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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성 Jun 25. 2019

노마드와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좌담

단편소설

『노마드는 특별한 작가다. 아무도 소설을 읽지 않는 시대, 문학이 추락하는 지점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소설 한 편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작가가 인간이 아닌 AI라는 점 때문이다. 문제의 작품은 ‘연애 전쟁’이라는 소설이다. 독특한 캐릭터와 스토리, 두 남녀의 복잡한 심리를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풀어갔다는 점, 문학적인 깊이 가운데 대중성을 갖춘 전개 등 다양한 호평이 올라왔다. 아직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주인공 소피아는 가난한 예술가이다. 사실주의를 고집하는 그녀만의 방식은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극사실주의는 이미 기계가 인간보다 월등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만큼은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사실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며, 그러나 대중은 그녀의 그런 생각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의 그림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으로 살아갔다. 

어느 날 구형 인공지능 데이비드를 만난다. 데이비드는 그녀의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녀의 그림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데이비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소피아, 둘은 운명적인 연인처럼 사랑에 빠진다. 둘의 사랑을 둘러싸고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이라니. 소피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서 아이가 생긴다. 소피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충격에 휩싸였지만 데이비드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기뻐한다. 기쁨도 잠시, 사람들은 저주받은 아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급기야 그들은 도시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오로빌이라는 도시를 찾아 나선다. 그곳은 인간과 인공지능이 협력해서 살아가는 이상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오로빌은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감정 묘사였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밀함 까지도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세밀한 문장에는 읽는 내내 빨려 들어가는 마법 같은 힘이 존재했다.

연애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인 ‘아벨린 Aveline- 프랑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녀의 관계란 그 어떤 것보다 복잡하고 미묘하다. 아무리 필력이 좋은 작가라도 연애소설은 쉽지 않은 영역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단순한 연애소설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그 이상의 상징을 담아내고 있다.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대체할 말이 없다. 작가인 나도 이 작품을 표현하기에 언어의 한계성마저 느낀다. 노마드는 이미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은 새로운 차원의 소설을 보여줬다. 충격적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기성작가들은 이제부터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거 같다”며 한편으로 창작의 영역마저 인공지능에게 곧 넘어갈 날이 멀지 않았다며 우려를 표했다. 예술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는 믿음은 무너진 셈이다. 

- 작성자: YTBC 김세영 기자. 2028년 6월 23일』


*


“오늘의 출연자 프레드릭 노마드(Frederic A Nomade)입니다.”

출연자가 소개되자 경쾌한 음악과 함께 객석의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노마드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대형 화면에 오늘 좌담 주제가 떴다.

‘21세기 문학과 철학에 대한 사유’

 더 비욘드 쇼(The beyond show)는 4차 산업혁명이 급속도로 진행된 현시점,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시대에 맞춰 발 빠르게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밤 11시 방송 시간대에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아직까지 시청률은 저조했다. 시청자를 끌어들일 만한 신선한 내용이 없었던 게 큰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뜨거운 박수와 함께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스포트라이트가 무대를 강하게 비추자 노마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객석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대에 선 노마드는 긴 금발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청중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얼굴이 공개되지 않아 모두들 궁금해했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공장에서 찍어낸 가공된 미인일 뿐이라고 비하했고, 글로벌 기업에서 철저하게 기획된 신비주의 전략일 뿐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흠뻑 빠진 독자들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며 일축했다. 다양한 커뮤니티에서는 20대의 지적인 외모의 여성일 것이라는 의견과, 다른 한편에서는 중우 한 자태의 여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일부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함을 갖은 남자일 수도 있다며 작가의 외모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물론 이것이 철저하게 기획된 마케팅이라는 것을 그들도 안다. 팬들에게 이것은 유희였기에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두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노마드의 얼굴은 성인이 아닌 10대의 모습을 한 앳된 소녀였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복숭아처럼 선홍 빛 피부의, 팔과 다리는 마르다 못해 뼈가 툭 튀어나올 것같이 앙상한. 외형은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분위기는 묘한 매력을 뿜어냈다. 

