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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08. 2019

사랑 여행기 [페낭 편] 재발견

페낭 국립공원 약탈

"더 찾기 힘든 것은 호의보다도 그것을 진정한 호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죠."


 말레이시아 페낭 섬은 오래전 해적들의 본거지였다.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고 조지 타운(George town)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 동인도 회사를 운영하며 이 섬에 영국풍 건물을 짓기 전에는 열대 수풀림이 우거진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오래전 해적들이 우글거렸던 지역들은 천혜의 자연으로 각광받는 휴양지가 되어 '동양의 진주' '카리브해의 에메랄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이끈다.

 

 페낭을 두고 모두 다양한 문화에 대해 말한다. 다양한 문화라는 개념은 곧, 어딘가에 있는데 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일이다.

 말레이 해적들이 판치던 곳에 영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화교가 자리를 잡고, 인도인들이 자리를 잡고, 그곳에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과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으니 이보다 더 다채롭기도 힘들다.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전쟁하지 않고, 상대를 싸잡아 수용소에 가두지 않는 곳에 다양한 문화가 피어난다. 


 페낭을 걸으며 나는 지금 '페낭'이라는 독립된 나라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말레이시아 색채가 너무 강하면 다양한 것들이 모여 조화될 순 없다. 아직도 영국인이 동인도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을 것이다. 화교들은 적응할지언정 정복하지 않는다. 이제 페낭은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마치 해적처럼. 


 페낭 국립공원 입구에 섰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립공원. 그곳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발견한다면 곧바로 약탈을 자행할 것이다. 

 잠시 멈춰 서서 여자 친구를 보았다. 날씨가 더워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눈을 찌를 듯이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주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 위를 가려주자 그녀가 미소를 뗬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사악한 요정'이라고 불렀는데 그건 그녀가 사람의 넋을 빼놓기 때문인 것 같다. 


페낭 국립공원의 표지판

 

안개 낀 녹색 숲의 숨이 뻥 뚫리는 상쾌한 공기. 국립공원 사무소에서 나눠주는 트래킹 루트 지도에는 여러 길이 나와 있지만, 실상은 두 갈래 길로 나뉘게 된다. 푸른 바닷물이 들이치는 길을 따라 5분가량 들어가면 맞닥뜨린 운명처럼 양갈래 길이 나온다. 차갑고 완강하고 거친 선택의 기로. 한쪽으로 가면 원숭이 바닷가(몽키 비치)가 나오고 반대쪽으로 가면 거북이 바닷가(터틀 비치)가 나온다. 그 와일드한 기로가 참 좋다.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듯 알아보며 마음이 맞을지 궁금해한다. 딱히 의논을 할 필요도 없이 내가 그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턱을 들어 올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거북이 해변을 향했다. 

  



 만약 성악설이 맞다면 여행은 인간에게 내재된 악함을 중화시키는 중화제 역할을 할 것이고. 만일 성선설이 맞다면 여행은 그것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여행을 다니는 동안(항상은 아니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가장 선한 자신을 발견하며, 가장 너그럽고, 자신에 차 있고, 매력적인 동시에 잘 웃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한다. 그러다 보면 여행을 다니는 동안 미소가 아름다운 친절한 사람들이 스스로 다가오곤 한다.

 

 페낭 국립공원에서는 푼이라는 이름의 사나이와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났다. 그들은 우리가 나아가려는 길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길을 비켜 주었다. 몇 십분 가량 후 우리는 나무 평상이 놓인 휴식 공간에서 푼 일행을 다시 만났고, 말을 트기 시작했다.

 푼은 랑카위라는 섬에서 내륙으로 이주한 말레이인이었다. 그는 랑카위 섬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부모님을 따라 육지로 이동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차로 40분,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랑카위 섬에 닿을 수 있는 지역에서 살고 있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씩 섬에 간다고 했다. 

 "랑카위는 어떤 곳이지요?" 내가 물었다.

