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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r 01. 2020

시간에 헐린 기억 - 2

늦은 반성과 의미없는 기억





Y는 고개를 숙이고 쓰레기들을 집어넣고 있는 D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나 D의 뒷모습은 짠해 보여서 보고 싶었고, 어느 날은 Y를 서운하게 했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D가 고개를 들었고 Y와 눈이 마주쳤다. 전혀 예상 못한 듯 당황한 D의 표정에 Y는 살짝 웃음이 났다. “오랜만이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말 걸기가 좀 그랬어. 봉투랑 싸우는 줄.” D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무표정과 웃음의 경계 사이에 있는 얼굴로 Y 앞에 섰다. Y는 순간 D가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 초조해져 저녁은 먹었냐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제야 D는 대답했다. D와 헤어지고 바랐던 건 편하고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그 흔하고 평범한 데이트를 너무 자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몰랐다. D는 외투를 가지러 들어가고 Y는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D의 집은 그대로일까 궁금했다. 예전 같았으면 문 앞에 서 있지 않고 D의 집으로 들어갔을 텐데. 그랬다면 밖에 나가자, 나가지 말자 싸웠겠지 굳이 이런 재회 장면에는 필요 없는 생각이 끼어들어 씁쓸한 웃음이 났다. Y는 늘 자주 왔지만 한 번도 서 있어 본 적 없던 D의 집 앞에 서서 괜히 테이프로 감겨 있는 쓰레기봉투를 발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너무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이 필요한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뭐 먹을래?” D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장게장?” D에게 미안한 장면은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끼어들었다. D가 못 먹는 음식이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 그걸 기억하지 못해서 자주 서운하게 했었다. 정작 이제는 기억할 필요도 없는데 자주 먹는 음식도 아닌데 간장만 봐도, 게만 봐도 D가 못 먹는 간장게장 생각이 났다. 잊으려 하진 않았지만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늘 남아있는 쓸데없는 기억. D에게 기억한다고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괜히 장난처럼 싱거운 말만 늘어놓게 됐다. “뭐? 나 간장게장 못 먹... 어.” “알지. 장난친 거야. 다 기억하고 있어.” “참 나. 그럼 뭐 먹을래?” “그냥 걸어보자. 걷다가 보이는데 가자.” Y가 D의 소소한 습관이나 취향을 기억 못 할 때마다 D는 “간장게장 못 먹는다고! 우리 집은 어딘지 기억나?” Y의 귓가에 살짝 크게 속삭이고 볼을 살짝 깨물고는 히히하고 웃었다. 너무도 사소한 장면이었는데 헤어지고 가끔 꿈에 D가 나오면 항상 그 장면이 나오곤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멀찍이 떨어져 걷는 D를 보며 그런 D는 Y의 머릿속에만 사는 너무도 낡아버린 기억임을 깨달았다. Y는 예전에 자주 가던 고깃집을 가보고 싶었지만 D는 Y와 엮인 기억이 없는 식당으로 가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떤 문제들은 정작 그 상황 안에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정확한 원인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이직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D가 없는 시간 틈을 메우려고, 또 D가 생각나지 않을 만한 환경으로 옮기려 애를 쓰다 보니 흔히 말하는 워라밸이 좋은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D를 잊으려 발버둥 친 결과가 D와 보낸 시간들을 더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때 D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D의 탓을 하기 전에 지금의 회사로 이직했다면 D와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싸움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너무 늦게 하게 됐다. 그 깨달음은 당연한 순서로 싸운 순간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떻게 지내? 회사는 그대로 다니고?” 음식이 나오자 Y가 물었다. “응. 그렇지 뭐. 너도?” “아. 난 이직했어.” Y는 D가 그 이직한 회사는 어떤지, 그때에 비해 바쁘지 않은지 그런 것들을 물어봐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면 Y는 여태껏 반성했던 시간들을 말하며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D는 잠시 멈칫하고는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Y는 아까부터 D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Y가 바라는 D의 반응은 오로지 과거의 D만을 가지고 상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그 안에서 Y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했었다. 막상 지금 D의 앞에서 그 반성인지 추억인지 모를 말들을 꺼내려고 하니 그 말은 과거의 D에게나 해야 할 얘기였다. 지금의 D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또 한 발 늦게 깨닫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묻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 없음에도 Y는 수도 없이 생각했던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때 미안했어...... 