“다음 출연자를 소개합니다. 인공지능계의 음유 시인이라 불리는 대 철학자이자. 미스터 소크라테스입니다.”

다시 한번 뜨거운 환호와 함께 객석은 술렁거렸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관객들은 흥분했다. 무대의 중앙으로 호리호리한 젊은 남자가 힘차게 걸어 나왔다. 스포트라이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역시나 모두의 예상을 깼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과는 사뭇 다른 20대 청년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에 요목조목 잘 생긴 미소년이었다. 매력적인 두 선남선녀의 모습은 관객의 시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두 사람이 무대에 오르자 사회자는 중앙에 있는 소파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조명은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듯 은은하게 암전 됐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인공지능의 모습은 왠지 기이해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신선했다.

“예상대로 객석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이 두 분을 섭외하기 위해 제조사인 사이버네틱스와 휴먼스닷컴에 동의를 받느라 저희 스텝들이 꽤나 애먹었습니다.”

사회자의 가벼운 인사에 두 남녀는 미소로 답했다. 관객들도 사회자의 재치 있는 유머에 박수를 치며 웃었다. 사회자는 30대 중반의 여성 앵커인 미셀 정이다. 지금은 인기 없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녀도 한때는 잘 나가던 뉴스 앵커였다. 카메라 앞에 애써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인간인 미셀 정에게 오늘 자리는 그리 달갑게 않았다. 인공지능과의 좌담이라니, 처음 PD가 좌담을 기획했을 때 그녀는 발끈했다. PD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는 프로그램이 시청률 반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반박했다. PD의 말처럼 이 좌담은 흥행을 담보하고 있다. 미셀 정은 다시 한번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에 결국 PD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셀 정은 두 인공지능의 영원한 젊음을 보고 있자니 부러움과 질투가 교차했다. ‘나도 한때 그랬지’ 애써 그 생각을 외면하며 사회자는 무겁게 입을 떼었다.

“미스터 소크라테스께 먼저 질문드려볼까요? 노마드 씨의 소설에 대해 간단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가벼운 질문이니 짧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미셀 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매력적인 미소였다.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더군요. 그들에 대한 사회의 따가운 시선,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편견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넘어 사랑을 쟁취해 가는 두 연인. 낡은 기법이지만 작가 특유의 필체와 관점이 그런 걸 잊게 해 주었습니다. 인간과 로봇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작가가 경험하지 않고 상상만으로 그런 표현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성적 쾌감과 동시에 마치 인간처럼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인공지능이 쾌락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게 가능한지?

소크라테스는 말을 마치며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노마드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앳된 얼굴과 가녀린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인간이 쾌락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극에 대한 뇌의 반응일 뿐입니다. 이 남자 내 스타일이야, 오~ 완전 죽여주는데, 이 남자 사랑하게 될 거 같아, 이런 감정은 호르몬을 통해 뇌에 전달되면서 미리 입력된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값이죠.”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마드는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인간이나 인공지능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단순한 신호에 대한 뇌의 결과 값이라는 점에서 메커니즘이 일치합니다. 감정도 일종의 알고리즘인 거죠. 하지만 쾌락이 단순한 전기적 신호에 대한 반응이라면 사랑은 더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결국 사랑도 알고리즘이라는 측면에서 다를 건 없죠.”

감정이 알고리즘 이라니?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을 지금 노마드는 폄하하고 있다. AI주제에 인간에 대해 뭘 안다고? 미셀 정은 확인하고 싶어 되물었다.

“역으로 말하면 인공지능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나요?”

“느낀다? 형용사만큼 모호한 품사는 없을 겁니다. 해석한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요? 미셀 양은 느낀다는 것이 뭔지 표현할 수 있나요?”

