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와 채식의 상관관계
내게 채식은 그냥 청소 같은 개념으로 다가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꽉 찬 싱크대가 눈에 띄었다. 전부 언니와 동생이 먹고 마신 흔적이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말끔히 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답지 않은 부지런한 사고가 낯설 법도 했으나 발걸음은 이미 부엌을 향하고 있었다. 가방만 내려놓고 쌓인 설거지거리를 닦기 시작했다. 고무장갑은 끼지 않았다. 기름이 찐득히 묻은 그릇을 깨끗이 닦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부드러운 스펀지로 그릇과 접시, 수저와 젓가락을 닦고 헹군 뒤, 냄비는 철수세미로 박박 닦아냈다. 개수대에 모인 음식물 쓰레기까지 치웠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에 눌어붙은 국물 자국과 고깃기름 위에 세제물을 뿌렸다. 행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제거하는 동안 가스레인지의 이물질이 퉁퉁 불었다. 그것을 철수세미로 닦아 행주로 훔친 뒤 행주를 깨끗한 물에 여러 번 빨았다. 노란색 행주에 김치 국물이 번져 있었지만 아직은 더 쓸만했기에 탁탁 털어 반듯하게 널었다. 생각해보니 여전히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속옷까지 전부 벗어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얼마 남지 않은 세제를 털어 넣고도 아쉬워 세탁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여러 번 헹궈 세탁기 안에 부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샤워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화장실 벽에 잔뜩 낀 곰팡이가 눈에 띄었다. 어차피 씻을 몸, 화장실 청소를 먼저 하면 좀 더 의미 있는 샤워가 되지 않을까. 바디클렌저를 바닥에 뿌려 솔질을 시작했다. 타일 사이에 낀 곰팡이가 솔질 몇 번에 금세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떤 타일에는 누런 자국이 빠지질 않았다. 얼핏 보면 눈에 띄지 않으므로 다음에 청소하는 날까지 신경 쓰인다면 락스를 사다 닦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울, 세면대, 욕조처럼 넓은 곳보다는 수도 손잡이에 물때가 더 많았다. 손잡이의 각도를 돌려가며 솔질을 했다. 뜨거운 물을 뿌리자 붉은색의 흐물거리는 물때가 잔뜩 쓸려 나왔다. 변기에 묻은 오물까지 청소하고서야 내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일하고 온 데다 세균도 많이 튀어 더욱 지저분해진 몸을 거품을 낸 타월로 꼼꼼히 문질렀다. 샴푸를 하고 린스를 하면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양치질을 했고 다시 온몸에 따뜻한 물을 끼얹어 모든 거품을 제거했다.
머리까지 말리고 나왔는데 동생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장을 봐오겠다기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 세탁세제를 사야 했고,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거리를 사야 했다. 동생은 카트를 밀며 신중하게 반찬거리를 골랐고 나는 그동안 세제의 가격을 비교했다. 1+1 상품은 언뜻 이득인 것 같지만 당장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이 물건을 아껴 쓰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동생과 상의해서 세제를 하나만 카트에 담고 쌈채소, 순두부와 알배추를 마저 골라 담았다. 값을 치르고 집에 들어오니 세탁기가 다 돌아가 있었다. 세탁물은 많지 않았다. 세탁물을 전부 널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오늘 산 순두부에 간장을 뿌리고 전날 엄마가 구워놓은 고구마 두어 개와 오늘 산 채소를 접시에 담았다. 차가운 순두부를 한 숟갈씩 뜨는 중간중간에 군고구마와 채소를 함께 먹었다. 기름기 없이 담백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약을 먹었다. 그릇을 다시 설거지하고 돌아 나오는데 말끔해진 부엌을 보며 괜히 용기가 생겼다. 최근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고민에 관한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최근 배가 아파 병원에 가니 식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깨끗한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맵고 짜고 기름진 것, 술과 담배를 피하고 익힌 채소와 심심한 나물 요리와 쌀밥을 꼭꼭 씹어 먹으라고 말했다. 약을 잘 챙겨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챙기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고도 경고했다. 환경오염의 주원인이 육식이라는 뉴스는 식도염으로 고생하는 동안 듣게 되었다. 자극적인 식사로 몸이 아파지니 그동안 넘겨들었던 뉴스가 새삼스러워진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고기를 먹지 않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채식을 하는 나, 유난스럽다는 소릴 듣는 나, 채식으로 인해 사람들과 외식을 할 수 없는 나,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을 수 없게 된 나, 내 눈치를 보는 부모님과 친구들이 불편해지는 나.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웠다. 답은 채식이었는데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뒤였다. 그런데 오늘 문득 용기가 솟아오른 것이다. 시작이나 해볼 용기가. 누군가는 환경보호나 동물권 개선과 같은 대의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데 어리석은 내게 채식은 그냥 청소 같은 개념으로 다가왔다. 마냥 두기엔 신경 쓰이는 것. 하면 좋은 것. 청결한 것. 이래 저래 따져 나쁠 것이 없으니 내 건강을 위해서 시작이나 해보기로 했다. 분명 낯선 생활이 될 것이다. 분명 자주 실패할 것이다. 그렇지만 청소를 하다 채식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