다고 발 동동 거리진 않겠지?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확인했을 테다.


길에서 순례자를 발견했다. 그에게 동키를 보낸 상황을 말하자 그도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 호텔에 있을 거란다.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같이 가자는 것! 단, 이 앞에 있는 슈퍼에 들러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란다. 나는 빗물이 줄줄줄 떨어지는 배낭을 메고 슈퍼 문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디로 가라고 설명만 해줘도 되는데 어차피 자기도 가야 한다며 친절을 베푼 것이다. 호텔에서 묵을 정도면 여유 있는 여행자인가? 터무니없이 비싸면 12킬로를 더 걸어야 할지 모른다. 그나저나 배낭이 잘 도착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슈퍼에서 나왔다. 손에 몇 가지 과자와 맥주가 든 봉지를 든 채! 비가 오는데도, 바람막이만 쓴 상태다.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비가 조금 가늘어졌다.





나 떨고 있니


비 오는 언덕을 얼마간 올라가자 아, 정말 호텔이 나왔다. 으리으리하지 않아도 확실히 호텔이다. 도시가 아닌 순례길, 작은 마을에 이런 멋진 호텔이 있다니! 정원도 예쁘고 로비도 삐까뻔쩍 했다. 알베르게만 보다가 호텔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를 안내한 순례자가 로비를 지나 프런트에 가서 내 배낭에 대해 물었다. 매니저가 환한 웃음으로 손가락으로 가리 킨 곳에 내 배낭이 딱! 나를 인계한 순례자는 흡족한 미소로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메디의 배낭도 잘 도착했다. 아, 그런데 메디의 배낭은 잘 도착했는데, 메디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이네? 먼저 간 그녀가 배낭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와이파이를 켰다. 데이터를 아끼느라 길에서는 대부분 꺼놨다. 휴대폰 목록을 찾아보니, 메디, 메디, 메디, 없다. 그러고 보니, 메디의 연락처를 안 받아놨다. 세미와 함께 나중에 사진을 나누자고 해놓고 연락처는 안 받은 것이다. 나는 급하게 세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미가 한가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미 잘 도착해서 잘 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세미, 지금 메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줄래? 배낭을 보낸 숙소가 문을 닫아서 호텔로 왔는데, 배낭만 있고 메디가 없다.”

세미가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로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메디와 통화가 안 된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디의 연락처였다. 세미는 내 속도 모르고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가 호텔처럼 깨끗하다며 6유로인데 고급스럽다고 야단이다. 대만 친구들도 만나서 대 여섯이 어울려 놀고 있다며 사진도 보내왔다. 어째 부르고스에 도착한 이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부러웠다. 나도 같이 끼어서 놀고 싶다는 욕망이 뚜껑 열고 나오는 것을 겨우 눌러 잠재웠다.


메디에게 서너 번 연락을 하자 드디어 받았다.

“메디, 어디야? 그 숙소 문 닫았어. 호텔로 와야 해!”

“나 호텔에 있는데요?”

“엥? 호텔 어디? 여기 프런트에 네 배낭이 있는데?”

“아, 수, 도착했어요? 내가 그리로 갈게요!”

그리고 10초도 안 되어서 그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이 속도? 호텔 문을 바라봤을 때 없었는데? 뒤통수에서 나오네?"

“네, 배고파서 뭐 좀 먹으려고요! 뒤에 호텔 카페가 있어요”

“메디, 어쩌지? 이 호텔 비쌀 것 같은데 괜찮겠어?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12킬로는 더 걸어야 하고!”

“나는 더는 못 가요. 발이 아파요. 수, 여기 안 비싸요.”

얘가 겉멋이 들었나 싶었다. 그래, 호주 사람들에게는 비싸지 않을 수 있지!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런 날도 있는 거야! 이 비를 맞으며 12킬로를 더 걸을 수 없다. 이 구간은 과거에 도적떼들로 유명하지 않았나? 지금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그만큼 험준하고 외떨어진 지역이라는 뜻이다. 비까지 내리는데 평소보다 더 먼 거리를 걸으면 체력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져서 제대로 도착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나중에 깜깜한 산중을 홀로 헤매는 날도 온다.


메디가 빙그레 웃으며 프런트에 있는 가격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 여기를 봐요!"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건 일반 알베르게 수준의 가격이었다.

“어? 정말 이 가격이야?”

“그렇다니까요! 호텔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래요. 우리가 가려고 했던 알베르게 보다 1유로 정도만 비싸요.”

그럼 아까 호텔에 데려다준 아저씨도 일반 순례자였구나!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프런트에 있던 남자가 아까부터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여겼는지 눈치껏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뒤쪽에 별도의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가 있어요. 방은 두 종류가 있어요. 단층 침대 방, 2층 침대 방, 가격 차이는 2유로입니다. 지금 체크인하실래요?”

