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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11. 2019

사랑 여행기 [페낭 편] 대탈출

페낭 국립공원 대탈출

"완벽함을 찾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저 내버려두어도 터져버릴 듯한 젊음. 내 생애 한 여자와의 연애 행각. 바라는 모든 것들을 빅뱅의 시작처럼 함축하고 있는 순간."


 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유머'다.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이유로 유머를 잃는다. 안 좋은 상황이 겹쳐서, 지치고 힘들어서, 짜증이 나서 유머를 잃는다. 40도씨가 넘어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아껴둔 물을 몇 방울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오히려 모래 위에 엎질러 버리는 격이다.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잃어버린다. 

 가령 모터보트를 타고 넘어가고 싶은데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서 짜증이 나 있는데 돈에 환장한 뱃사공을 만나니 열이 받는다. 왜 이리 비싸냐며 따지고 실랑이를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페낭 국립공원의 거북이 해변에서 원숭이 해변으로 향하는 스피드 보트에 올라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마치 크루즈 여행을 하는 것 같군."

 그녀가 비꼬듯이 웃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작고 시끄러운 크루즈가 있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똑같지."

 "그래도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 비싼데." 그녀가 볼멘소리를 했다.

 "오늘은 사치를 부리기로 한 날이잖아."

 "우리가 언제?"

 그녀는 웃으며 먼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스피드 보트는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바닷길을 가로질러 나간다.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가파른 해안 절벽을 이루고 있는 해안가. 보트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 절벽 가까이에 붙는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사이로 앉아서 쉬고 있는 독수리들이 보인다.

 중국의 한 마을에서는 독수리를 보면 반드시 쫓아내거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필히 도망치고는 한다. 독수리는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다. 그들은 독수리가 하늘을 지배하는 검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인간의 삶에 신비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긴다.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발생한다거나, 잘 될 수 있었던 일들이 망가진다거나 하는 불길한 영향. 

 나는 독수리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까마귀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까마귀를 불길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이건 중국의 한 마을의 이야기야." 내가 대답했다.

 "독수리는 별다른 나쁜 짓을 하지 않잖아?" 그녀가 되물었다. 

 "까마귀도 그다지 악행을 하진 않지 않나? 까마귀한테 안 좋은 일을 당한 적이 있나?" 

 "까마귀를 보면 왠지 기분이 나쁘잖아. 까맣고, 울음소리도 그렇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진심으로 웃음이 났다. 중국의 그 마을에서 왜 독수리를 보면 기겁을 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똑같은 미신이 아닌가?"

 "이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그녀가 걱정했다.

 "다행히 여기는 말레이시아라는 거지. 여기서는 독수리가 행운의 상징이야." 

 "그건 어디서 들었어?" 그녀가 나의 놀라운 주장을 따지고 들었다.

 "바로 이렇게 미신이 만들어지는 거야."

 스피드 보트는 유유히 스피드를 올려 얕은 바다를 가로지른 후 원숭이 해변에 도착했다. 함께 보트에 올랐던 대여섯 명이 차례로 보트에서 내렸다. 얕은 바닷물 위에서 하선해야만 했기 때문에 허벅지까지 바닷물에 젖었다. 나는 먼저 보트에서 내려 여자 친구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씩씩하게 보트에서 하선했다.


 우린 페낭 국립공원의 원숭이 해변을 배회한다. 나는 이 태초의 자연이 맺은 풍성한 열매를 즐긴다. 푸른 바닷물을 지나 하얀 백사장, 검은 바위산으로 뒤가 막힌 숨겨진 해변. 은밀한 여정 끝에 마침내 발견된 자연의 모든 비밀. 

 검은 털 원숭이들. 물병을 빼앗겼다. 


 해변엔 놀랍게도 몇 군데의 가게가 열려 있다. 하얀 캐노피 천막을 치고 드럼통에서 바베큐를 구우며 술과 음료수를 마신다. 나는 그 날 원숭이 해변 백사장이 햇볕 아래 구워지는 두툼한 양고기와 소고기의 냄새로 가득 찼던 것을 기억한다.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유행하는 팝 음악이 흘러나온다. 노란 스윔 팬츠만 입은 고수머리의 현지인들이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며 고기를 굽고 있다. 민 머리의 근육 투성이 늙은 서양인 여행객은 현지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뭐라고 말을 건다. 그는 왼손에 초록색 맥주병을 들고 있다. 말레이인들은 너그럽지만 예의를 모르는 주정뱅이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숭이 해변에서 먹었던 양고기 큐브 스테이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양고기 음식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접시를 시켰다가 눈이 동그레져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다음 한 접시를 더 주문했다. 육즙이 목구멍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곳이 왜 원숭이 해변이냐면, 무서운 원숭이들이 바글바글 하기 때문이다. 

 원숭이가 뭐 그리 무서운가 싶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면 얘기가 다르다. 심지어 수십 마리다. 그 뒤나 옆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원숭이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고양이든, 수십 마리의 사슴이든, 숲길에서 갑자기 동물의 무리가 당신을 주시한다면 굉장히 당황스럽고 두렵다.


 페낭 국립공원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길, 쓰러져 있는 거대한 나뭇가지를 간신히 뛰어넘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을 맞닥뜨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숭이들은 일제히 고개만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원숭이들도 당황한다. 나는 뒤따라 나뭇가지를 넘어온 여자 친구를 본능적으로 막아서지만 몸이 떨린다.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무리의 대장격인 원숭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한다. 그놈들이 나와 내 여자 친구의 머리 위에 올라타 우리의 고개를 힘차게 꺾어버리는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용감하다는 게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원숭이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자" 뒤에 서 있는 여자 친구의 손을 꼭 잡으며 내가 말했다.

 "그래, 조심해. 손 꼭 잡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별 탈 없이 다시 원숭이 해변으로 돌아왔고 다행히 원숭이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양고기 음식점 점원이 다른 루트를 알려주었다. 알고 봤더니 그곳이 길이 잘 닦인 메인 루트였다. 그 길을 통해 우린 맨 처음 출발했던 양갈래 길을 지나 국립공원 사무소로 돌아갔다.

 둥근 천막 아래서 서커스를 보고 나온 기분이었다.

 

 페낭 조지타운으로 돌아가는 101번 버스 안에서 여자 친구가 멜로디가 떠오른 노래가 있는데 어떤 노랜지 기억이 안 난다며 내게 멜로디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귀에 대고 그 노래를 불러주다가 둘 다 곯아떨어졌다. 조지 타운 중심가 Komtar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하강하고 있었다.

 

 이튿날 올라야만 했던 서울행 비행기를 취소하는데 20만 원가량을 썼다. 대신 랑카위 섬으로 향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우리는 시작하는 연인이었고 겁날 게 없었다.

 함께 하고픈 마음이 현실적인 상황을 넘어설 때 연인은 아름다운 추억을 쌓는다. 그리고 현실적인 상황이 함께 하고픈 마음을 넘어설 때, 그제야 그것들을 진정 추억할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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