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쓸모
니체는 하나의 진실 또는 진리가 아닌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 즉 진실 또는 진리들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록 진실 또는 진리가 허구이며 참세상이라는 거짓말도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법은 공정과 정의를 기준으로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하나의 진실에 손을 들어야 하고 그 진실에 의해 무언가는 거짓이 되고 무언가는 진실이 된다. 사회의 질서유지라는 차원에서 법에 부합하는 진실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진실이어야 할까?’ 법 앞에 하나의 진실로 귀결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진실의 쓸모 또는 유용성에 따라 참과 거짓을 정하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까. 판정의 기준이 되는 공정 또는 정의가 진실을 향한 의지, 의도, 이해, 믿음 등 수많은 사유의 교차에 의한 형성물로 대체 또는 재정의 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첫 문장,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하는 속성을 지닌다.”에 내재된 선험적으로 주어진 진실에 관해 알고자 하는 의지가 아닌, 살아남은 자를 위한, 죽은 자에 대한 배상을 담은, 지층에 따라 변화하고 생성하는 진실의 쓸모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비록 협소한 지식과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지만, 내 사유의 틈이 되어준 영화 『추락의 해부』를 분해하고, 흩어진 조각을 바라보다 다시 맞추는 과정을 통해 스미듯 던져진 질문, ‘진실의 쓸모’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사무엘의 추락에 의한 죽음에 접근한다. 사무엘이 추락한 시간, 하얀 눈 덮인 산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에 있던 사람은 아내 산드라와 그녀를 취재 하던 대학원생 조에 그리고 4살 때 일어난 사고에 의해 앞을 보지 못하는 11살 아들 다니엘과 시각 장애인 안내견, 스눕이다. 영화는 계단 위에서 공이 가볍게 튀어 내려오며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진 공을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르는 스눕의 뒷모습이 이어진다. 작가 산드라는 조에와 인터뷰 중이다. 조에는 산드라에게 실화가 독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는데도 오직 경험한 일만 써야 하는지 묻는다. 산드라는 그래서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고, 독자가 자신이 쓰는 책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한다. 조에는 산드라에게 창작의 목적이 허구와 진실의 구분인지 묻는다. 산드라는 사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사무엘이 다락방에서 작업하며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점점 커져 인터뷰를 진행하기 힘들어 인터뷰를 마친다. 조에가 집을 나설 때 다니엘도 스눕과 산책을 나간다.
다니엘은 산책에서 돌아와, 무언가 다급한 듯 느껴지는 스눕에게 이끌려 하얀 눈 위에 붉은 피를 흩뿌리며 누워있는 아버지 사무엘의 주검과 마주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다니엘과 침착하게 신고하는 산드라, 대조적으로 주검 앞에 엎드린 스눕의 눈동자….
카메라는 이어서 스눕의 시점을 따라 사건 현장으로 접근한다. 사무엘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다락방으로….
사무엘의 직접적 사망원인은 왼쪽 관자놀이 혈종, 추락하면서 부딪혔거나 추락하기 전 강하게 휘두른 둔기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법의학적 사인은 사고 또는 의도가 개입된 사망이다. 사고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면 산드라는 용의자가 된다. 구체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혈흔은 추락사가 아닌 의도가 개입된 사망의 증거로 이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울기만 하는 다니엘, 예전처럼 살아야 한다고 달래는 산드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쟁이를 만날 것을 제안하는 다니엘의 대모 모니카. 다니엘의 나이를 고려해 법정에 나가는 것을 말려보지만 이해해야겠다며 법정에 나가겠다는 다니엘. 검사는 사건 당시의 정황을 다니엘에게 질문하고 증언의 명증성을 위해 사고 또는 사건의 상황을 재현한다. 시각이 아닌 촉각과 청각을 활용해 기억을 되새기던 다니엘은 진술을 번복한다.