 "랑카위는 정말 멋진 곳이죠. 음......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고, 또 랑카위 섬에는 세금이 붙지 않아서 술이나 물건들이 엄청나게 싸단 말이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둘러보면 폭포나 산도 있고요, 물론 섬이니 바닷가는 당연하고……. 한 마디로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고 누워서 쉬고 싶으면 랑카위가 제격이지요."

 "그렇군요."

 나는 랑카위에 간절히 가고 싶어 졌다. 


 푼과 나는 그 뒤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의 어머니가 지난해 한국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한국음식에 환장해버렸다는 얘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얘기(그는 휴대폰 판매점 운영자였다), 이제 만난 지 1개월 된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

 수줍음이 많은 우리의 여자 친구들은 그동안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으며 제각기 시간을 보냈다. 푼은 영어를 곧잘 구사하는 말레이 지식층이었고, 그 사실을 여자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어 기분 좋아했다. 그가 나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여 우리는 거북이 해변까지 가는 길 위의 일행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푼이 뒤돌아 눈썹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주 멋진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너그럽고 여유가 있어요. 어디에서든 웃음을 찾을 수 있으니 확실하지요. 실상은 알 수 없어도, 이곳 사람들은 행복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예, 행복하지요. 사는 건 힘들어도 우리들은 웃고 지냅니다." 푼이 그렇게 말하며 바보처럼 웃었다.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무서운 힘에 둘러싸여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준을 맞추기 위해 한국에서 휴대폰 판매업자 백 명을 붙잡아 같은 주제의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푼과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가끔씩 내 기분이 우울감과 자신감 결여 사이를 오갈 때, 나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곤 한다. 모차르트가 아이티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작살을 들고 물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하나의 분위기이고, 그 분위기가 감도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치던 궁정도, 지금 여기 이 현대 도시도 행복의 분위기가 감도는 곳은 아니다. 내가 페낭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행복을 거머쥘 수 있었을까? 

 

 1시간 반 가량 선선한 수풀림 속을 걸으니 거북이 바닷가가 나온다. 이따금씩 바다 거북이가 찾아와 모래 구덩이를 파 알을 낳고, 그 자리를 모래로 슬며시 덮은 후 사라지는 장소가 있기 때문에 거북이 해변이다.

 선착장 역할을 하는 멋쩍은 나무다리가 황량히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해변. 거북이 생태 보호소 건물이 백사장 안쪽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건물도, 가게도 없다. 목이 타고 배가 고프다. 우리는 짧은 해변을 한 바퀴 걸은 후 나무 그늘이 진 서늘한 모래 위에 잠시 앉았다.

 "저 말레이 사람이랑 얘기 많이 했어?" 그녀가 은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 많이 했지." 내가 대답했다.

 "재미있었어?"

 "어, 재밌는 얘기 많이 했지. 특별한 말레이 사람이야."

 "나는 재미없었어."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멋진 곳에 와 있는데도?" 나는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우리가 앉은 데 밑에 거북이 알이 있다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바닥의 모래를 살살 쓸어냈다. 

 잠시 침묵 후 내가 말을 꺼냈다.

 "말동무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한번 이렇게 생각해봐. 우리가 지금 어디에 눈을 두든 그건 예외 없이 난생처음으로 보는 장면이고, 우리 둘만 아는 장면이라고. 내가 다음에 혼자 다시 오든, 네가 다음에 누군가와 다시 오든, 그땐 여기에 우리가 본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을 거고 이 풍경 어디 한 군데도 똑같진 않을 거야.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데도 이 풍경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와 나 둘 뿐이야……."


 가끔씩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거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느낌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가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말을 꺼내려고 하며, 그건 상대에 따라 차별적으로 달라진다. 즉 상대방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범위와 깊이가 결정된다. 상대를 잘못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자기 자신을 재발견할 수도 있다. 

 그녀는 내가 가진 느낌과 생각을 재발견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그와 같은 사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에게 마음에서 입으로 이르는 길은, 나보다는 훨씬 길고 굽이쳐 있었던 것 같다. 


 한동안 모래사장에 앉아 거북이 해변 선착장에 모터보트가 정박하고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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