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군입대 중
아이를 산골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읍내로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 꿈이 중요하다고 해도 아이를 놔두고 나간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을 했다.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했다. 동네의 어떤 아주머니가 엄마의 옷고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잡고 자고 있는 아이를 두고 도망가려고, 옷고름을 가위로 끊어 버리고 도망갔다고 이야기 해주시던 정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가 꼭 그 아줌마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있으면 엄마와 일주일간 헤어진다는 걸 모른채 아이는 마당에서 나무 작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가끔 바람이 불어와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을 지우고 달아났다. 아이는 울상을 하면서도 계속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다. 내가 나가면 아이에게 말을 가리키고, 놀아줄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는 또래 아이가 딱 한 명 있긴 했지만, 어머님이 20분 거리에 있는 또래의 집으로 마실을 갈 시간도 형편도 안되었다. 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니 젖이 모자라 제대로 먹이지 못한 게 걸렸다. 동네 또래 아이보다도 덩치도 작고 약했다. 그 아이와 비교해 보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런 아이를 두고 나가야 한다니 내가 참으로 모질기도 하군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아이와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며 흐트러지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나가는 첫날 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손을 흔들었다. 내가 잠시 나갔다 오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처음 출근하는 길을 아버님이 고개가 있는곳 까지 바래다주셨다. 재를 넘는 동안에도 여러 번 뒤를 돌아다보았다. 집에 남겨 둔 아이가 걱정이 되었고, 보고 싶었다. 남편이 군대 간 후 둘이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제 어쩌나 하는 마음에 직장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날 발령을 받아 맡은 업무는 민원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내 손에는 겨우 지침 하나만 들려 있는데, 민원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배정된 자리에 앉아 지침을 펼쳐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통 알 수 없는 행정용어들 뿐이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선배 동료들이 민원이 올 때마다 지침의 해당되는 부분을 펼쳐 보면서 배우는 것이 더 빠르다며 천천히 배우라고 했다.
처음 만난 동료들은 모두 친절했다. 신상 털기가 시작되었지만, 간단하게 현재 2살짜리 딸이 한 명 있고, 남편은 군입대 중이라고 했다. 여자 선배들은 고생이 많다며, 위로를 해 주었고, 슬기로운 직장생활은 이렇게 해야된다, 저렇게 해야 한다며 조언을 해주었지만 첫출근한 내가 귀담아 들을리 만무했다. 그렇게 하루 근무를 마치고, 방한칸에 부엌이 딸린 집으로 오니, 한숨이 나오며 그제서야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할머니랑 잘 지냈는지, 엄마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머릿속은 온통 아이 생각뿐이었다.
부엌에 나가보니 어머님이랑 장터를 돌며 마련한 밥공기와 국그릇 2개, 숟가락 2벌, 냄비 하나, 쌀 한말이 부엌에 놓여 있었다. 살림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살림이었다. 돈도 필요하다며 어머님은 14,000을 챙겨 주셨다.
살림을 나서 처음 혼자 맞는 저녁, 쓸쓸해 졌다. 밥이 먹힐것 같지도 않았다. 연탄불을 갈고 대충 씻고 자리에 누웠다.
11월의 밤은 추웠다. 방 안의 공기도 서늘해서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천장을 쳐다보니 아이가 보고 싶었다. 천장에는 아이의 웃는 얼굴이 떠 다녔다. 밤새 아이 생각만 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을 하였다. 직장생활은 순조로웠다. 민원이 많은 곳도 아니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일처럼 거들어 주고, 알려 주었었다. 출근해서 첫 주를 보내고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아이가 있는 산골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전에 같으면 혼자 산속을 걸을 때 무서웠을텐데, 빨리 아이를 봐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무서운지도 모르고 뛰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마루에 앉아 놀던 아이가 반기며, 몸을 뒤로 돌려 다리부터 땅에 닿게 하여 마당으로 내려오더니 달려 나왔다. 뒤뚱뒤뚱 걷는 아이가 넘어질까 봐 달려가 아이를 앉아 올렸다.
안 본 1주일 사이에 아이가 많이 큰 것 같았다. 산골의 아이답게 얼굴과 옷이 흙투성이로 꼬질꼬질하였다. 어머님이 일주일 동안 아이의 행적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아이가 대견하였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까지 아이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둘이 지냈다. 한편 일요일 오후가 되면 또 출근을 하기 위해 아이와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주에는 도저히 아이와 헤어질 수 없어 자는 동안 집을 나왔다.
직장생활은 점점 익숙해져 갔지만, 아이 걱정에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다. 3번째 주말부터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여 애를 먹었다. 아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에는 동네 어린이집을 찾아 가 보기로 하였다. 동네에는 어린이 집이 딱 한곳 뿐이었다. 어린이집은 자취집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곳으로 차량 탑승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너무 어려 받아 주기 어렵다고 하였다(당시에는 어린이집에 영아반이 없었다).
뒷날 퇴근 후 어린이집을 다시 방문하여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출타 중인 원장님이 오시려면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원장님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무작정 어린이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현관 유리문을 통해 어린이집 안을 들여다보면서 몇차례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나이 지긋한 원장 선생님이 나오시며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다.
지금의 내 상황을 말씀드렸다. 현재 원아는 정원이 차서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꼭 아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다시 한번 검토해 달라며 부탁을 드렸다.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지셨던, 원장님께서 본인이 아이를 맡아 준다며 일단 데려오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우신 분이시다). 아이랑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어찌나 기쁜지 그날 밤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빨리 주말이 오길 기다렸다.
주말이 되어 집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시부모님에게 다음 주부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둘이 같이 있겠다고 말씀드렸다. 시부모님은 못내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아이는 엄마랑 함께 있어야 한다며, 어머님은 잘 생각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 밤은 아이랑 모두 한방에서 잠을 잤다. 설레여 잠을 뒤척이던 나와는 반대로, 어머님은 서운해서 잠을 못 이루고 계시는 것 같았다. 아이가 나가면 산골에 두 분만 남으시기 때문에 집안에 활기도 없어지고, 더욱 적적해 지시겠지...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요일 오후 나를 따라 집을 나가는 아이를 어머님이 마을 끝까지 업어다 주신다면 아이를 업었다. 아이는 등 뒤에서 자지러지듯 울면서 어머님을 밀어냈다. 늘 어머님 등에만 업히면 내가 떠났기 때문에 업히지 않으려고 했다. 어머님이 너도 이번에 엄마 따라 가는 거라며, 할머니가 업어다 주려고 한다고 이야기해도 막무가내로 울며 어머니 등을 떠밀었다.
아이와 떨어진 지 3개월 만에 우린 같이 지내게 되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자취집으로 오는 내내 낼부터는 어린이집에 가야 엄마하고 같이 살 수 있다며 몇 번이고 이야기해주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있다는 말에 “응” “ 응” 대답을 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집 앞에 어린이 집 차량이 도착했다. 아이에게 저녁에 만나자며, 잘 놀다 오라 하였더니, 처음 보는 선생님을 따라 손인사를 하며 차량에 탑승했다. 아이가 얼마나 엄마하고 있고 싶었으면, 처음 보는 선생님을 따라 씩씩하게 차량에 탑승할까 생각하니 안쓰러워 , 차량이 마을 어귀를 벗어나도록 그 자리에서 지켜 보았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집을 잘 다녔다. 언니들을 따라 1박 2일 연수도 다녀오기도 하였다. 참 대견하고 소중한 딸이었다.(내가 살면서 힘들 때, 심지어 죽고 싶을 때도 아이가 첫날 어린이집을 가던 모습이 떠올라 씩씩하게 용기를 내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