산드라는 자신의 변호사에게 자신이 결백하다고 말한다. 변호사는 구체적 단서가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인지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4살 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사무엘은 글을 쓰느라 다니엘을 늦게 데리러 갔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사고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죄책감과 산드라의 질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무엘은 교수이자 작가로 글을 위해 녹음을 해왔다. 법정에서 그 녹음파일은 증거로 제시된다. 법정에서 녹음파일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산드라 가족의 재정문제, 젠더 갈등 등 가족사는 공개되고,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미디어의 관심을 자극하고 세상에 공개된다. 미디어는 점점 그들 삶을 조망하여 방송과 기사로 다루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미디어의 관심이 점차 확산되며 대중들의 관심 또한 커져간다. 녹음파일에는 아내는 유명한 작가인데 작가이자 교수인 사무엘은 자신이 무명작가인 것에 좌절하고, 아내가 자신의 글을 표절했다고 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파일에는 그들의 격렬한 다툼의 흔적 또한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무엘을 상담했던 정신분석의학자는 법정에서 산드라가 사무엘을 무시했으며 사무엘은 상담 시간에 죄책감, 자책에 의해 감정적 고조를 토로했다고 말한다. 검사는 산드라의 책에 담긴 글로 그녀를 압박한다. “허구가 현실을 부수도록 지난 흔적을 감추는 게 나의 일이다.” 법정의 증언들은 산드라를 점점 용의자로 의심하게 만든다.
증거물이 아닌 진실에 대해 가장 중요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니엘이다. 법무부에서 다니엘의 증언을 보호하기 위해 베르제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한다. 베르제르는 다니엘에게 증언의 진실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심리·정신의학자는 다니엘의 청각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산드라는 다니엘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는 더 이상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은 이미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듣고 극복하겠다고 말한다. 모두의 법정 증언이 마무리된 순간, 판사는 다니엘이 마지막 증언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놀라는 산드라. 마지막 증언이 있기 전 주말, 다니엘과 산드라는 접촉할 수 없다. 다니엘은 베르제르에게 엄마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베르제르는 가장 중요한 건 다니엘의 기억이며 판단을 위한 정보가 부족할 때는 파고드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으니 그냥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질문한다. 믿음을 지어내야 하는지, 확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한 척을 해야 하는지…. 베르제르는 말한다. 그냥 결정을 내리라고….
마지막 법정에서 다니엘은 말한다. 엄마라면 이해가 안 가지만 아빠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엄마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 정보가 부족하면 정황을 봐야 한다고. 이해가 안 되면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 이어서 다니엘은 스눕이 갑작스럽게 아파서 사무엘과 함께 병원을 향하던 차 안에서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무엘은 말한다. 스눕도 아플 수 있고, 죽을 수 있다고. 스눕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는지. 늘 남들만 챙기다가 피곤할 수 있고, 못 견디겠다 싶을 때가 있다고. 떠나고 싶을 때는 떠나야 한다고. 힘들겠지만 각오해야 한다고. 그래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고. 다니엘은 그것이 스눕이 아닌 아빠 이야기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과거 사무엘의 자살 시도를 지각했던 것을 스눕을 통해 재현한 것과 사무엘의 과 차 안에서 나눈 사무엘과의 대화가 사무엘의 자살의 정황이라고 말한다. 재판은 다니엘의 증언에 의해 산드라의 무혐의로 끝난다. 무혐의를 자축하는 식사자리에서 산드라는 변호사에게 말한다. 이긴 것에 대한 보상이 없다고.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산드라. 그리고 거실에서 잠든 다니엘. 산드라가 다니엘을 안고 올라가 침대에 눕히자 잠에서 깬 다니엘은 울면서 웃는다. 엄마가 오는 게 겁났다고. 산드라도 겁이 났다고 말한다. 잠든 다니엘을 뒤로하고 자신의 침상에 눕는 산드라와 그녀 곁에 조심스레 몸을 누이는 스눕. 영화는 어둠 속에 산드라와 스눕이 누워있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재판에서 다니엘의 증언이 받아들여졌으므로 사건의 진실은 사무엘의 자살로 귀결된다. 사무엘이 자살한 것이라면 사무엘을 자살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사무엘을 상담했던 정신분석가 말대로라면 다니엘을 향한 죄책감과 산드라에 의한 모멸감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무력감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누군가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어떻게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사무엘의 자살이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사회적인 성취에 부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본다면 인정의 욕구라는 인간의 본성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인정의 욕구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일까? 신경 호르몬의 순간적 과잉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 영화 속 또 다른 진실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니엘의 감각적 지각은 사실일까.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의 서사를 창작한 것일까. 그러한 진실의 서사가 사실이 아니라면, 다니엘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거짓이라 말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진실은 산드라와 스눕이 알고 있는 것일까. 시작과 끝 어디에도 확실성과 명료성을 제공할 메타적 시선은 없다. 증거와 증인의 말 그리고 그것을 조합한 정황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야 할 뿐이다. 산드라를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의 증언이다. 다니엘은 증언의 신빙성을 위해 사건이 일어난 공간에서 사건이 발생한 시간의 상황을 촉각과 청각적 기억에 의존해 재현해야 한다. 또 하나의 증거는 사무엘과 산드라의 다툼의 음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다. 구체적 증거 없이 오직 사무엘이 녹음한 음성파일과 다니엘의 감각에 의존한 기억으로 정황을 파악하여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확실성과 명료성을 제시해야 한다.