세상에, 단층 침대방도 있다고? 2유로 차이만 나? 안 비싸네? 당연히 단층이지! 그런데 메디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면 2층 침대방에 머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건가? 싶어서 그냥 10유로 단층 방에 머물자 했더니, 자기는 아껴야 해서 8유로 2층 침대를 고를 거란다. 나에게도 8유로에 머물면 안 되냐고 한다.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1층 침대에 머무는 거니까 괜찮지 않겠냐며 잘 생각해보란다. 이렇듯 알뜰살뜰한 메디를 잠시나마 겉멋 든 호주 처녀로 오해했다. 미안!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그 사이 방이 차면 어쩌지? 매니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비수기, 비 오는 날, 일정표 상에 머무는 마을도 아니고, 더군다나 순례자들은 다른 알베르게를 찾았을 테다. 이 호텔을 모르고 지나친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반타작 덕에 일찍 도착한 우리에게 선택의 폭은 많을 것이라는 확신! 하지만 사설이니 예약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매니저가 마침내 전화 통화를 끝냈다.

“침대가 얼마나 남았어요?”

갑자기 매니저 표정이 심각했다.

“어쩌죠? 방금 당신들이 의논하는 사이에 방이 다 나갔어요.”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요? 1분도 안 됐는데?”

“나 지금 전화받았잖아요. 방금 풀로 예약되어서 다 찼어요.”

아니 이놈의 매니저가 우리가 코앞에 있었는데, 결정 안 했다고 튕기는 거야? 호텔에서 묵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거야? 이런 생각으로 메디를 봤더니, 메디가 그 서양애들 특유의 두 팔을 벌리고 으쓱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매니저와 눈짓을 주고받더니 같이 푸하하 웃었다. 뭐냐, 니들? 나를 놀리는 거야? 그러니까 방이 있다는 거야? 이것들이 그냥 확, 그럼 예뻐해 줘야지! 나는 손으로 앵그리 버드 눈을 치켜뜨고 “방 줘!”라고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웃으며 무섭다고 징징징 우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일단 밥 먹고 와. 지금 시기에는 침대가 많아. 풀로 찰리가 없으니 염려 마!”

“고마워! 아찌!”

“천만에!”


나중에 부킹 앱으로 확인하자, 실제 호텔방은 정말 멋진 내부를 자랑하고 값도 비쌌다. 이런 호텔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다. 순례자를 위한 배려가 넘치는 나라다.






마법의 공간


메디가 아까 나온 문으로 다시 들어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문 밖으로 나가자 바로 뜰이 나왔고, 잔디밭 위에 놓인 디딤돌을 밟고 가니 카페 문이 나왔다. 별도의 공간! 이건 마법의 성, 신비의 판타지 문으로 연결된 곳이다.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카페 문을 열자, 유럽풍의 천장 높은 카페가 펼쳐졌다. 문 하나를 두고 이런 다른 풍경이 펼쳐지다니! 이건 판타지 세계다.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간 테이블에 이미 사람들로 꽉 찼다. 안쪽 주문대는 이미 마비 상태!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쏟아져왔단 말인가. 오늘 나는 조금 걸었기에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니다. 이 사람들을 중간에라도 봤어야 했는데, 안 보였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쓸쓸한 길이었는데, 안은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따뜻했다.

 

메디는 이미 오다가 만난 중년의 사람들과 함께 테이블을 쓰며 점심까지 주문했다. 괜히 혼자 메디가 길에서 헤맬 거라고 생각하고 초조했구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스마트폰이 있는데! 차마고도에서 만난 중국 친구가 얼마 전 한국말을 배웠다며 내게 녹음 메시지를 보내왔다. 뜻은 '너무 걱정하지 마' 였는데, 발음은 요상스러운, 거우쫑도 파알좌야, 였다. 뭐지, 뭐지, 유추하다가 모르겠다고 하니, 표기를 보내왔다. 걱정도 팔자야. 그래, 딱 맞는 말이다. 누가 가르쳐준 말인지! 테이블에 이제 막 식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메디는 오다가 만난 사람들을 나를 소개해주었고, 그들도 나를 반겼다. 메디의 일행인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비를 맞고 걸어서인지, 감정이 가라앉아서인지, 기력이 쇠해졌다. 세미와 솔은 좋겠다. 버스 타고 가서 좋은 도시에서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맛난 것을 먹겠지? 그나저나 나는 부르고스에 언제 도착하냐? 공립 6유로인데 론세스보다 좋다니! 사진으로 보니 호텔 로비 못지않았다. 기대가 됐다.








