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
화려한 직장생활을 꿈꾸며 입사를 했지만 현실에는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가진 스펙과 능력 정도면 웬만한 일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주어진 일들은 매번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한 번은 보고자료에 들어갈 도면 자료를 한눈에 보기 좋게 만들고 있었다. 대학생 때 그래픽 툴을 자주 사용했었기에 웬만한 자료들은 어렵지 않게 잘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사에게 있었다. 도면에 칠한 색상이 상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색을 수정해서 가져가면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지적사항이 나왔고, 여러 번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불만이 커졌다. 한 번에 제대로 피드백을 주면 좋을 텐데 왜 매번 확인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오는지, 이 비효율적인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가 끝나면 이 자료의 생명도 끝이 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시간과 노력을 들였나 생각하면 보람은커녕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야근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일찍 퇴근을 하려고 오전부터 시간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오후 다섯 시쯤 되면 숨어있던 일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민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닌데, 막내라는 이유로 주인 없는 일들은 고스란히 나의 몫으로 돌아온다.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다 쏟아붓고 나면 남는 것은 지친 몸뚱이뿐이다. 계속 이런 패턴으로 일을 하다가는 하루 중에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단 10분도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불안감만 커졌다.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에너지를 이미 다 소진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을 할수록 나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감정관리도 쉽지 않았다. 쏟아지는 업무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업무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러고 나면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다. 회사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일을 왜 소홀히 대하냐고, 가시 돋친 말들은 나의 마음을 제대로 후벼 팠다. 내 감정을 돌볼 틈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내 감정을 표현하면, 일을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하냐는 이야기만 돌아올 뿐이다.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면 될 텐데,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보다 나를 탓하는 사람들이 어째 더 많으니, 나는 회사에 맞지 않은 사람인가라는 의문만 커질 뿐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감정을 컨트롤하기 힘든 상황들이 누적되면서, 나의 마음속 한편에는 퇴사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책이라도 읽으며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점에 가면 온갖 퇴사를 부추기는 책들이 오히려 나를 반겼다. 책을 한 권 집어 들어 책장을 넘기면 마치 내 마음을 누가 훔쳐보고 책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공감 가는 문장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정리된 글을 읽으며 나도 왠지 퇴사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무모한 확신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퇴사를 하고 싶은 건지, 단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건지 내 마음을 확실하게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회 초년생 시절을 제대로 겪느라 회사생활을 넓게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만 확대해서 보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의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내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나 스스로를 믿고 버텨보기로 했다.
비 온 뒤에 날이 개이듯, 나의 직장생활도 연차가 쌓이면서 그 그림자는 서서히 옅어졌다. 상사의 스타일과 패턴을 익히며 나름의 대처 노하우가 생겼다. 후배가 들어오면서 내가 맡은 일의 양도 적정 수준으로 조정되었고, 더불어 시간관리도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시간과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날수록 나의 생활은 점점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험난한 시절을 겪으며 퇴사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이곳에 입사하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면 이대로 퇴사할 수는 없었다. 회사가 나를 선택한 것도 있지만 나도 회사를 선택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흔한 단점 말고, 내가 회사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장점을 찾아보자 마음먹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월급쟁이의 삶은 고달파 보일 수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양에 관계없이 매달 일정한 수입이 들어온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다. 게다가 고정 수입이 있다는 것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출근 전 시간이나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취미생활이나 자기 계발을 할 수 있으며, 휴가를 활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즐기며 누릴 수 있다.
회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가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20대부터 은퇴를 앞두고 있는 50대 까지, 사회생활을 주로 하는 세대들의 총 집합체들이 모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연애, 결혼, 육아, 공부, 자격증, 취미, 부동산 등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주제들과 함께 세대 간 대화들이 오고 가니 얼마나 재밌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회사 안팎에서 맺어진 소중한 인연들은 회사생활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준다.
회사라는 울타리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며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팀장. 연차별 부여되는 직책은 각기 다른 리더십과 팔로우십을 요구한다. 연차별 조금씩 달라지는 나의 위치에 따라 역할을 달리하며 내가 가진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업무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 조율하고 협의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고, 적성에 맞는 일은 그와 관련된 교육을 수료해 전문성을 높일 수도 있다. 대학교를 들어갈 때 어떤 전공을 선택하고, 취업 진로를 정할 때 어느 분야로 나갈지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게 회사에서도 자신만의 분야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퇴사를 고민했다는 것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위해, 자신의 성장을 위해 부단히 움직이며 노력하겠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지금 다니는 직장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만둔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퇴사하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발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