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이 Feb 26. 2020

시간에 헐린 기억-1

늦은 반성과 부족한 마음





D는 고무장갑을 끼고 터진 쓰레기봉투를 테이프로 붙이려 했다. 잘 들어가지 않는 쓰레기를 억지로 밀어 넣었던 걸 후회하면서. 쓰레기를 가득 담고 있는 봉투의 찢어진 틈은 잘 모아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테이프를 겨우 봉하고 고개를 들었다. Y가 서 있었다. D는 꿈같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멍하니 Y를 바라봤다. Y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뗐다. “오랜만이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말 걸기가 좀 그랬어. 봉투랑 싸우는 줄.” 얼굴에 피가 쏠려 있는 느낌이 그제야 느껴졌다. 분명 쓰레기봉투 때문일 텐데 Y가 오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D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무장갑을 벗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의 움직임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10분 전 봉투에 쓰레기를 밀어 넣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을 얼마나 상상했었나. Y의 집 근처를 지날 때, Y의 직장 근처를 지날 때, 사람 많은 번화가에 있을 때, 친구들이 폐인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는 말을 할 때, 습관처럼 상상했고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무슨 말을 할지 수도 없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다 가도 아니고 터진 쓰레기봉투를 수습하다 만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예상해본 적 없었다. 


“저녁 먹었어?” Y는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밥 얘기를 꺼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절대 알 수 없던 D는 답하기 쉬운 질문이 차라리 고마웠다. “아니. 너도 아직?” “응. 밥이나 먹자.” 어려운 얘기 쉽게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Y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있어. 외투 가지고 올게.” Y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D는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그나마 외출복 차림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인 것 같았다. 늘 터 있는 입술이 새삼 신경 쓰였다. 외투를 가지고 나오며 머리를 살짝 손질할까 하다가 만나던 순간을 떠올리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Y는 출입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D는 조금 천천히 걸어 나가며 Y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Y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흩날리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이 되어버린 Y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D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문을 열고 나가 Y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Y가 뒤돌며 말했다. “간장게장!” “뭐? 나 간장게장 못 먹...어.” 못 먹잖아 라고 말하려다 어미를 황급히 바꾸느라 D의 억양은 살짝 어색해졌다. 그 많고 많은 음식 중에 하필 못 먹는 딱 하나의 음식을 말하는 Y에게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벌써 다 잊어버렸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렇게 짧은 대화에서도 깨달아야 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D의 수많은 재회 시뮬레이션 속에 역시 이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Y는 웃으며 말했다. “알지. 장난친 거야. 다 기억하고 있어.” “참 나. 그럼 뭐 먹을래?” “그냥 걸어보자. 걷다가 보이는데 가자.” 나란하지만 조금 간격을 두고 걸었다. D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자꾸 땅만 보고 걷게 됐다. 분명 이 길을 예전에도 함께 걸었을 것이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하지만 이제 그런 사소한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Y는 고깃집은 어떠냐고 했지만 왠지 기진맥진해진 D는 그냥 백반집이나 가자고 했다. Y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예전에 갔을 것 같은 오래된 가게를 지나 최근에 새로 생긴 밥집으로 들어갔다. Y가 메뉴를 고르자 D는 같은 음식을 두 개 주문했고 Y는 수저를 놓고 물을 따랐다. 하고 싶었던 말도 묻고 싶었던 말도 많았지만 막상 Y가 눈앞에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D는 생각했다. Y의 얼굴을 좀 보다가 괜히 너무 뚫어지게 보는 것 같아서 가게에 있는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티비에서는 예전에 Y가 좋아하던 프로그램이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Y가 그 프로그램을 너무 좋아해서 D도 같이 보다 보니 함께 좋아하게 되었다. Y와 헤어지고도 계속 보던 그 프로그램도 끝나버렸을 때 D는 한 번 더 Y와 인연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Y는 아마 그 장면을 10번도 넘게 봤을 것이다. 그런데도 티비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D는 다시 한번 Y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지내? 회사는 그대로 다니고?” 음식이 나오자 Y가 물었다. “응. 그렇지 뭐. 너도?” “아. 난 이직했어.” D는 며칠 전 Y의 회사 근처를 지나며 혹시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순간순간 끼어드는 찌꺼기 같은 생각들과는 달리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기도 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만났던 탓에 주위 친구들을 서로 다 알고 있었고 그들의 안부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까지 궁금해 하진 않았지만 듣고 있으니 나름대로 흥미 있는 주제였다. 친구들의 근황이 곧 결혼이었고 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서로의 결혼 계획에 대해 묻게 됐다. D는 그때도 지금도 결혼에 확신이 없었다. 그 확신 없음이 Y를 불안하고 서운하게 했었고 그게 다시 싸움을 만들게 됐고 또 결국 헤어짐까지 가게 만들었을 거라는 걸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제 알았다고 모든 싸움의 원인을 Y에게 떠넘겨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고 해도 여전히 변한 것이 없으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Y는 늘 언제나 그랬듯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빨리 하고 싶다고 했다. D는 웃으며 아마 너는 잘 살 거라고 나는 이런 성질머리로는 틀렸다고 농담이지만 진심인 말을 했다. Y의 눈에 살짝 측은함이 스쳐간 것 같았지만 이내 웃으며 오랜만에 맞는 말 한다고 했다. 그래서 D도 그냥 같이 웃었다.