내 차지


메디는 점심을 제대로 먹고 싶어서 스파게티를 주문했단다. 나는 입맛도 없어서 빵과 커피로 허기를 가신 뒤고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녀가 함께 앉아서 스파게티를 먹자고 했지만, 간단히 커피를 마실 자리에 앉기로 했다. 중년 부인들도 내게 같이 앉아서 얘기하자고 했지만, 웃으며 거절했다. 먹는 메뉴도 다르고, 지금은 너무 지쳐서 수다를 떨 마음도 없다. 한쪽 테이블에서 조용히 앉아서 메디가 식사를 끝낼 즈음, 함께 프런트로 가기로 했다.


“정했어요? 난 그냥 2층 침대방에서 자고 싶어요. 수는요?”

마음은 단층 침대인데, 입으로 2층 침대라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와우! 신난다.”

그녀가 기뻐했다. 뭐냐, 이 환희의 표정, 나를 달래주려고 그러는 거야? 정말 좋아라 하니 좋다. 그런데 내가 왜 자꾸 상대를 맞춰주고만 있지? 처음에는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나 자신이 자존감이 바닥인 듯하다. 아까 먹기 싫은 빵을 건넨 청년들 뭐라 할 것도 없다. 싫다고 했으면 머쓱해도 가져갔을 것이다. 지금 단층 침대방을 원하면서도 왜 타인에게 맞춰 가는 게야? 메디처럼 배고프면 밥을 먹으며 기다릴 수도 있고, 지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면 되는데! 숨겨왔던 마음의 고장이 드러나나? 예전에 마음공부할 때 타인에게 맞춰 살지 말라고 하더니만, 주체적인 모습이 사라져 간다는 건 마음 밭이 약해졌다는 말이다.   

“수에게 강요할 수 없었어요. 나는 수와 같은 방을 쓰고 싶었어요.”


결국 2유로만 더 주면 편하게 지낼 단층 침대 방을 두고 2층 침대 방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곳 알베르게는 어디든 깨끗했다. 관리자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데, 공유 공간 소파에 철제 벽난로도 있었다. 아늑하고 예쁜 공유 공간이다. 물론 호텔과는 분리된 곳이다. 단층이 쭉 놓인 방은 더 여유 있고 아늑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감았다. 2층 침대방도 좋았다. 창도 환했고, 각 침대마다 배낭 넣는 사물함도 있고 널찍한 공간이라 가운데서 모여서 수다를 떨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것이다.

“와우 좋다.”

“그죠? 여기 정말 좋아요.”

메디와 나는 기쁨을 담은 컷을 연출했다. 방 여기저기를 배경 삼아 모델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우! 마릴린 먼로처럼 멋지게 우~~~!"

개그프로에서 본 모델 포즈! 메디도 한껏 개구쟁이처럼 포즈를 취하고, 나 역시 못지않게 짝을 이루었다.

"하하하! 사진이 참 멋지다."

이때부터 온화하고 자애로운 메디가 살짝 나사가 풀려 거의 춤추듯 신나 하는 모습을 봤다. 뭐지?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왜 빙구가 되지? 아직 사람이 없다시피 해서 놀이터처럼 여기저기를 구경 다니며 놀았다. 그런데 구석에 우리보다 먼저 온 미국 남자애가 있었다. 20대 초반이라는데 정말 싹싹하고 귀여웠다. 또 다른 20대 여인 등장! 악셀이라는데, 운동을 잘하는 서글서글한 여인이었다. 이름을 까먹어서 액설, 우웅~! 했더니, 다들 웃었다. 그녀도 오, 새로운데? 하는 표정이었다. 거기서 그런 발음을 쓰지 않으니 매치가 안 되었을 테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만 2층 침대 방으로 오는 듯했다. 내 또래는 단층 침대방으로 갔다. 역시 몸이 알아. 나도 단층 방으로 갔어야 했다.


오, 나보다 나이를 먹은 여인들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반가운 미소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내게 물었다.

"혹시 접착제 있어요?"

"접착제요?"

"안경다리가 부러졌어요. 접착제로 붙여야 할 것 같은데!"

"아, 없는데, 어쩌죠? 카운터에 가서 물어보면 어떨까요?"

"괜찮아요. 테이프로 대충 감고 부르고스에 가서 수리해야겠어요."

"아, 네!"

"혹시 테이프 있어요?"

"아, 테이프? 밴드는 있어요."

"아, 그건 저희도 있어요. 고마워요!"


내가 뭘 팔러 왔다고 생각하나? 접착제부터 테이프까지 내게 찾는다. 안경 썼으니, 그 정도는 있겠지 하고 물어본 것인지, 웃음이 났다. 그녀들은 비에 흠뻑 젖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거세졌는지, 모든 게 흠뻑 젖어있다. 곧이어 나이 먹은 아저씨 하나가 또 들어왔다. 나이 먹어도 2유로 아끼려고 온 사람들이 있는 거야? 아니면 이즈음 되니, 단층 방이 마감되어서 온 거야? 사람들이 모이자 더 아늑해졌다. 많은 수는 아니어서 모두 1층 침대에 머물 수 있었다. 곧이어 독일 기자라는 젊은 여인도 왔다. 이제 1층 침대 자리가 하나만 남았다.


