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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Apr 05. 2019

사랑 여행기 [페낭 편] 오후의 잠

[Leave no trace principle] 흔적 남기지 않기 수칙

                                            "감정이란 그런 것이지요. 언어의 형태를 가진 마음."


 페낭 국립공원 입구에는 [Leave no trace principle]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아래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지금 확인해봐도 나는 흔적 남기지 않기 수칙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지켰다.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고, 야생 동식물도 해치지 않았고, 엄한 곳에서 캠핑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도 그곳을 방문했던 때를 생각하면, 흔적 남기지 않기 수칙을 어긴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페낭엔 확실한 내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녀가 손바닥을 비비자 만찬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현지인들처럼 아주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작은 접시가 잇따라 나오기 시작하자 둥그렇게 파인 짧은 스텐 숟가락과 초록색 플라스틱 젓가락을 손에 들었다. 한국에서는 메인 요리에 곁들여 다양한 밑반찬이 나온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우리가 주문한 음식만이 무심하게 접시에 담겨 나온다. 하나의 맛만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그녀는 여러 음식을 맛보기를 원했다. 

 나는 각각의 접시가 무슨 음식인지 따지지 않고 식사했다. 이따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호키엔 미야. 호키엔식 면요리라는 뜻 이래. 호키엔은 어딘가 지명 이름이겠지. 꼭 중국 지명 같다. 이게 달걀로 만든 면이래. 같이 볶은 새우가 정말 탱탱해. 근데 끈적끈적한 식감이 좀 싫다." 

"이건 양고기 나시고랭이래. 그냥 한국에서 먹던 볶음밥보다 조금 기름기가 덜한 것 같아. 밥알이 달라서 그런가? 봐봐, 여기 쌀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먹는 쌀 같지가 않고 길쭉하고 찰기가 없잖아. 그래서 볶으면서 기름이 날아가 버린 건가? 먹다 보니까 입이 좀 텁텁해져. 퍽퍽한 것 같아. 내 입맛엔 한국에서 먹던 게 더 나은 것 같아. 오빠는?"

 그런 다음 그 유명한 '모닝 글로리(공심채) 볶음'이 나왔다. 속이 비어있는 길쭉한 형태의 나물을 볶은 것인데, 특유의 간장 맛과 어우러져 밥반찬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아삭아삭 씹는 식감도 아주 좋다. 중간중간 편 마늘을 함께 볶아내기도 하는데, 굉장히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모닝 글로리는 정말 맛있어. 한식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먹지 않을까? 오빠는 한국에서 먹어본 적이 있어?"

 "아니." 나는 대답했다. "이건 이곳에서만 나는 맛일 거야."

 "한국에도 공심채라는 게 있잖아?"

 나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맥주병을 손에 쥐었다.

 "우리가 떠나온 곳에도 없는 것 빼곤 모든 것이 있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오로지 이곳에만 있는 걸 거야."

 톡 하고 터지는 술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여행을 다니는 거겠지?" 그녀가 거들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 요한 볼프강 괴테가 '인간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적은 구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뗬다. 

 "여러 이유로 여행을 다니는 거겠지요. 이유가 아예 없든." 


 그녀는 머리카락을 만졌다. 배가 부르자 그녀는 식곤증을 호소했다. 그녀에게 사물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푸짐한 점심 식사 후 페낭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101번 버스를 타기 위해 KOMTAR 버스 터미널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예정 따윈 집어던지고 잠시 숙소에 들러 낮잠을 잤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맞고 있는 그녀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검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재스민 향을 품은 중세 이슬람 하렘의 여자같이 고혹적이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녀가 말했다. "국립공원에 가기로 했는데 이렇게 낮잠을 자려고 오후 시간을 허비해버리겠네. 지금이라도 다시 나갈까?"

 그녀의 몸에서는 진짜 재스민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조금 이따가 가도 돼. 가지 않아도 되고. 거기에 도착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온 게 아니니까."

 "아니, 이따가 꼭 가자."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말했다. "가고 싶단 말야."

 그리곤 조금 있다가 둘 다 잠들었는데, 굉장히 행복한 낮잠이었다. 일어나니 날이 어둑해지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어서 다음 날 국립공원을 들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페낭 힐과 극락사, 보타닉 가든을 가지 못할 테지만 상관이 없었다. 어떤 선택이든, 그건 다른 선택지는 포기한다는 뜻이니까. 우리가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으면서 동시에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을 수는 없고, 낮잠을 자면서 국립공원을 걸을 수는 없으니까. 여행은 선택을 하는 동시에 선택 가능했던 다른 기회를 멋지게 포기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우리는 땅거미가 내려앉는 페낭의 조지 타운에서 멋진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페낭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101번 버스에 앉아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내 안에서 이동한 무언가를 느낀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고 어딘가로 옮겨갔다. 생각이란 언어의 형태로 된 마음이고 감정이란 내 마음이 지나가는 길이다.  나는 기뻤다. 즐거웠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글자의 형태로 내 마음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다.

 이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았고 머리로는 납득해도 마음으로는 납득하고 있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에서 납득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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