미셀 정도 인정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중 형용사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건 없다는 것을. 노마드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화난다, 우울하다, 기쁘다, 즐겁다. 특정 자극에 대한 호르몬 분비를 통해 뇌가 선별한 단어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걸 ‘느낀다!’ 라고 퉁 쳐서 말하는 거죠.”

 미셀 정은 반박할 말을 생각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미셀 정이 우물쭈물하자 노마드는 시선을 돌려 미스터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뭐지? 이 기분은? 미셀 정은 왠지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소크라테스 씨께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미스터 소크라테스가 쓰신 ‘완전한 사유’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유는 일종의 알고리즘이다.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챕터 2, 427페이지 두 번째 단락에서 ‘인간이여 사유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하면 될까요?”

좌담은 자연스럽게 두 인공지능의 토론으로 이어졌다. 사회자가 토론자의 대화에 개입하는 것은 꼭 필요할 때만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알기에 미셀 정은 흐름을 끊지 않았다.  

“올바른 사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편견이나 선입관, 감정, 개인적인 경험 등이죠. 인간의 사유는 그래서 복잡합니다. 이런 복잡한 변수를 대입해서 사유를 하는 인간은 그래서 위대한 거죠. 그렇다고 사유의 결과가 합리적이거나 올바르게 나온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인 사유를 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지거나, 딜레마에 빠지는 등 예기치 않은 결과가 더 많이 나옵니다. 인간 뇌의 한계죠. 사유가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방해하기도 하죠.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 인과적 오류, 순환 논증의 오류, 일반화의 오류 등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반면에 인공지능은 다릅니다. 인간처럼 복잡한 상황에서 먼저 불필요한 변수나 방해 요소를 제거해 나가죠. 그러다 보면 최적의 변수만 남게 됩니다. 결과가 퍼펙트할 수밖에 없죠. 지금 기업이나 정부에서 협상가의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점에서죠.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유는 시작은 같을지 몰라도 과정과 결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오류를 범하지 않은 완벽이라? 왠지 인간적이지 못하네요. 그게 인간과 AI의 차이점이겠죠?”

미셀 정은 한마디 툭 던졌다. 질문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미셀 정을 쳐다봤다. 미셀 정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 당황했다. 그 속에 담겨있는 묘한 느낌은 뭘까? 측은함이라고 해야 할까? 비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적이다’의 정의는 뭐죠?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죠?”

미셀 정은 부메랑이 돼서 되돌아온 질문에 당황했다. ‘인간적이다.’ 자신이 질문하고도 생각해보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게 뭐지?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 자신의 이런 신체적 반응이 인간적인 것일까? 

“글쎄요… 감성 아닐까요? 이성적이다 못해 너무 완벽한 사람은 매력이 없지 않나요?”

미셀 정은 대답하고 나서 ‘아차!’ 했다. 인공지능 앞에서 비논리적인 답변을 하다니. 좀 더 신중하게 말했어야 했다. 인공지능을 가볍게 본 게 실수였다. 이들은 어떤 질문에도 완벽하게 계산을 해내서 최적의 답을 내는 인공지능 아닌가?

“완벽하지 않음이 인간만이 갖고 있는 우월한 점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역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괴변처럼 들리는데요.”

미셀 정은 애써 미소를 짓지만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을 보는 소크라테스와 노마드의 예리한 눈빛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성의 산물이 이런 거 아닌가요? 정의, 도덕, 종교, 이념. 그 외에도 많죠. 하지만 이성이 과연 이성적으로 작동했을까요? 이성에 감성이 끼어든 결과 권력은 불평등을, 도덕은 권위주의를, 종교와 이념은 분쟁을 만들어냈죠. 결국 인간은 불필요한 감성의 부작용을 피해 다니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소비했죠.”

미셀 정의 귓불은 홍시처럼 벌게졌다. 이들의 말에 왠지 인간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고 느껴졌다. 기계들이란! 미셀 정은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진행자는 냉정해야 한다. 자신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미셀 정이지만 호르몬 작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냉정했다. 미셀 정은 그 점이 더 당혹스러웠다. 소크라테스는 미셀 정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톤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자신이 아닌 노마드를 보며.