모두 자리를 맡아두고 거실 같은 소파 벽난로로 갔다. 단층 방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는 공간, 안쪽으로 작은 부엌도 있고, 더 안으로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도 있다. 여기에서 보면 호텔 로비가 훤히 보인다. 그러니까 호텔 로비에서 올려다보면 알베르게 빨래들이 보이니까 잘 널어야 했다. 속옷은 좀 안 보이게 수건으로 가리는 센스!  





슈퍼 가는 길


우리가 일찍 도착한 덕에 사람들에게 숙소를 안내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나중에는 안내인들이 우리에게 안내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방 분위기가 좋았다. 메디도 나도, 사람을 좋아하니 그럴 수밖에!


미국 남자애랑 악셀이라는 여인은 순둥이들이라 그런지, 메디와 나랑 많은 얘기를 하며 어울렸다. 사방으로 떨어져 창가 쪽 1층 침대는 택했지만 메디의 친화력으로 함께 슈퍼에 가기로 했다. 모두 20대인데 내가 쫓아다닐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슈퍼까지는 괜찮지 않나? 나도 살 게 있다는데! 창문 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이들은 비옷을 안 입겠단다. 나도 적당히 고어텍스 옷만 챙겨 입었다. 젊은이들과 함께 하려니 조금 강해져야지! 이런 비 정도는 음? 그렇지? 그런데 춥네?


좁고 한가로운 도로인데, 트럭이나 자동차 할 것 없이 쌩쌩 지나다닌다. 길 건너 슈퍼 가는 길, 조심해야 했다. 아까 배낭 때문에 못 들어간 슈퍼에 드디어 들어간다. 안은 정말 아담한 동네 슈퍼였다. 그래도 원하는 것은 조금씩 갖춰져 있었다. 다들 저녁은 대충 먹겠단다. 부엌도 작고 비가 오니 귀찮단다. 재료를 사서 뭔가 근사한 걸 만들어 먹기도 싫은 거다. 진열된 메뉴도 한정적이다. 다들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음식을 택했다. 나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호텔에서 먹는 순례자 메뉴를 신청하기로 했다. 15 유로면 보통 10에서 12유로 순례자 메뉴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2유로 아낀 방값으로 먹기로 했다.


슈퍼에서 나오는데 비가 조금 굵어졌다. 그래도 이들은 비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는다. 소리까지 지르면서 신나 한다. 나는 고어텍스 모자를 뒤집어쓰고 냅다 뛰었다. 그러자 이들이 나를 쫒아오며 낄낄거린다.
 “하하하하!”

뭐가 즐거운지, 귀염둥이 녀석들이 모두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런데 호텔로 올라오는 언덕, 호텔 담 처마 밑에 누군가 앉아있다. 난 건성으로 지나가는데, 메디가 그 사람 앞에 멈췄다. 그녀는 천사의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메디의 물음에 그가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비에 젖은 모습,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다. 어? 사과 준 아저씨! 나는 얼른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전에 당신이 나한테 사과를 줬어요. 기억하세요?”

내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메디와 다른 친구들이 나를 바라봤다.

"아, 이 사람, 내가 알아. 나에게 사과를 건네줬던 고마운 사람이야."

이 말이 화근이 될 줄이야! 메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걸까? 그러자 그가 뜻밖에도 이런 말을 건넸다.

“나는 지금 묵을 방이 필요해요.”

엥? 나는 이 와중에도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방이 풀로 찼나? 공립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왔구나! 비가 와서 사람들이 12킬로를 더 안 가고 이 마을에서 멈췄나 보다. 여기가 꽉 차서 이 사람이 방을 찾다가 지쳤구나! 그런데 메디는 왜 이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보지?

“이곳에 묵으려는 거죠? 혹시 가보셨어요?”

“나는 돈이 없어요.”

음? 아하! 이 사람도 여기가 호텔이라고 생각해서 나처럼 겁을 먹었구나! 알고 보면 깜짝 놀랄 반전이 있는 가격인데! 하하하! 그런데 얘기는 그렇게 코미디로 흐르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위해 숙박비를 지불해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건 뭐지?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었나? 그냥 털털하게 배낭 대신 봉지를 들고 다니는 괴짜가 아니었어? 빵과 과자가 들어있던 봉지, 산타 바구니 같던 그 봉지는 낭만 바구니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슬픈 눈물 보따리였어? 그제야 나는 그가 노숙자였고, 그 봉지는 사람들에게 적선 받은 물건들을 담은 보따리였다는 걸 알았다. 그런 소중한 음식을 내게 건넸던 거였다. 슈퍼에서 산 멀쩡한 사과를!