내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우리가 편안하게 보낼 시간을 많이 못 냈던 것 같아. 요새...... 그 생각을 정말 자주해.” Y의 말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사이 D는 살짝 웃었다가 찡그렸다가 허공을 봤다가 다시 Y를 보고 또 피식 웃었다. “그런 걸로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서운했던 건 헤어질 때 네가 했던 싸가지 없는 말 때문이거든.” “그건 - ” “알아. 나도 뭐 똑같았으니까. 괜찮아. 나도 똑같이 생각했어. 미안하더라고. 내가 너무 너를 이해 못해주고 그러면서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어렵게 꺼낸 Y의 사과에 D는 너무도 쉽게 당연한 듯 지난 일처럼 말을 이었고 그래서 Y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D가 무슨 말을 하길 바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D는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고 그 얘기는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로 이어졌다. Y는 D와 빨리 결혼하고 싶었고 그러면 더 이상 싸우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일에 집착했던 것 같다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말하기엔 그 또한 부질없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모든 말들을 생략하고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했다. D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너는 잘 살 거야. 나는 이런 성질머리로는 틀렸어.” 아니라고 그때 내가 잘 못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D가 자신의 사과에 부담을 느낀 것 같아 Y는 농담으로 그 말을 넘겼다. 그러고 나니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고 커피 마시러 가자는 말도 부담스러워할까 싶어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이상한 억양으로 말했다. “근처에 괜찮은 카페 없나아?” “나 요새 카페 잘 안 가서 몰라.” “밥 먹었으면 커피 마셔야지.” 이상한 억양으로 말하는 Y를 D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페에 들어서 보니 그때 앉았던 자리에서 D에게 커피 좀 줄이라고 하다가 싸웠던 장면이 떠올랐다. D는 정작 함께 왔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건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싸운 기억들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Y는 그런 것들만 기억하고 있는지 자신의 기억력에 짜증이 밀려왔다. 헤어지고 나서 Y는 오기로 커피를 마셨다. 그놈의 커피가 헤어지게 만든 거라고 핑계를 떠넘기고 싶었다. 50 넘은 부장들이 회식할 때마다 술을 마셔서 없애버린다고 썩은 개그를 하는 것처럼 커피를 다 먹어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우습게도 D가 왜 커피를 매일 달고 살았는지 알게 됐다. “커피 안 마시더니?” D가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D에게는 다 의미 없는 것들일 것이다. “요새 커피 안 마시면 버티질 못 해. 출근할 때 막 1리터씩 마셔. 너는 커피를 달고 살더니 웬 차야?” “요새 잠도 잘 못 자고 위염도 좀 있어서 안 마셔.” 정작 D는 헤어지고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니 Y는 D에게 자신이 커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카페를 나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D가 셀프빨래방을 보며 말했다. “어? 여기 원래 편의점 아니었나?” “응. 맞아. 그때 우리 이 앞에서 싸웠잖아.” Y는 말하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나와 버린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Y는 편의점이 없어질 때 그 앞을 지나며 잘 됐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D가 이 앞을 지날 때마다 그때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을까 봐. 편의점이 없어지면 그 기억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정작 D는 아예 편의점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뭐 때문에 싸웠지? 넌 뭐 싸운 것만 기억하고 있어?”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 그런 것만 기억나네.” 각자의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 왔을 때 Y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 번 하자.” Y는 지금 여기 있는 D가 현실의 D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던 머릿속에 있던 D 말고 여기에 있는 D. 그래서 한 번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악수라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D는 아주 살짝 Y의 손을 잡아주었다. Y는 그제야 수없이 곱씹던 D에 대한 기억들이 그토록 후회하던 과거에 갇힌 의미 없는 것들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휘적휘적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Y는 그 유통기한 지나버린 기억들을 이젠 정말 버려야겠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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