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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성 Jul 05. 2019

고종황제가 오타쿠?

장편소설 [황금벌레]

왕의 뒷모습은 유난히 작아보였다. 위엄 있는 풍모는 간데 없고 초라함마저 들었다.

산책을 하던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궁궐 뒤편 외진 곳으로 향했다. 궁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커다란 회화나무는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고, 빽빽하게 들어서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가까이 가보니 회화나무는 터널처럼 거대한 아치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보였다. 궁 안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숲으로 들어서자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온 몇 줄기 빛이 어둠을 갈랐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판자로 만든 거대한 창고였다. 늘 수심에 가득 차 있던 왕의 표정이 이토록 해맑다니. 창고 문 앞을 이용학이 지키고 있다가 맞이한다. 왕은 손짓을 한다. 문을 열어보라고 말한다. 문을 여는 순간 어둠 속에서 묘한 기운이 뿜어 나온다. 왕은 전등을 켠다. 불이 순서대로 팟! 팟! 팟! 켜지면서 창고는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거대한 공간. 여러 개의 통로 사이로 물건이 진열 돼 있다. 하나같이 묵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다가가 먼지를 털어보니 서구와 청나라에서 들어온 온갖 희귀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한기자는 왕을 따라 긴 통로를 걸었다. 좌우로 진귀한 물건들이 실체를 드러낸다. 얼마 전 청나라에서 가져온 뻐꾸기 시계도 보였다. 시선을 돌려 보니 나팔관 모양의 커다란 스피

커가 달린 축음기가 보인다. 왕은 손잡이를 돌렸다. 조선의 명창 '박춘재'의 구성진 소리가 흘러나온다. 잠시 소리에 심취해 눈을 감아 본다. 왕 앞에서 박춘재가 자신의 노래를 직접 부르는 모습도 그려진다. 그 이에도 LP판이 수천 장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왕은 축음기 옆에 있는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

“보물지도인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시면 보물지도와 진배 없습죠.”

이용학이 대답한다.

두루마리에는 온갖 진귀한 서양 물건들의 그림과 함께 깨알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스위스 T. H. Cadwell사의 은색 회중시계, 로열 타자기, 포조의 수동 커피밀, 영국의 존 스펜서 피아노, 미국산 영사기와 카메라, 서양의 다양한 학문서, 심지어 이솝과 안데르센 동화집까지... 

이번에는 화려한 용이 새겨진 지포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많이 닳아있는 모습으로 보아, 왕이 무척 애용했던 물건인 것 같다고 짐작을 해본다.

“서양의 물건들은 하나 같이 규칙을 가지고 있지.”

왕은 먼지가 짙게 묻은 책을 들어 펼친다.

“황금비라는 거지. 자연의 아름다움의 이치를 발견해서 그대로 물건에 적용했으니. 참으로 과학적이지 않나?”

왕은 수학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궁전의 새로운 조형물이나, 물건을 만들 때, 심지어 궁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도 황금비를 따져 묻곤 했다.

창고 끝자락에 오자 또 다른 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 왕은 힘껏 문을 열었다. 와르르 쏟아진 햇살에 눈이 시렸다. 눈을 한 번 깜박하자 믿지 못할 풍경과 마주한다. 실로 대단했다. 창고 밖에는 100여대의 자동차가 펼쳐져 있다 . 올즈모빌사(oldsmobile)의 ‘커브드 대쉬(curved dash)’ 배기량 1600cc에 최고 속력 36km/h. 세계 최조의 자동차 양산업체의 제품. 디트로이트에서 뉴욕까지 1,400km를 단 7일 만에 완주해 미국인들을 놀라게 한 바로 그 차였다. 이 차는... 스파이커(spyker) 4WD. 세계 최초의 사륜구동 차. 1907년 역사상 처음으로 동서양을 달려 장장 16,000km의 북경과 파리를 횡단한 그 차다. 헨리포드사의 차들도 연도별도 있었고, 뷰익의 초기 모델에서부터 캐딜락, 올즈모빌, 시보레, 부가티까지. 구하기 어려운 신형 차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왕은 긴 수염을 쓰다듬는다. 흡족함의 표현이다.


장편소설 '황금벌레' 내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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