나는 충격에 얼어 있었다. 메디는 그가 노숙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나처럼 길 중간에서 그를 만났던 것일까? 그런데 나는 어떻게 된 게 그가 전혀 허름하고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고, 히피의 자유로움, 초연한 순례자로만 본 거지? 아, 난 등신이다. 그런 그가 건넨 사과에 감사하기만 했다. 적정한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나? 하지만 그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마을 중간에서 내게 말하려던 것도 아마 자기의 이런 상황들이었을까? 내 순진무구한 '감사합니다' 타령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그저 천사로 남기로 하고 길을 떠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메디에게 저런 면이 있을 줄이야. 남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그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를 발견할  있었던 것도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메디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람, 배경이고 담이 존재를 그녀는 알아낸 것이다.

  




천사를 위해


아까처럼 신나게 뛰고 소리 지르던 친구들은 모두 진지해졌다. 메디는 그를 데리고 호텔 프런트로 갔다. 프런트에 상황을 이야기하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순례자 여권이 없으면 들어올  없다는 것이다. 메디와 우린 모두 어쩌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노숙자는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 정보가 없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때 사과 아저씨가 조용히 답했다.

“나, 순례자 여권 있어요.”

그가 또 다른 봉지에서 비닐팩을 꺼냈다. 순례자 여권! 모두 “예스!”하며 반갑게 그의 순례자 여권을 꺼내 들었다. 비행기를 타려다가 여권을 분실한 이가 짐을 뒤지다가 찾은 것 처럼 모두 기뻐했다. 메디는 자기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프런트에 얘기하는 중이었다. 2유로 아끼겠다고 2층 침대방을 선택한 그녀가 남을 위해 기꺼이 방값을 지불하겠단다. 이번에는 호주 여인의 당당하고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섰다.

“메디, 전에 내가 이분께 사과를 받았어. 감사의 뜻으로 오늘 방값은 내가 치를게.”

“수! 오늘은 내가 이 분을 위해 방값을 내고 싶어요. 그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 반반씩 낼까?”

“그것도 좋지만, 내가 다 내고 싶어요.”

이럴 때 보니 메디가 단호했다. 한국처럼 내가 내자 네가 내라로 싸울 틈이 없었다. 메디가 선행을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도 받아들여야 했다. 애초에 메디의 발견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기에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다. 이제 그의 사정을 알았으니, 사과의 기쁨 처럼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동전을 긁으니 7유로 정도 나왔다. 더 많은 돈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이다. 나는 사과 아저씨의 손에 살짝 동전들을 쥐어줬다.

“내일 아침에,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랑 빵 사드세요. 이것밖에 해드릴 게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는 정말 고마워했다. 사실 과자니 치즈니,  같은  그의 봉지에 많이 있다는  알았기에 따뜻한 커피를 카페에서 당당히 마실  있기를 바랐다.





어떤 사이


사과 아저씨에게 침대를 배정하고 안내하겠다는 직원에게 우리가 직접 하겠노라고 하자 좋아했다. 깨끗한 호텔에 그를 들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2층 계단을 올라가는 수고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사과 아저씨는 구치소에라도 들어오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우리를 따라왔다.


“여기에 등산화랑 스틱 두는 곳! 아, 스틱 없으면 통과!”

“여기는 화장실, 여기는 샤워실!”

“여기는 부엌! 이쪽에 난로에서 쉬면 되고, 저기는 단층 침대 방들이라 우리랑 상관없고요.”

“여기가 우리의 2층 침대방입니다. 당신은 저기 남은 침대를 쓰세요. 다행히 1층이 남아있네요. 사물함에 물건 넣어두시면 됩니다.”

그가 부끄럽게 웃었다.


숙소 방에 사람들이 제법 찼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들은 짐만 정리한 채 침대에 퍼져 . 힘든  나도 알지! 다른  으면 도착하자마자 샤워들을 할 탠, 오늘은 추워서 그런지 다들 씻기 귀찮아 하며 미루고 있다.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는 씻을 것이다. 나도 이제야 샤워실로 들어간다. 제법 추워진 날씨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독일에서 온 여인이 메디와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 기자라는데 나와 같은 순례자 메뉴를 예약한 사람이란다. 호텔에 왔으니, 호텔 순례자 메뉴를 기대해본다는 게 나랑 생각이 같다. 적어도 호텔 내부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다니, 뭔가 근사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 그런데 그때 사과 아저씨가 샤워를 마치고 예쁜 꼬까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본 고갈 모자에 입는 그런 잠옷이었다. 정말 반전이었다. 저 봉지에 저런 깜찍한 잠옷이 들어있었다고? 잠옷이 그냥 일상복의 잠옷이 아니라 정말 단추 달리고 고깔모자 쓰면 될 것 같은 잠옷이었다. 그것도 깨끗한 옷이었다. 우리는 모두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침대방에서 많은 얘기들을 하지 않기에 그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길을 의식한 듯 얌전히 침대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반응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때, 독일 기자가 우리를 복도로 데리고 가서 속삭이듯 말했다.

