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내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에게 말을 거는 대로, 시선이 머무는 문장을, 끝을 알 수 없는, 사후적 해석만이 기다리는, 미지의 퍼즐을 상상하며,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나가듯 디디에 애리봉의 사유가 담긴 문장을 나열한다.
나는 외국 여행을 하다가 때때로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곤 했는데, 이는 아주 가느다랗게라도 인연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다(11).
애도와 멜랑콜리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보다 사회학의 용어들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구조화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화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는 상이한 두 세계, 매 순간 공존하는 이 두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발생하는 어떤 불편함,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분열된 하비투스’와 결부된 멜랑콜리가 의식에 떠오르게 된다. 기이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단지 진정시키려고만 해도, 이 은밀하고 흐릿하던 불편함의 윤곽은 훨씬 뚜렷해지고 한층 깊어진다(14-15).
아버지와 나는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다. 어떤 것도 그와 나를 이어주지 못했고,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 나는 사람이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신의 과거와 그 과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이들에게 등을 돌린 채 자기 자신을 발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해방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헌신은 일종의 의무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였다(16-17).
롤랑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뒤에 매일매일의 절망과 고통을 기록했다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엇인가. 내가 느낀 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질문에 의해 촉발되었다. 사회적 숙명, 사회의 계급적 분화, 사회적 결정요인들이 주체성의 구성에 가져오는 효과, 개인 심리, 개인들 간의 관계 등에 관한 질문이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각자가 가장 심층적인 진실 가운데 하나로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개인적 계보학은 사회적 고고학이나 위상학과 분리불가능하다(20-22).
오늘날 열등화된 주체의 구성 및 그에 수반되는 자기 침묵과 지기 ‘고백’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구성에 대한 연구는, 섹슈얼리티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며 심지어 동시대 정치의 틀 안에서 요청되기까지 하는 데 반해 민중계급이라는 사회적 출신과 관련된 연구는, 아주 어렵고 나아가 다양한 범주의 공공 담론 속에서 거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24).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의해 어떻게 ‘비체’인 존재가 되는가? 나는 내 책들에서 수치의 인류학을 개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와 저항, 예속화와 주체화의 이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모든 시도는 성적 하비투스와 계급 하비투스의 접합이라는 문제와 맞부딪칠 수밖에 없지만, 내 책은 사회적 주체화가 아닌 성적 주체화에 할애된 것이었다(25).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제임스 볼드윈의 아름다운 글 한 대목이 마음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33)
아버지의 삶과 인격, 주체성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 이중적으로 기입됨으로써 결정되었는데, 그 시공간의 견고함과 제약은 서로 결합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개인의 성격적 특징은 심리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아주 정확하게 위치 지어진 세계-내-존재의 효과이다(37).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들은 각 세계의 내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없는지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상상하고 지각하도록 규정한다. 이는 단지 사물의 질서일 따름이며, 그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질서의 작동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대해 내려다보는 시각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엄혹한 논리를 벗어나 기회와 가능성의 불평등한 분포라는 끔찍한 불의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구획선의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55).
이론의 힘과 매력은 ‘행위자’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는 말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개인과 집단들이 그들의 존재와 행위를 다른 식으로 보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려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문제는 체화된 지각 범주 및 제도화된 의미 틀과 단절하고 그것들이 벡터로 작용하는 사회적 관성과 단절하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야 우리는 세계에 대한 시선을 발명해 내고, 나아가 새로운 정치적 관점을 열 수 있다(56).
나는 부모님과 같이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분리해내야 했다(66).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 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는다(98).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궤적이 이 정도까지 갈라지면 다시 교차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는 또한, 부르디외가 잘 보여준 것처럼 가족이 안정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략들의 총체임을 드러낸다(104).
원초경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심리학적이거나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로 이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면, 주체화 과정으로 향하는 시선이 탈사회화·탈정치화된다. 즉, 사회계급의 삶과 연관된 문제를 가족주의적 극장이 대체해 버린다.
그보다는 사회적인 거울단계라고 일컫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기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일정한 유형의 행동과 실천이 펼쳐지는 환경에 대한 소속 의식이 확보된다. 하나의 자리와 정체성을 지정하는 계급의 사회학적 상황을 발견함으로써 일어나는 사회적인 –심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호명의 장면. 우리가 되어야 하는 타자에 의해 되비쳐진 이미지를 매개로 한, 우리의 현재모습과 미래모습에 대한 자기 인지….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라는 주문. … 원초적인 내 사회적 정체화(자기를 자기로서 인지하기)는 거부된 정체성에서 끊임없이 힘을 얻는 탈동일시에 의해 교란당했다(107-109).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 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112).