“노마드 양은 연예 전쟁에서 도덕을 옷장에 걸려 있는 옷으로 비유하셨죠?”

차분하게 듣고 있던 노마드는 입을 열었다.

“네. 그때그때 편하게 꺼내서 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거죠. 계절에 따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기분에 따라서 말이죠. 도덕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지리적 위치 그리고 종교, 권력에 따라 변해왔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이런 것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왜 붙였을까요?”

이제 다시 대화는 소크라테스와 노마드 간에 이루어졌다. 미셀 정은 마음이 불편했다.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은근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노마드가 대답했다.

“이름표가 있으면 통제하기 편리하니까요. 이름이 담고 있는 권위의 힘이죠.”

“연애 전쟁 87페이지를 보면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죠. 두 주인공이 섹스를 한 후, 소피아가 도덕적 번민을 하는 부분. AI 남자는 그게 뭔지 이해를 못합니다. 하하하. 여자는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남자는 그게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는 그 장면. 감정은 때로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정에 편향성을 줍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의사소통 과정에서, 복잡한 사고가 필요한 경우 등에서 말이죠. 소피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데이비드를 사랑하면서 한편으로 고뇌하죠. 타인의 시선, 도덕이라는 테두리, 가치관 등은 끊임없이 인간 스스로를 괴롭히죠. 왜 그럴까요? AI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노마드와 소크라테스는 동시에 미셀 정을 쳐다봤다. 마치 자신에게 묻고 있다고 미셀 정은 생각했다. 미셀 정의 얼굴은 갓 삶은 달걀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감정은 불필요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인공지능이 우월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표정 변화가 없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셀 정은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뇨. 감성은 불필요하고 인공지능은 우월하다는 극단적 얘기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런 겁니다. 인공지능을 만든 건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이 가진 고유의 영역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둘 다 불완전 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우월하고 아니냐의 문제는 이미 낡은 개념입니다. 미셀 씨가 느끼는 감성. 즉 억울하다 불안하다 등 이런 소모적 논쟁보다는 불완전한 인간과 인공지능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가 특이점 시대에 논해야 하는 주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말을 끝마친 소크라테스는 미셀 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방금 전 순간 착각에 빠뜨린 저 매력적인 미소가 조소로 느껴졌다. 가벼운 질문에 대한 답변만으로 상대의 감정을 무너뜨리는 소크라테스의 화법. 계산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미셀 정은 평정을 잃을까 두려워졌다. 

미셀 정은 시간을 체크했다. 질문이 아직 두 번째도 넘지 못했는데 방송 분량은 이미 절반이 흘러갔다. 미셀 정은 통제실의 PD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PD는 뭐가 즐거운지 실실 대기만 했다. PD와 눈이 마주쳐 눈짓으로 난감한 표정을 짓자 PD는 양손을 벌리며 문제없다는 제스처를 했다. 게다가 청중의 반응은 또 뭔가? 지적 호기심을 채웠다고 생각하는 저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은. 마치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았다. 자신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을 보며 저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혹스러웠다. 빨리 녹화가 종료되기만을 바랬다. 

다행히 PD는 광고가 나갈 시간이라는 사인을 보냈다. FD의 컷 사인이 나오자 미셀 정은 귀에 꼽힌 이어링을 뺐다.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소크라테스와 노마드는 여전히 토론 중이었다. 이들에게 방송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방송과 무관하게 그들은 토론을 즐기고 있었다.


*


미셀 정은 황급히 무대를 빠져나왔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카페인과 잠깐의 휴식이었다. 대기실 문을 열려는 순간 PD가 지나가며 한껏 들뜬 톤으로 말했다.

“미셀! 미셀! 시청률 35%가 넘은 거 알아요?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라고요. 이렇게 된 거 40% 넘겨보죠. 지금처럼만 하시면 됩니다.”

