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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13. 2019

사랑 여행기 [랑카위 편] 동질감

고삐 풀린 독수리 섬, 랑카위

 "시간을 잡아 흠씬 두들겨 패서 아주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놓고 싶다."


 어느 날 랑카위의 한 좁은 골목에서 갑자기 환락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은밀한 광경이 펼쳐졌다. 강렬한 마리화나의 냄새가 풍겼고 술병이 나뒹굴었다. 말레이시아가 거대한 마구간이라면 랑카위는 고삐 풀린 흥분한 말이다. 


 태국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말레이시아 최북단에 쿠알라 펠리스(Kuala Perlis)라는 이름의 타운이 있다. 지역 내에서는 두 번째로 큰 타운이지만 랑카위 섬으로 향하는 선착장 빼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쓸데없이 넓은 도로를 끼고 쿠알라 펠리스 버스 터미널이 멍청하게 서 있다. 거기서 20분가량 바다 쪽으로 걸어가야 랑카위 섬으로 향하는 페리를 탈 수가 있는데, 1시간마다 배가 출항하고 섬까지 1시간이 걸린다. 

 휴양을 하러 온 현지인들, 노란 머리에 유니폼처럼 스윔 팬츠를 입고 다니는 서양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배 안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했다. 


 배가 정박하자 형형색색의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행렬에 이어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바지런히 지나갔고, 곧 사라졌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나는 열심히 선착장의 사진을 찍고 있는, 열성적인 사진작가의 기질을 타고난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들은 것처럼 엄청 좋은 덴가 보지."

 불시착. 그 단어만큼 현실은 멋지지 못하다. 

 

 산호초에 둘러싸인 맑은 바다우거진 늪지대, 맹그로브 숲을 고루 갖춘 낙원, 랑카위. 독수리의 주요 서식지, 독수리 섬 랑카위. 오염되지 않은 말레이시아 유일의 섬, 랑카위. 

 며칠간의 밝은 태양과 내리쬐는 더위, 그것을 막을 길 없는 넓은 백사장의 모래들. 그곳을 스치는 바닷바람과 끈적하게 달라붙는 짠 공기는 우리가 즐겼던 모든 것이었다.

 불안한, 불온한 감정들이 저수지에서 냇물처럼 흘러나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배설을 하듯 그 더러운 것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낱 동물인 것을. 내일은 다시 쌓여만 갈 것이다. 

 


 택시를 타고 어쨌든 판타이 채낭으로 향했다. 말레이어로 판타이(Pantai)는 해변을 뜻하므로, 채낭 해변으로 가면 여행자의 거리가 있다고 들었다. 

 채낭 해변은 그리 길지 않고 그에 따라 형성된 거리도 단순한 구조를 띤다. 해변을 끼고 길게 이어진 한 줄의 굵은 동맥 같은 길. 길의 양옆으로 늘어선 단층짜리 가게들. 식당과 기념품샵, 술을 파는 슈퍼마켓들과 헌책방을 위시한 잡화점들. 가게들 사이 뻗어나가는 모세 혈관 골목들. 


 우리 둘은 그 숨겨진 환락의 마을 초입에서 내렸고, 붉은색과 노란색 불빛이 일렁이는 길을 걸어 나갔다. 새우와 바닷가재가 숯불 위에서 빨갛게 익어가고 로티 차나이(말레이시아식 크레페)가 달콤한 연유를 머금을 채로 노릇노릇 구워졌다. 술 냄새, 담배 냄새, 음식 냄새가 뒤엉켜 있다. 


 테라스 딸린 멋진 숙소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우린 [Rainbow lodge]라는 호스텔의 작은 방 한 칸에 짐을 풀었다. 조명 아래 도마뱀이 기어 다니는 곳. 천장에 붙은 선풍기 한 대가 외롭게 돌아가고 있는 정사각형의 무지갯빛 시멘트 방. 이미 괜찮은 숙소들은 하나같이 다른 여행자들의 차지였고 못내 아쉽지 않을까 하고 여자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내일이라도 괜찮은 숙소를 다시 찾아보자." 내가 말했다.

 "아니! 여기도 너무 좋은데. 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녀가 짐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으며 대답했다.


 숙소를 빠져나와 식사할 곳을 찾기 위해 흙길을 걸었다. 듬성듬성한 야자수 사이로 초원이 펼쳐졌고 열댓 마리 소들이 풀을 뜯고 노는 모습을 보았다.

 흙먼지 속에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고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할수록 나라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일의 최선보단 오늘의 차선이 나은 선택이다. 

 사람 사이의 이질감이 그렇듯이, 사람 사이의 동질감도 생각보다 상당히 쉽게 얻어진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에게 본능적인 거리감을 느끼듯이,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에겐 운명적인 동료애를 가지게 된다.

 

 우리의 저녁 식사는 완벽했다. 어디서 무엇을 먹느냐는 누구와 먹느냐에 비하면 문제 거리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연인을 넘어서 이상적인 여행 파트너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몇 차례의 피할 수 없는 굴곡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도 그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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