“왜 저 사람을 숙소로 데려왔어요?”

메디가 말했다.

“수가 아는 사람이에요.”

독일 기자 표정이 일그러지며 나를 바라봤다.

“당신과는 어떤 사이?”

“길에서 만난 사이! 내게 사과를 준 사람! 왜? 뭐가 문제인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내 표정은 '네가 뭔데 사람을 데려왔냐 마냐 묻는 거냐'였다. 독일 기자는 숙소에 이상한 사람들이 머물면 도난이 걱정이라며 말을 흐렸다.


이 지역이 도둑에 대한 경계가 오늘날까지 심한가? 메디는 독일 기자에게 수가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엥? 그게 무슨 말이지? 사실 메디는 독일 기자의 반응에 살짝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자기가 애써 돈까지 내고 데려왔지만 그가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은 마음! 메디가 독일 기자에게 변명처럼 말하다가, 어쨌든 수가 아는 사람이라 데려왔고, 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걱정 말아라 하는 얘기 같은데, 졸지에 내가 그를 안다는 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는 보증이 되었다. 얘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간 것이다. 아니, 막말로 그가 도둑질하면 내 책임이란 말인데? 난 일단 그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걱정되면 각자 소지품 관리나 잘 해. 나도 그를 길에서 봤는데 어떻게 보증하니?”

정말 그랬다. 괜한 오지랖으로 걱정을 떠안은 것이다. 행여 그가 밤새 도둑질이라도 한다면? 제발 메디의 선행이 선행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조용히 침대방을 들여다보니 사과 아저씨는 얌전히 자고 있었다. 오래도록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비를 맞아서 춥다고도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잠을 잘 것이다. 모두 잘 때 그도 잘 것이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탐할 거라는 생각을 하다니! 나는 그가 건넨 사과에, 그의 마음이 담겼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강도가 아닐까 잠시 의심한 순간도 있지만, 절대 밤새 남의 물건을 훔칠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왜 불안하지? 그가 강도일지 모른다는 그때의 불안처럼, 뭔가 이상한 느낌으로 그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전설 때문인가?


도둑들이 들끓었던 이곳, 중세 순례길에서 제일 위험한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그런 기운들이 모인 것인가? 나 정말 샤먼이 되는 거야? 전생에서라도 그는 절대 누군가를 죽이고 물건을 빼앗을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돌팔매에 죽임을 당하는 자가 아녔을까?


사실 순례길에서는 어디에서든 조심해야 한다. 숙소든 어디든 도둑이 있다. 경찰까지 와서 수색을 해도 잃어버린 물건은 찾을 수 없다. 제발 어디서든 그 사람이 도둑이 되는 일은 없기를! 사과를 준 천사가 도둑이 된다면 너무 슬프지 않겠나. 그는 지금 지친 영혼으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더없이 좋은



벽난로가 따뜻하다. 다들 볕 쪼이듯 그 앞에서 불멍 중이다. 언제 이리 사람들이 왔는지, 낮에 카페에서 점심 먹고 12킬로를 더 가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많은 수가 단층 방에서 자고 가는가 싶었다. 대충 내 또래부터 노년들이다. 모처럼 호텔 내부 알베르게 단층 침대에서 잘 수 있다니 좋겠지! 불명 중에도 나는 단층 방을 바라봤다. 부럽다.


비 오는 날, 큰 창이 있는 벽난로 앞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책을 본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조건은 갖춰졌는데, 책이 없다. 책을 가져올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전자책으로라도 가져와서 볼까 싶었는데, 아이패트 미니도 무겁다. 걸어보니, 안 가져오길 잘했다. 아예 버렸을지 모른다. 책을 읽고 싶긴 하지만, 책 읽을 틈 없이 바쁘고 피곤한 하루를 온전히 쓰는 것도 좋다. 책이야 나중에 읽으면 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정말 이 순간뿐이다. 가다가 어느 정도 체력이 붙고, 배낭이 가벼워지면 누군가 살포시 버린 책을 건질 수 있을까? 오다가 한글 가이드 북이니 어린 왕자 책이니 주웠다가 다시 가져다 놨다. 자기 계발서도 한 번 발견되었으나 못 본 척 지나왔다.


난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저녁식사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이게 누구야? 로스 알코스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어머! 세상에! 여기서 또 만나네요? 반가워요.”

“어이고! 또 만나네요. 우리 엄청 천천히 가는 중이었는데! 하하하!”