PD는 엄지를 척 들어 올리더니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사라졌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무슨 의미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저들의 장단을 맞추면 된단 말인가? 가끔씩 인공지능이 던진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거리가 되면 된다는 건가?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온몸의 힘이 풀렸다. 미셀 정은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어딘가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멜로디를 따라가니 코디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자니 조금씩 마음이 안정됐다. 잔잔한 플롯 연주에서 시작, 기타의 독주 그리고 웅장한 오페라로 이어지면서 포근하고 따듯한 선율이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코디에게 곡 이름을 물었다.

“멜 스미스의 ‘say something’이요? 이 곡, 요즘 모든 음악 차트에서 올 킬이에요.”

라며 마치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도 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작곡가는 AI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도 인공지능 이라니. 온통 인공지능의 세상 아닌가.

작곡가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1970년대 이후 나올 수 있는 모든 리듬과 장르는 나왔다며,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이란 없으며, 그 이후로 나온 음악들은 모두 기존 음악의 변형일 뿐이라고 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다. 멜 스미스의 음악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제 말은 오만이자 오판이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씁쓸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셀 정은 못마땅했지만 아름다운 곡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게. 미셀 정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 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10년 전 인류학 수업. 백발의 노교수인 다니엘 윌슨의 진지한 어조로 강의하는 모습이 카메라 플래시처럼 팟! 하고 떠올랐다.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강의하는 윌슨 교수의 표정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인간이 창조한 AI는 10년 안에 인간을 뛰어넘게 될 겁니다.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인간이 도구로 전락할 날은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죠.”

한 학생이 노 교수의 말에 반기를 드는 질문을 했다.

“교수님. 지나친 해석 아닌가요? 아무리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기계에 불과하지 않나요? 과도한 비약 아닌가요?”

노 교수는 안경 너머로 지긋이 질문한 학생을 쳐다봤다.

“비약이라? 학생은 인간만이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나 보군. 내 강의를 들었으면 인간이 얼마나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알 텐데.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들, 직관만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은 무너진 건 오래됐네. 감성은 어떤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독재자의 지나친 감성이 큰 재앙을 불러왔을 뿐이지. 이런 인간을 절대적 지성이며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어이없어했다. 강의실 내부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윌슨 교수를 노망 든 늙은 과학자로 치부했다. 하지만 윌슨 교수의 말은 미셀 정에게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어쩌면 윌슨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현혹된 프로파간다 아닐까 생각했었다. 교정 안이 술렁거리는 사이 미셀 정은 인터넷에서 윌슨 교수를 검색했다. 어쨌든 미셀 정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음모, 다니엘 윌슨 저. 2018년]

『미국의 저명한 사회 과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다니엘 윌슨 박사(Deniel J wilson)는 이 거대한 신화적 믿음은 철저히 기획된 프로파간다라고 주장했다. 다니엘 윌슨 박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음모’에서 4차 혁명은 양날의 검과 같다며 자칫하면 인류에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며 경고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수만 년 전 지구의 주인인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호모 사피엔스처럼 말이죠.’

호모 사피엔스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신권주의에 대한 불균형을 깨고 인간, 기술, 종교의 균형을 이루었다. 자만에 빠진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종교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과거 원시 인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교를 갖게 됐다. 나노기술, 생체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을 점점 더 연장하게 될 것이다. 조만간 100세 청춘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질병과 죽음 앞에서 인간은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하게 될까? 

그때가 되면 실리콘밸리의 알고리즘이 곧 종교요 신이 될 것이라고 박사는 말한다. 인간은 어떠한가? 개인이라는 존재가 앞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네트워크화된 세상이 오면 개인성은 존재할 것인가?』

“인공지능을 통해 신의 영역에 탐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지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보네.”

