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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Aug 03. 2020

변하지 않는 것

변하고 싶은 것, 그러고 싶지 않은 것






미용실을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몇 개월 동안 코로나 때문에 미루고,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 머리가 제법 길었다. 그냥 길러볼까 하다가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미용실을 갔다. 언제나 미용실을 가서 어쩔 수 없이 거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해 표정이 저절로 심각해진다. 저 얼굴이 내 얼굴이라니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심각하게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디자이너가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길이를 몇 개월 전 그대로 짧게 자를지 지저분한 부분만 다듬고 기를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간 터라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못 정하고 왔다고 하니 그러면 머리를 감는 동안 생각해보라고 해서 편안한 샴푸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적셔주면서 디자이너는 거품이 불편한 곳에 묻거나 헹구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다. 네 - 대답을 했지만 거품이 어디에 묻는지 또는 묻지 않았는지 감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아주 어릴 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한 친척 집에 있었다. 5촌쯤 되는 친척의 집이었던 것 같다. 화장실을 문을 열어 두고 당숙이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고 있었고 숙모는 목 뒤에 거품이 있으니 헹구라고 했다. 나는 숙모 옆에 서서 당숙이 머리 감는 걸 보고 있었다. 목 뒤에 거품이 꽤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당숙이 모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닦아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숙모가 나를 부엌으로 데려가 과자 같은 걸 줬다.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그날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잔 것 같았다. 잠옷을 갈아입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숙모는 내복을 입고 있을 때 위에 겉옷을 입으면 내복이 말려 올라가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손끝으로 내복 끝을 살짝 잡고 팔을 쏙 내밀면 내복이 말려 올라가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이런 좋은 방법이 있었구나 하며 신기해했다. 스스로 숙모가 알려준 대로 옷을 입고 뿌듯했다. 다만 지금 생각하니 엄마, 아빠, 동생이나 다른 친척도 없이 혼자 그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것이 좀 특이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확실한 기억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내가 몇 살이었을까 몇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로 유추해보고 있었다. 



유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샴푸가 끝났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손끝으로 소매를 살짝 쥐어봤다. 갑자기 급하게 아무 준비 없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 길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어야 할 시간에 나는 한 친척집에 다녀와 버렸다. 미용사는 친절하게 웃으며 결정했냐고 물었다. 거울에는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내 얼굴이 그대로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착실히 자라나던 머리 길이와 달리 이토록 사소한 머리 길이에 대한 고민은 몇 개월을 해도, 미용실 앞에 와서도, 머리를 감는 동안에도 조금도 되똑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일단은 머리는 다시 짧게 자르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길러보리라 다시 마음먹으면서.


머리를 자르는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기억도 확실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서 지금의 내가 되는 동안 나는 얼마나 변한 걸까,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뭘까.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었고 조금은 성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장면을 마주했을 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같았다. 내 얼굴이 착실히 늙어가고 머리카락이 착실히 자라는 동안 늘 제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내 인생을 착실히 살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영화 비포 선셋 중에서


비포선셋에서 셀린은 예전 일기를 읽어보다가 어린 시절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가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은 비슷한 것 같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다양한 것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지만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코어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 말에 제시는 어느 대학에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과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해 연구한 논문의 내용을 말한다. 큰일이 있은 직후에는 감정이 조금 바뀌었다가도 금방 사람들은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고. 복권에 당첨됐더라도 시니컬한 사람은 다시 시니컬해져 버리고 하반신이 마비가 되더라도 원래 쾌활했던 사람은 다시 쾌활한 성격으로 돌아가더라고. 그 영화를 수없이 많이 봤지만 이번에는 그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쩌면 일기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코어 같은 것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어느 날은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하나로 이어주는 안정감이 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내가 조금도 자라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사람은 변하는 걸까? 아니면 속은 그대로인 채 변하는 척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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