예술에 대한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나는 배워서 얻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 다른 사회계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내 출신 계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자 자신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재교육의 일부였다(120).
내 두 동생은 우리 부모님보다는 더 나은 조건으로 올라섰다. 그러한 요인들 가운데는 특히 자발적인 탈교육과 그로 인해 한정되는 일자리 유형 및 직업 경력이 있다. 이 좁은 범위의 직업적 가능성은 교육제도가 배제한 이들에게 그들 스스로 이러한 배제를 선택했다고 믿게 만들면서 주어진다(133).
학교는 피지배자들에 맞선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 가운데 하나다. 교육자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질서의 힘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 그 질서는 은밀한 동시에 모두가 볼 수 있게 작동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것에 맞서서 부과된다(139).
존엄성은 그 자체 취약하고 불확실한 감정이다. 그것은 신호와 보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통계나 회계파일 속의 단순한 요인이나 무시할 만한 양, 그러니까 정치적 결정을 말없이 감수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요구한다(151).
낙인이 찍힌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심하게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타자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를 우회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에 대해 가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 그러니까 자기만의 시선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167).
다음과 같은 과제가 사회운동과 비판적 지식인에게 주어진다. 사회체 내에서, 특히 민중 계급 내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열정을 없애지는 못 할지라도-이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최대한 중화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175).
문화가 ‘구별짓기’의 벡터, 즉 자신과 타자의 차별화, 타자에 대한 거리 두기와 제도화된 격차의 벡터이기에, 문화에 대한 애착은 매우 중요한 주체화 양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 양식은 그의 ‘차이’에 버팀목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게 해 주고, 그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 주며, 그의 출신 환경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에토스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187).
우정도 역사라는 중력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친구는 얼마나 친밀하든 간에,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하비투스의 관성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힌다(195).
나는 나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의해 선택당한 것이었다. 아니 포획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201).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204).
모욕은 과거로부터 나온 인용이다. 그것은 이전에 수많은 발화자에 의해 반복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장 주네의 시구가 잘 표현하고 있듯, 그것은 “시대 깊숙이에서 온, 현기증 나는 단어”이다. 그런데 모욕어는 또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들과 거기 담겨 있는 폭력이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따라붙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226).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모욕은 부차적이며, 욕망이 일차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다름 아닌 욕망에 관해서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욕이 규탄하는 욕망을 느끼기 때문에 모욕의 대상이 된다(229). 모욕은 세계와 타자에 대한 관계의 지평을 구성한다. 세계에서의 존재는 사회적 시선과 발화에 의해 열등화된 존재로 현실화된다. 이것들이 매일매일의 정신 작용과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다(233-234).
왜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증오에 그토록 열중하는가? 왜 어떤 범주의 인구집단은 무엇이 그 저주를 고취하고 끈질기게 되살려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저주라는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서라면,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 말고는 다른 대답이 없다. 카프카의 『소송』에서처럼, 이러한 판결을 내린 법정을 찾으려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부를 두고 있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세계에 도착한다(250).
이브 코소브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우리 안에 상당 부분 현존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257).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불가능한 ‘해방’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주네에 관한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내겐 핵심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내 존재의 원칙을 구성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으로서의 수행의 원칙(258).
사실상 나는 두 가지 사회적 판결, 즉 계급적 판결과 성적 판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를 결코 빠져나가지 못한다. 내겐 여전히 계급적 판결과 성적 판결의 인장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 삶의 어떤 순간에 그것들은 서로 충돌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맞세우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발명해야 했다(259).
꿈이 있다. 그리고 현실이 있다. 이 둘을 일치시키는 일은 집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호적인 상황 역시 갖춰질 필요가 있다(270).
우리 존재는 복수의 집합적 결정요인,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예속화 양태들이 교차되는 것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상이한 지배 양태에 대항해 이루어지는 상이한 전투 가운데 어떤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모든 운동이 사회 세계의 분할과 관련해 그것이 갖는 특수한 원리를 일차적이고 우선적으로 부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만약 우리를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담론과 이론이라면, 이런저런 측면들을 간과하지 않게 해주는 담론과 이론, 즉 어떠한 억압의 차원도, 어떠한 지배의 층위도, 어떠한 열등성의 할당도, 모욕적 호명과 연계된 어떠한 수치심도, 지각과 행동의 장 바깥에 내버려 두지 않도록 해주는 담론과 이론을 구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치 무대에서 들어본 적 없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목소리와 새로운 문제들을 떠안는, 모든 새로운 운동을 환대할 채비를 갖추게 해주는 이론 말이다(276).
랭스에서 태어나 랭스로 되돌아가는 여정이 끝을 맺는다. ‘나’를 있게 한 기원,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되돌아가야 할까….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