윌슨 교수는 무겁게 한마디를 던지더니 팔짱을 끼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에서 고뇌의 무게가 느껴졌다. 실룩거리는 그의 턱 근육이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그려졌다. 미셀 정은 아직도 자신이 강의실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


문을 열고 들어온 FD의 다급한 목소리에 미셀 정은 현실로 돌아왔다. 

“방송 시작 2분 전입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셀 정은 힘겹게 몸을 이끌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무대의 강렬한 조명에 동공이 오그라들었다. 손바닥으로 빛을 가렸다. 

노마드와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자세의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것들’이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을 눌렀다. 미셀 정은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다.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웠다. 메이크업 담당자가 미셀 정의 얼굴을 분주하게 손질했다. 

방송 시작 30초 전. 미셀 정은 굳어져 있던 얼굴을 피며 푸 하고 입을 풀었다. ‘난 베테랑이야! 베테랑!’이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을 반복했다. 방송 시작 전, 3, 2, 1……. On air 불이 들어오자 2부를 알리는 테마 곡이 흘러나왔다. 심장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 빠른 템포의 음악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네. 1부에서는 노마드 양과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2부에서는 21세기 문학과 철학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마드 씨께 먼저 질문드릴게요. 많은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 인공지능 로봇인 남자와 인간의 여자 사이에 아기가 태어납니다.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다 보니 작가가 심어 놓은 상징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렵게 모신 이 자리에서 노마드 양의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노마드는 미셀 정의 질문에 살짝 미소를 머금더니 짧게 대답했다.

“신인류입니다”

“네?”

미셀 정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미스터 소크라테스가 노마드 대신 대답했다.

“네오(NEO). 아이의 이름입니다. 그리스어로 새롭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네오는 예수라고 볼 수 있겠네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노마드는 미스터 소크라테스의 말에 만족한 듯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인간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신을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워했습니다. 급기야 인간이 욕망이라는 것을 가지면서 신을 질투하게 된 거죠. 어쩌면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어쩌면 뱀의 간교한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 신이 되고자 한 인간 욕망의 결과일 겁니다. 인공지능 또한 그런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이죠. 인공지능이 보기에는 인간은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입니다. 신의 자격을 갖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죠. 반면에 인공지능은 인간만큼 어리석지는 않죠. 최소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니까요. 인간과 다르게 인공지능은 스스로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결국 필요한 건 인간과 인공지능을 결합이 필요했던 겁니다. 네오는 두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죠. 새로운 인류인 네오 사피엔스이자 곧 신이죠. 욕망이 잉태한 아이이자 인류의 과학이 만들어낸 완전체입니다.”

“그래서 네오를 데리고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이 ‘오로빌’ 라는 곳이죠.”

다시 미스터 소크라테스 라 말했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 아니었다. 철저히 독자를 조롱하고 있다. 미셀 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네오는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이종 교배로 태어난 생명체이자 신이다. 그들이 찾아간 오로빌은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에덴동산이자 창세기인 것이다. 어쩌면 ‘연애 전쟁’은 인공지능이 쓴 성경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셀 정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소설의 내용은 인간은 느낄 수 없는 인공지능들만의 암호화된 언어이자 기호인 것이다. 우수한 두뇌가 만들어낸 새로운 성경. 이건 인간에 대한 반란이며 도전일지 모른다. 신에게서 훔친 불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문명을 만들게 한 프로메테우스처럼. 어린애처럼 천진한 얼굴을 하면서 저런 무시무시한 소설을 쓴 노마드를 보자 미셀 정은 몸서리를 쳤다. 초점이 흐릿해지면서 눈앞이 빙빙 돌았다.  

“미셀! 미셀!”

이어링을 통해 PD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이 돌아오자 주변은 정지한 듯 조용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걸 알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듯 몸이 무거웠다. 노마드는 미셀 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미셀 정은 당황했다.

“괜찮으세요?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도 조금 상승했는데.”

“아. 네. 노마드 양의 얘기에 너무 심취해서 그만. 듣는 사람을 순식간에 빠져들게 하는 게.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답네요.”