추락의 해부를 통한 죽음의 진실 찾기를 따라가다 보면 국가 권력 기관인 법정과 미디어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위계에 의문점을 갖게 한다.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엇이든 공개해야 하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사가 되는…. 미디어는 유명작가였던 산드라의 추락에 열광하며 시청자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법원 앞을 대기하며 소식을 전한다.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알고자 하는 의지에 쾌락을 제공하는 일로 전락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이렇게 말한다.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한 일이다. 이것은 실로 냉혹한 명제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역사는 그렇게 가르친다.” 미디어가 속도를 자랑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권력의 뒤에 자리 잡은 막강한 능력을 가진 자본의 위력으로 치부해야 할까. 미디어의 쓸모는 무엇일까. 부정적인 쓸모가 아닌 긍정적인 쓸모는 무엇일까. 억울한 고통의 배상에 대한 진실, 불공정에 관한 진실의 쓸모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녹음파일에는 산드라가 유명한 것에 대해 사무엘이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 무력감의 표현과 산드라의 사무엘을 향한 폭행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법정에 선 검사는 사무엘의 갈등을 성역할의 위계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산드라의 양성애라는 성적취향 또한 산드라를 도덕적 결함을 가진 것으로 몰고 간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산드라의 자신감 넘치는 몸짓과 말투는 재판정에 울려 퍼지는 사무엘의 녹취파일에 흩어지고 자취를 감춘다. 사건의 진실이 아닌 사회적인 위계에 산드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다니엘이 당한 사고는 사무엘의 죄책감의 원인이자, 산드라가 사무엘과의 관계에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다. 산드라와 사무엘에게 다니엘은 보호의 대상이자 삼각관계 구도의 중심이었다. 사무엘의 추락에 의해 다니엘은 삼각관계의 중심이 아닌 새로운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다니엘은 자신의 감각기억을 소환해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진실을 구성해 나간다. 흐느껴 울기만 했던 다니엘은 점차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다. 다니엘에게 있어, 중첩된 일련의 사건에 의해 마주한 한계는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다니엘은 더 이상 무력한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모습으로 단순한 기억의 재구성을 넘어 ‘왜’라는 질문으로 진실의 서사를 완성한다. 이러한 진실의 서사를 주체화를 향한 수행적 의미 또는 진실의 쓸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의 주된 무대는 눈 덮인 산장 위의 집과 재판이 열리는 법정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법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기 시작했을까. 왜 우리는 법의 판결에 무조건 복종해야 할까. 법의 기원은 무엇일까. 상고기 법은 소송 당사자의 배상과 분배에 관한 것이었고 제3자는 배상과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점차 제3자는 개인을 보호하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진실을 규정한다. 진실은 배상보다 참과 거짓,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가 된다. 미디어와 법이 가진 힘은 진실이 되어 한 사람을 추락시켜 버리기도 한다. 지금 여기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크고 작은 집단에서 다양한 분쟁과 시련을 마주한다. 그 시련의 장에서 모두의 진실을 반영한 진실이란 존재할까. 우리는 각자 자신을 배려하고 나아가 상생할 수 있는 진실의 서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푸코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과잉’과 ‘적도’였다. 매일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에 관한 소식들, 기술의 발달, 그리고 다양한 사회의 현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과 해석들…. 빠르게 돌아가는 놀이기구에 탑승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 다른 진실의 과잉에 적도와 적당한 균형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수많은 진실이 소외되지 않고 어떻게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을까. 쓸모로 진실에 위계를 정해야 할까. 쓸모 있는 진실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