세미의 안부도 묻고 그간 거쳐왔던 길도 얘기하며 수다를 떨었다. 약속하지 않은 만남, 만날 사람은 다 만난다더니! 뜻밖에 한국말을 할 수 있는 또래를 만나서 그런지, 반가웠다. 메디도 신나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들과 인사도 나눴다. 그들은 별도의 2인실에 머문다고 했다. 어디에 그런 방이 있나 싶었더니, 벽난로 바로 앞에 작은 문이 그들 방이란다. 일찍 도착해서 점심을 잘 먹어서 저녁은 간단히 먹을 거란다. 그들에게 쉬라고 하고, 나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나는 그를 몰라


예전 한국에서 칼질 좀 하러 다니던 레스토랑을 닮은 분위기! 그런데 한 테이블만 달랑 세팅이 되어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밥을 먹지? 그 카페에서 저녁식사 겸 술을 하나? 잠시 후 투어팀 한 팀이 왔지만 그걸로 모든 예약 인원은 끝이었다.


순례자 코스는 미리 예약된 네 사람뿐이었다. 독일 기자, 영국 작가, 독일 아저씨가 나와 함께 자리했다. 어느새 얘기가 사랑 얘기로 흘렀다. 독일 기자와 영국 작가는 미리부터 감정선이 있었던 듯 치열하게 사랑 얘기를 했다. 둘이 이상 야릇하다. 니들 속마음을 왜 돌려서 얘기하냐 싶었다. 남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감정선이 왜 캐치가 되냐? 나이 먹으면 샤먼의 기운이 커지나 보다. 나와 60대 독일 아저씨가 가끔 추임새처럼 대꾸하는 정도, 얘기는 그들 중심으로 흘렀다. 나는 일단 먹는데 집중했다. 자기들끼리 감성선에 빠지다가 문득 정신 차리고 간간히 던지는 질문에 답만 하면 된다. 그런데 사랑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려서 누군가를 말하는데, 괜히 내 눈치를 본다. 누군가 흉을 보는 분위기이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눈짓하는 게 남들 괴롭히는 악당급이다.


나 모르게, 누군가를 말하는데, 우물 거리며 먹고 있는 나를 힐끔 본다. 왜 내 눈치를 보는 거야?

"누구를 말하고 있니?"

내가 대놓고 물었다. 그러자 영국 작가가 그 특유의 매너남 모드 표정으로 뭔가 설명하려는데, 독일 기자가 툭 치며 눈짓으로 주의를 줬다.

“이 사람이 그 사람 지인이래요.”

화들짝! 영국 작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뭔 소리야? 내 지인이 누구야? 메디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분명히 이상한 남자 얘기였는데? 돈 없이 순례하는 사람들 얘기였다.


내 지인이라니? 그제야 전율이 느껴진다. 나는 포크를 접시에 올려놓았다. 감 잡았다. 사과 아저씨 얘기다.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아까 숙소에서 메디와 나랑 들어왔던 남자 얘기니?”

독일 기자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가 그랬잖아. 그 남자가 당신이랑 아는 사람이라고!”

아, 그래, 메디가 그렇게 말했지! 생각해보니, 내가 메디에게 말했다. 사과 준 남자를 내가 안다고! 메디는 내 입장을 고려해서 그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건가? 나는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다.

“내 지인이 아니야. 나도 오다가 알게 된 사람이야. 그가 내게 사과를 건넸다고! 나는 그가 누군지 몰라. 그냥 고마웠을 뿐이라고! 나는 그가 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메디가 그에게 선행을 베풀 때 나도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그들은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알베르게에 머물게 해서는 안 돼. 그건 위험한 일이야. 도난 문제도 생길 수 있고! 알베르게에서 그를 꺼리는 이유가 있는 거야!”

아, 화가 났다.

“그는 그럴 사람 같지 않아. 그리고 그가 지금 공짜로 묵는 게 아니잖아. 누구 돈이든 엄연히 돈을 내고 들어왔어.”

그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왜 화를 내고 있지? 그의 지인이라 그렇다고 생각하겠군!


그들이 사람을 은근한 무시하는 저 눈빛이 싫었다. 사람을 이간질하며 괴롭히는 문제아들 눈빛!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나를 앞에 두고 빙빙 돌려 그를 비아냥 거린 것이 괘씸했다. 흔히 순례길에서 위험은 있다. 강도든 도둑이든 조심해야 했다. 우리 알베르게에 노숙자가 묵어서 걱정할 수는 있다. 사과 아저씨가 내 지인이라 생각하고 그에 대한 소문을 전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속삭이듯이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통에 옆에 앉은 독일 아저씨와 나는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서로 질문에만 간단히 답하고 대화 분위기가 비매너였다. 이럴 거면 뭐하러 합석하자고 했을까?


나는 계속 이상한 소문을 퍼뜨릴 것 같은 이들에게 강하게 쐐기를 박았다.

“나는 그 아저씨를 몰라.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냥 나에게 사과를 준 친절만 기억해. 하지만 내 지인은 아니야!”