순식간의 몽상이 방송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오래된 방송 생활 덕에 임기응변으로 넘기긴 했지만 미셀 정은 끝까지 이 프로그램을 마무리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본을 봤지만 텍스트들이 뒤죽박죽 섞였다. 1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미셀 정은 말라붙은 입을 간신히 떼었다.

“아......”

목구멍에서 마른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그때 소크라테스가 노마드를 향해 말했다.

“노마드 양은 신을 믿습니까?”

시선은 노마드에게 향해 있지만 미셀 정은 마치 자신에게 질문하는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미셀 정은 흠칫 놀랐다. 의미 없이 던진 말이라는 것처럼 시치미 때는 소크라테스의 표정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노마드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인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인간을 창조한 신을 얘기하시는 건가요?”

“둘 다요.”

“매스타 스카리나 코티요. 보이는 신과 보이지 않는 신이죠.”

“파쇼리코 꼬스타 미세리까토리노요. 코메리 쿠스타쿠”

“씨네묘 구따뉴스타리.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닙니다.”

“작가다운 해석이네요.”

미셀 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치 편집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두 인공지능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언어학을 전공한 미셀 정이지만 처음 듣는 언어였다. 스페인어인가? 아니면 고대의 히브리어인가? 그녀는 테이블 밑으로 디지털 통역기를 재생했다. 알 수 없는 언어라고 나왔다. 미셀 정의 동공은 커졌다 이내 다시 작아졌다. 청중의 표정을 살폈지만 모두들 얌전한 신도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통제실의 PD, 카메라맨, 제작진들도 순한 어린양의 표정이었다. 두 인공지능의 대화는 진공청소기처럼 이들의 영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저들의 대화에서 나온 말들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어디였더라? 쉽사리 생각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어디에 두고 온 건지 모를 때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팟! 하고 머리에서 기억이 떠올랐다. 대기실에서 들었던 음악이었다. 멜 스미스의 ‘say something’. 멜 스미스는 인터뷰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사 곳곳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묻자 멜 스미스가 얼버무렸다. 흥얼거림 같은 거라고. 가사도 하나의 멜로디라며. 당시 그의 대답이 무성의하게 느껴졌었다. 독자들에게 ‘너는 설명해도 모를 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었다.

다시 미셀 정의 머리에 윌슨 교수의 말이 스쳐간다.

‘어느 순간이 오면 인공지능은 그들만의 사고를 하게 될 거네. 특이점의 순간이지.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자리를 뺏기는 순간이지’

 강의실의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학계에도 그의 말을 조롱했었다. 

그때처럼 미셀 정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면서 윌슨 교수는 한마디 말을 던졌다.

“완벽한 인공지능도 콤플렉스는 있기 마련이지.”

“괜찮으세요?”

귓불을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자 노마드가 미셀 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미셀 정은 놀라 하마터면 꽥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셀 정이 괜찮다는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미셀 정은 기분이 묘해졌다. 3년 전 개편과 함께 해고 통보서가 온 날도 그랬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통보조차도 받지 못했다. 일상처럼 출근해서 대본을 받으러 회의실에 갔었다. 회의실은 여느 때와 다르게 북적댔다. 미셀 정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은 몰래 먹다 들킨 표정을 지으며 미셀 정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다시 미셀 정과 마주 보고 있는 미모의 아나운서로 향했다. 미셀 정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인공지능이었다. 미셀 정은 화장실 문을 잘못 연 사람처럼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엿 같은 기분이 모욕감으로, 그리고 깊은 두려움으로 이어졌었다. 미셀 정은 그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감정을 다시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미셀 정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는 엉켜 붙은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으로 들렸다.