분명 배가 고팠는데 막상 밥을 먹으려니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반쯤은 남긴 채 밥집을 나와 카페로 들어가는 길 Y는 둘이서 오랜만에 온다고 했지만 D는 같이 왔던 기억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아냐?” “아냐. 너 벌써 그렇게 기억력이 안 좋아서 어쩌냐?” “벌써 언제 적 일인데 그걸 다 기억해. 중요한 건 다 기억하거든!” 그렇게 큰 소리는 쳤지만 중요한 게 뭐였는지 기억하는 게 뭔지 이제 전부 알 수 없어진 건 아닐까 싶었다. 반복해서 떠올렸던, 아니 떠오르던 기억들은, 단지 아마도 미안해서 평생 한 번쯤은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던 감정의 찌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D는 생각했다. 


Y는 예전에 절대 마시지 않던 커피를 주문했고 D는 차를 주문했다. “커피 안 마시더니?”  “요새 커피 안 마시면 버티질 못 해. 출근할 때 막 1리터씩 마셔. 너는 커피를 달고 살더니 웬 차야?” “요새 잠도 잘 못 자고 위염도 좀 있어서 안 마셔.” 헤어지고 나서 깨달은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늘 Y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신경 썼다는 것. 그걸 잘못인 줄도 모르고 Y의 집착 때문이라고 떠넘겼던 것. 모든 신경을 D에게 쏟았던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Y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때 Y의 말을 듣고 커피를 줄였다면 위염 같은 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Y와의 기억처럼 자주 다니는 골목도 무심결에 지나다 보면 금방 바뀌어 버리고 만다는 것. 


“어? 여기 원래 편의점 아니었나?” “응. 맞아. 그때 우리 이 앞에서 싸웠잖아.” “ 뭐 때문에 싸웠지? 넌 뭐 싸운 것만 기억하고 있어?” “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 그런 것만 기억나네.” 그 말을 듣고 보니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서 뭔가를 먹고 있다가 싸우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싸운 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고 화를 내고 있던 Y의 표정과 Y를 두고 집으로 가던 기억이 뒤따라왔다. D는 한동안 이 기억을 곱씹으며 반성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각자의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 왔을 때 Y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 번 하자.” D는 Y의 얼굴을 한 번 더 조금 오래 보았다. 그리고 Y의 손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헤어지고 수도 없이 꿈꿨던 손을 잡고, 안아 보고 싶던 그 순간이었지만 너무도 잡기 어려웠고, 또 놓기도 어려웠다. 한 번 뒤를 돌아볼까 했지만 괜히 미련 같은 것들이 따라올까 두려워 D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D의 마음속에 몇 년 동안 머물던 Y는 지금의 Y와는 너무 달랐다. 정확하게는 Y와 만나는 장면과 D가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건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부족한 기억력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는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몇 년 동안 곱씹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들을 다 소용없어졌다. 옷장 틈에 오래도록 처박혀 있던 양말 한 짝처럼 버리기엔 너무 곱게 싸여 있었고 꺼내봤자 쓸모없는. 

작가의 이전글 잃어버린, 버린 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