나는 마지막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사과 아저씨를 부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초라한 이들에게 해준 것이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했는데, 초라한 이를 결국 부인했다. 이건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가 되어버린 꼴이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청년이 자기보다 더 뒤에 오는 남자가 있다고 한 게 사과 아저씨으니, 요한이 말한 예수님이겠군! 프랑스 청년은 요한이고, 사과 아저씨는 예수, 나는 예수를 부인한 제자 베드로!


베드로! 베드로는 이런 기분이었군! 나는 갑자기 울고 싶어 졌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 차려! 후식까지 먹고 가야지!


식사가 맛있는지 모르고 해치웠다. 이런 분위기가 웃겼다. 이 영국 남자는 정말 별로 였다. 그러고 보니 순례길에서 내가 알게 된 영국 남자들이 다 별로네! 독일 애들도 별로였다. 세상을 휘둘러본 마인드 때문인지, 세상을 좀 깔보는 면이 있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이다. 내가 만난 세상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들아! 반성 좀 하고, 세상을 품듯이 좀 친절해라. 그런 면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세상을 제패한 과거에 비해 친절하다. 좀 배워라!


독일 기자는 내 눈치를 보면서 남을 흉보고 이간질하는 눈빛이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국 남자도 은근히 인종차별주의자 같았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밥 먹으면서 쓰잘 떼기 없는 얘기를 경청하는 게 피곤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독일 아저씨가 가끔 나랑 말을 했지만 그도 역시 나중에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에 동조했다. 나는 먼저 일어서겠다고 했다. 어차피 와인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뒀다. 볼이 익어 서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독일 아저씨도 허수아비인데, 두 팔 벌려 그들을 지키고 싶은지 계속 그 자리다.




당신의 행복
저녁을 먹고 돌아왔을  사람들은 일찌감치 잠이 어 있었다. 날이 으스스 추워서 따뜻한 온기가 퍼진 방에서 스르르 잠든  같다.  꺼진 , 조심스레 휴대폰을 충전하고 화장실로 갔다. 행여나 분실을 막기 위해 휴대폰을 은폐했다. 사과 아저씨는 잠들어 있는데, 말과 다르게 단단히 살피는 나는 뭐지? 그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원래 조심하는 거라고 나를 달랜다.


영국 남자와 독일 기자가 어느새 올라와 취한 몸을 이끌고 좁은 부엌으로 향했다. 술을 더 마시려나 보다 싶었다. 침대에 아까 먹으려다가 말았던 요플레가 있기에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문을 열자 그들이 화들짝 놀란다. 거의 키스할 분위기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아, 이런 부엌에서 그럴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분위기 좋은 벽난로가 있는데, 왜 여기서 그래?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게 타고 있는 벽난로! 아, 밖에 청년 하나가 음악을 듣고 있더니만! 나는 냉장고에 요플레를 넣어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문을 닫으며 말했다.

“하던 거 마저 해!”


그들이 얼굴이 벌게지며 손사래를 쳤다. 당황해서 웃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자 자기들끼리 좋아라 웃는다. 아직 밀당 중이군! 아까  먹을   흉보는 것보다 니들끼리 사랑하는  낫다.


나는 불 꺼진 소파 벽난로에 잠시 앉았다. 난롯불만 비치는 그곳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고 있는 청년! 잠시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조용히 앉았다.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을 나도 짐작하며 듣는다. 이번 순례길에서 나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며 걸으면 지루하진 않지만, 그만큼 길을 놓치게 된다. 음악에 얽힌 괜한 추억으로 이 길을 메우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현재에 머물며 걷겠다는 의미? 사실 순례길에 적합한 음악을 찾지 못했다. 슬프고 장엄한 음악도 아니오, 신나고 즐거운 음악도 아니오, 인생 얘기, 사랑 얘기, 무엇을 들어야 이 길과 어울릴까. 없었다. 그저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움에 젖어드는 것도 좋지만, 진공 된 우주 속에서 아무 소리도 빛도 없는 그 태초의 나를 만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무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순례길 내내 배경이 될만한 음악 없이 숨결 하나하나를 느끼며 걸을 수 있었다.


따뜻하니 졸리다. 이제 들어가서 자야지. 벽난로 청년은 내가 곁에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뭐가 좋은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다. 지금은 유튜브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길을 걸으면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스쳐갈 뿐이다. 사실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어폰을 꽂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폰을 꽂으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풍경을 놓치기 쉽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지 마라. 나 조용히 빠져나간다. 조용히!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을 때 어둠 속, 모두가 얌전히 잠든 밤, 근심 걱정 모두 잠재운 밤, 사과 아저씨도 천사의 숨소리로 자고 있다. 미안해요, 사과 천사! 내가 당신을 모른다고 했어요. 졸지에 성경 속 인물이 되었어요. 오늘 내내 마음이 가라앉은 이유가 이거였나 봐요. 이제 나도 자야겠어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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