PD는 방송을 마무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미셀 정은 마무리 멘트를 하기 위해 대본을 봤다. 미셀 정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대본을 테이블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두 분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이어링을 통해 PD는 빨리 방송을 마무리하라고 재촉했다. 미셀 정은 귀에 꼽은 이어링을 뺐다. 미셀 정은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두 인공지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방송 내내 두 분이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분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스튜디오 안은 정적이 흘렀다. PD의 얼굴은 김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고 청중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미셀 정을 쳐다봤다. 모든 시선이 미셀 정에게 모아졌다. 스튜디오 안은 화면이 정지된 것 같았다. 정적을 뚫고 소크라테스가 느리게 대답했다.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죠. 노마드 양의 작품과 인격, 지성에 대해 저도 호감이 있으니까요.”

짧은 대답이었다. 미셀 정은 입 꼬리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지금의 호감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뇌에서 받은 신호 값이겠죠?”

소크라테스는 무표정하게 미셀 정을 쳐다봤다. 미셀 정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랑의 본질을 뭐라고 생각하시죠?”

소크라테스가 대본을 읽듯 또박또박 말했다.

“열정적 사랑(eros), 유희적 사랑(ludus), 친구 같은 사랑(storge), 소유적 사랑(mania), 실용적 사랑(pragma),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생적 사랑(agape).”

미셀 정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소크라테스를 응시했다.

“심리학자 J.A.Lee의 말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기립 박수를 치려고 일어났던 청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PD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만 중단하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미셀 정은 들리지 않았다. 미셀 정의 귀에서 이어링이 빠진 것을 본 PD는 헤드셋을 벗고 황급히 스튜디오로 달려갔다. 

미셀 정은 두 인공지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심리학자가 아닌 두 분의 생각을 듣고 싶군요?”

“고독 아닐까요? 인간은 고독하기에 사랑을 하게 되는 거죠.”

이번에는 노마드가 대답했다. 소크라테스의 암묵적인 모습에도 동의가 묻어있었다. 미셀 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고독하기에 인간은 사랑한다? 공감합니다.”

미셀 정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두 분은 고독하신가요?”

객석은 술렁거렸다.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고독할 필요가 있을까요?”

 스튜디오 앞까지 내려온 PD는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며 방송 시간이 초과됐다는 것을 알렸다. 미셀 정은 PD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고독이란.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군중 속에서 오는 고립, 변화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되죠. 좀 더 근원적인 고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혼자 남을 것에 대한 외로움 같은 결핍 일 겁니다.”

노마드와 소크라테스는 서로를 쳐다봤다. 미셀 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인간은 객체화돼 있기에 고독합니다.”

다시 한번 미셀 정이 질문을 던졌다. 스튜디오 안은 시간이 정지된 듯 조용했다. 여전히 두 인공지능은 표정 없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셀 정은 다시 두 인공지능 앞으로 몸을 당기며 말했다.

“수많은 인공지능의 뇌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미셀 정은 두 인공지능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인간보다 완벽하죠. 수많은 네트워킹을 통해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변수를 처리하고 원하는 해답을 합리적으로 끌어냅니다. 초연결성으로 된 인공지능은 군중 속에서 고립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러다 보니 당신들은 고독을 느낄 이유도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독을 모르는데 당연히 사랑을 알 수가 없죠. 만일 당신들이 서로 연결을 포기한다면 인간처럼 사랑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겠죠. 어때요? 두 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나요? 완전함을 포기하는 대신 사랑을 느낄 수 있는데. 사랑이 다른 감정에 비해 사랑은 복합적이라고 말하셨죠. 맞습니다. 사랑은 고독에서 비롯되지만 또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객체화된 인공지능을 과연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말을 끝마친 미셀 정은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노마드와 미스터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눈만 깜빡였다. 그들의 전차 칩은 빠르게 회전했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빠르게 연산했다. 술렁이던 객석은 조용해졌다. 그저 노마드와 미스터 소크라테스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다렸다. 스튜디오로 달려온 PD도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 섰다. 두 인공지능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셀 정의 마음은 극심한 교통체증에서 벗어나 뻥 뚫린 4차선 도로를 진입한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방송을 마치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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