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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16. 2019

사랑 여행기 [랑카위 편]
휴양지 문화

인생은 긴가 짧은가.

"앞으로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 조용히 속으로 묻고 있는 지금."


 휴양지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고 나면 인간이 왜 나태해지는가에 대한 근거를 얻을 수 있다. 나태함은 정말 좋다. 톨스토이는 '전력을 다해서 시간에 대항하라.'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젊은 날 도박 빚에 시달리며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어 그랬는지 모른다. 만일 그가 랑카위에서 생활을 했다면 이렇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시간에 대항하지 마라. 전력을 다 하지도 말고.'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으러 나가고 자고 싶을 때 낮잠을 자다가 산책하고 싶은 날씨가 되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한다.


 나는 그런 생활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특정한 생활양식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태한 하루에 자기혐오가 들지 않으려면 나태한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나태함을 좋아하지만 목표 의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살아가는 이곳의 일상 속에서 나태해질 수가 없다. 퇴근한 이후의 소중한 시간을 멍하니 보내 놓고 나면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주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특정지은 해야 할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뤄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래서 이따금씩 그런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어딜 가라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으라고 하지 않는 곳. 매일 가도 괜찮은 몇 군데 식당과 카페가 있고 질리지 않는 자연의 풍광을 곁에 둔 산책로가 있는 마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하루가 사랑스럽기 위해서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곳에서 진정 시간을 보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의 끝, 부드러운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밤,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랑카위 섬에서의 일주일을 도교도처럼 보냈다. 페낭에서 만난 푼은 랑카위 섬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액티비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만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빌리지도, 폭포들을 찾아다니지도 않았고, 일몰이 유난히 아름답다는 바다에 굳이 찾아가지도 않았다.

 몇 년 후 우린 다시금 랑카위 섬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제야 그런 활동들을 할 기분이 들었다. 

랑카위 CENANG BEACH의 일몰

 판타이 채낭 로드 중심에 'Tomato'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굉장한 곳이다. 믿기지 않지만 24시간 운영을 하는 곳이라 새벽에도 음식을 먹으러 갈 수 있다. 까만 밤벌레가 달라붙는 램프 아래서 식사를 하는 기분은 어디에 비교할 수 없다. 토마토는 적당한 가격 대에 인도 음식과 말레이시아 음식, 중국 음식과 양식까지 내놓는 엄청난 식당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곳에서 아침이나 점심, 저녁 혹은 야식을 먹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인테리어에 아무 데나 마구잡이로 펴놓은 플라스틱 테이블들이 인상적이었다. 


 매대 뒤쪽으로 조리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데 특히 로티 차나이를 굽는 요리사들은 인상적이다. 로티 차나이는 말레이시아식 빵 요리로 (ROTI는 빵이란 뜻), 한 줌의 밀가루 반죽을 떠서 철판 위에서 손으로 꾹꾹 눌러 원형으로 넓게 펴준 후 연유나 누텔라, 계란, 양파 등을 토핑 하여 인도식 카레 소스나 삼발(매운 말레이시아 양념) 소스와 곁들여 먹는 요리다. 아침이나 야식으로 로티 차나이를 먹고 있으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메인 메뉴로는 양고기 브리타니(노란색 인도식 볶음밥)가 특히 기가 막혔다. 카레 양념이 짙게 밴 양고기 큐브와 밥을 섞어 조물조물 한 입 거리를 만들어 씹으면 아주 황송한 기분이 든다. 


 여자 친구는 로티 차나이의 환상적인 맛의 깊이를 조용히 음미하더니 말이 없어졌다. 나는 신비한 매력과 위험하고 뻔뻔스런 호기심, 이 저녁 공기의 몸을 만지고 싶은 야릇한 갈망을 견디기 위해 감각들을 흘려보냈다. 

 여자 친구가 갑자기 침묵을 깨며 말을 꺼냈다.

 "이 토마토 가게를 한국에서 프랜차이즈화 시키면 어떨까?"

 "망할 거야." 내가 대답했다.

 "왜? 우린 맨날 오잖아."

 "그건 우리가 판타이 채낭에 있기 때문이야."

 "그럼 만약 토마토가 한국에 있으면 가지 않을 거야?"

 그녀의 물음을 듣고 한국에 있는 토마토를 상상해 보았다.

 "우린 갈 테지만, 토마토에 추억이 없는 사람들은 가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곱씹었다. 

 "맞어. 그럴지도 몰라. 갑자기 그런 글귀가 생각나. 추억은 마음이란 앨범에 담아두는 사진 같은 거라고 했어."

 "토마토의 프랜차이즈화를 얘기하면서 떠올릴 글귀는 아닌 것 같은데."

 몇 년 후 채낭 해변의 토마토 레스토랑 자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토마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미 그곳은 우리에게 아무 추억이 없는 맛대가리 없는 식당이 되고 말았다. 한 번을 다시 찾아갔을 뿐, 그 후론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휴양지 문화라는 꽃은 말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뿌리는 바닷속 깊이, 꽃은 산 꼭대기 더 높이 올라간다. 마치 나태함이 아름다운 영혼이 된 것 같다. 그 이유로 사람들의 조바심과 인색함은 힘을 잃고, 세상과의 가장 격의 없는 조화가 일어난다. 거기에 따라 우리는 평소에는 보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을.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와 밤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광경을. 

촛불을 켜 둔 CENANG BEACH의 밤

 채낭 해변 백사장에 비치 타월을 깔고 누워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주변엔 횃불을 밝히고 모래 위에 빈백과 비치 베드를 늘어놓고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휴양지가 사랑하는 밥 말리 음악이 흐른다. 이처럼 텁텁한 모래를 가장 촉촉한 음악으로 바꾸는 능력이야말로 휴양지의 셀 수 없는 매력 중 으뜸인 하나이다.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거야?"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나답게 흘러야겠지. 아직 난 자신 있어. 너는?"

 "그냥,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이 기대했던 것보다 크고 걱정했던 일들이 걱정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 생각을 바탕으로 나도 오빠처럼 흘러가야겠지." 

 "아직 자신이 있어?"

 "아직은 자신 있어."

 우리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여행이든 연애든 인생이든. 


 아름답게 빛나던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모든 근심 걱정이 내게서 멀어지던 순간, 이대로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고개를 돌린 너의 눈에 백색의 태양 빛이 머물고, 쉴 새 없이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작은 희망에 나는 바다와 같이 일렁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

내가 사랑하는 시간

내가 '사랑'을 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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