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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초순보기 Aug 05. 2024

여름방학 개학 준비물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학교를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은 조금 달랐다.



새벽 내내 울부짖는 매미의 노래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한여름이면 오전 5시만 되어도 밖이 밝아지는데, 매미 소리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집에서 20분 거리였지만, 초등학생인 내게는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먼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방학식이라 발걸음이 가벼워 일찍 도착했다.



오전 3교시가 끝나야 방학이 시작되었기에  수업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여행을 가거나 친척 집을 방문하지 않았지만, 왜 그리 방학이 기다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3교시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방학 숙제와 개학 준비물을 하나하나 집어 가며  말씀하셨다. 숙제는 이해가 되었지만, 잔디씨를 편지 봉투 가득 가져오라는 준비물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는 잔디씨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 이유를 물어봤다가는 미움을 살 것 같기도 하고, 방학 시작이 늦어질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방학이 시작이 되었다. 숙제는 교과서를 보고 어떻게 라도 하겠지만 잔디씨는 어디서 받아야 할지 집으로 오는 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25일간의 방학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숙제와 준비물 체크 리스트를 보면서 하나하나 지워 나가던 중,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잔디씨 생각이 떠올랐다.



" 엄마!! 엄마!!' 잔디씨!! 잔디씨"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호박을 자르던 어머니가 놀라 안방으로 달려왔다.


"잔디씨? 그걸 왜 찾아? " 

" 개학  준비물이라고 말하자, 어머니의 눈도 동그래졌다. 

"잔디씨를 어디에 쓰려고  방학 숙제로 내주셨을까? 

학교 운동장은 잘 다녀진 황토흙이라 필요 없을 텐데, 학교 어디에 잔디를 심으시려나?  " 의아하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잔디씨 어디 가야 구할 수 있어요?”


“아, 그거 산소에 가야 해. 그런데 남의 산소에 가서 훑어 올 수도 없고, 남이 보면 큰일 나. 더군다나 조상의 묘를 위한 잔디를…”


“산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내가 준비물을 준비하지 못해 우는 줄 알고, “그럼, 해가 어스름해지면 산소에 가서 씨를 받아 오자. 편지봉투 하나쯤이야 금방 받을 수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귀신이 나오는 산소에 어떻게 가, 어~~ 엉.”



"괜찮아, 엄마가 함께 가면 귀신도 안 나와."


"나온다고... 엄마 잡아가면 어떡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를 따라 산기슭에 있는 산소로 향했다. 어머니 뒤를 따라가면서도 자꾸 주변을 살폈다. 귀신이 나타날것만 같고, 누군가가 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산소는 산기슭에 있어서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산소 주변으로 잔디가 입혀져 있었고, 비석과 상석이 서 있었다.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치마를 펼치고 잔디씨를 굵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가 오지 않는지 계속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의 치마에 잔디씨가 쌓이길  바라며, 망을 보기 시작한 지  30여 분 만에 잔디씨는 수북해졌다. 어머니는 이만 하면 됐다며 준비해 간 비닐봉지에 쓸어 담았다.  


그 순간에도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질까 불안한 마음은 계속되었고,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여전히 도로가를 살폈다.


집으로 돌아와 잔디씨를 노란 편지 봉투에 담아 보니 가득 찼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날 밤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개학 날 아침, 나는 노란 봉투를 단단히 쥐고 학교로 향했다. 드디어 학교에 도착해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담임 선생님은 숙제보다 잔디씨부터 수거하셨다.



한 반에는 65명의 학생이 있었고, 각자 가져온 잔디씨가 교단 앞에 수북이 쌓였다. 아이들이 가져온 다양한 크기의 봉투들이 모여 거대한 잔디씨 더미를 만들었다. 그 장면을 보며, 우리 모두가 작은 봉투 하나씩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불안에 떨어야 했는지  생각하니 마음이 묘해졌다. 



잔디씨를 내고 나서야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잔디씨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 운동장을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새로 심어진 잔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잔디씨가 어디로 갔는지, 왜 우리에게 잔디씨를 준비하라고 했는지에 대한 답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오늘 방학숙제와 준비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방학을 계기로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시간과 휴식을 보내게 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 때는 (라테다 그야말로 ㅎㅎ) 예상치 못한 준비물로 인해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방학에 학원에 가야 하는 지금 보다는 황당한 준비물이 있었던 그 시절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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