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이 Jul 20. 2020

나의 야상

무너진 세계의 끝 2






물건에 딱히 애착을 가지는 편은 아니다. 워낙 험하게 쓰다 보니 애초에 옷이나 신발을 살 때부터 싼 것 사고 헤지면 버리자 그런 마음이기도 하고, 이사를 자주 하다 보면 멀쩡한 것도 모조리 짐으로 보일 때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1년 이상 쓰지 않은 것 같으면 잘 버리는 편이지만 누군가 선물해 준 것이거나 개인적으로 의미를 둔 것은 잘 쓰지 않아도 계속 가지고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선물 받은 강아지 인형이 붙은 벙어리장갑이나 대학 때 동아리 공연할 때 입은 단체티 같은 것들은 이제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버리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아마 서랍에 넣어두고 한 번도 보지 않다가 이사 때문에 짐 정리를 할 때에나 보게 될 것이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애매한 기준들로 버릴 것과 가져갈 것들을 정리해서 헌 옷 수거함에 가져가려고 종이 가방에 옷들을 욱여넣고 있는데 행거에 걸려 있는 야상에 눈에 들어왔다.      


몇 년 동안 입지 않았지만 계속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부피도 크고 몇 년째 입지 않았고 누구에게 선물 받은 것도 아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 야상은 휴학하고 캄보디아에 있을 때 산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남은 날이 한자리로 줄어든 어느 날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다 예상치 못한 문제를 깨닫게 됐다. 그 사람들이 지금 한국은 다른 해 겨울보다 훨씬 추워서 따뜻한 이 곳 날씨가 너무 좋다고 했다. 듣다 보니 내가 떠나올 때는 여름에 가까운 가을이라 죄다 여름옷만 싸서 왔는데 한국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집까지 갈 때 입을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지고 있는 옷 다 꺼내 입고 집에 가야겠다며 꼴이 아주 우습겠다고 낄낄 웃었다. 그러다 프놈펜에 꽤 오래 머물고 있던 한 친구가 겨울옷을 파는 곳이 있다며 다음날 같이 가보자고 했다. 포장도 안 된 흙길 옆으로 2~3층짜리 가건물 같은 매장이 쭉 늘어서 있었다. 사시사철 더운 곳에서 오리털 파카부터 긴 코트까지 외국 브랜드의 겨울옷을 싸게 팔고 있었다. 팔리지 않아 이월되다 온 것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가격은 한국에서 살 때보다 싼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돈이 모자라서 오리털 외투 같은 건 살 수 없었다. 그나마 가격과 디자인이 제일 마음에 드는 게 그 야상이었다. 그런데 남자 사이즈 밖에 없었다. 일단 친구와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 옷을 사는 게 합리적인 일인가 고민했다. 사고 나면 돈이 아슬아슬하게 남는데 하루도 아니고 겨우 1시간 남짓 쓰려고 옷을 산다는 게 잘하는 짓일까 싶었다.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딱 한 번만 다시 보고 가자고 가서 야상을 샀다. 얼마나 그 매장 앞을 오락가락했으면 그 앞길이 꿈에 나온 적도 있었다. 그 대가로 며칠 동안 식빵으로 연명하다 한국에 왔다.      

 


잘 입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다행히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한 겨울에 입기는 얇았지만 사이즈가 크니까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매일 입었다. 남자 구두 내놓듯 잘 보이는데 걸어두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입고 나니 어느 순간 손이 가지 않았지만 버릴 수도 없어 행거에 계속 걸어두었다. 행거에서 내렸지만 종이 가방에 넣을 수 없어서 현관문 앞에 두고 며칠이 흘렀다. 오고 가면서 현관문 앞에 있는 걸 흘끗 쳐다봤다. 행거에 걸려 있을 때도 늘 눈에 보였지만 익숙한 풍경처럼 아무 감상도 없다가 옷이 있을 곳이 아닌 생경한 자리에 놓여 있으니 괜히 온갖 생각이 스쳤다. 야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버린 것 같았다. 내 삶의 초라한 시기를 함께하고 낡아 버린 것. 어느 날은 내 보호막이 됐고, 어느 날은 형편없는 내 마음 같았던 것.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릴 때, 이사를 1년에 세 번씩 할 때, 새벽 알바를 할 때, 애인과 헤어지고 혼자 청승맞게 울고 있을 때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 어느 날은 젊은 날의 좋은 추억 같아서 흐뭇하게 바라보며 계속 간직하고 싶다가 또 어느 날은 당장 버리고 싶은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 매번 그만 잊어버려도 될 일들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던 나는 야상을 어느덧 애증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행거에 걸어 둘까 버릴까 며칠 고민하다 옷은 옷일 뿐 결국 헌 옷 수거함에 넣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누구에게나 힘든 인생인데 별 것도 아닌 것에 의미 부여하면서 감상에 잠기는 것 같다는 극단적으로 이성적인 결론이 났기 때문이었다. 버리고 집에 돌아오다가 공원을 좀 걸었다. 처음 야상을 사던 날처럼 덥지도 않고 내내 입고 다닐 때처럼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였다. 이어폰에서 스윗소로우의 나의 구두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추울 때도 어디를 갈지 몰라 헤맬 때 함께 고생했던 구두에게 고생 많았다고 말하는 노래였다. 나는 다시 극단적으로 감성적으로 변했다. 야상에게 고생 많았다고 험하게 입어서 미안했다고 추운 날 따뜻하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관리 잘해주는 좋은 주인 만나서 주인과 함께 좋은 일만 가득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으면?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무너진 세계의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