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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Nov 17. 2020

나의 반려식물

수박이와 메론이 덕분에 가지게 된 새로운 일상이었다

어느 날, 바깥공기를 맡은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야간 근무를 위해 잠을 자야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눅눅한 남방을 걸치고 나섰다. 좁고 어두운 숙소를 빠져나오니 가장 뜨거운 시간인 오후 두 시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손차양을 만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름 자두를 앞에 두고 졸고 있는 할머니, 은행업무를 보고 나오는 아저씨, 음료를 홀짝이며 신호를 기다리는 학생들. 나는 그들처럼 딱히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어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서 아무 데나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빛에 피부가 따가운 것 외에 모든 게 좋았다. 나른하고 평온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는데 옷차림이 조금 아쉬웠다. 검은색 유니폼에 초록색 체크무늬 남방, 맨발에 슬리퍼. 후줄근한 차림새로 계속 다니기에는 너무도 대낮이었다. 밤이 익숙해졌는지 눈에 띄는 내가 사뭇 부끄러워졌다. 피신할 셈으로 눈 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던 점원이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리바리하게 문 앞에 서서 매장 안을 둘러봤다.

“카페가 아니네요?”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온 곳은 작은 화분을 곳곳에 인테리어 해 놓은 꽃집이었다. 머쓱한 마음에 뒤돌아 나가려는데 특이한 식물이 눈에 띄었다. 화분에는 레드스타라고 적힌 작은 푯말이 꽂혀있었다. 나가려다 말고 그 화분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빛을 받은 빨간색 이파리가 더욱 생기 있게 보였다. 빨간색 이파리의 가장자리는 초록색 테두리가 쳐져있었고 진한 초록색이 점점이 뿌려져 있는 모습은 예쁘게 자른 수박의 단면처럼 보였다. 내가 유심히 화분을 보고 있자 점원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레드스타는 반음지 식물이라 기르기 쉬워서 많이들 사가세요.”

점원은 반음지 식물은 실내조명만으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에 홀린 듯이 값을 치렀다. 점원은 분홍 쇼핑백에 레드스타를 담았다. 꽃집 명함 뒤에 키우는 방법을 적어 함께 넣은 뒤 쇼핑백을 내 손에 쥐어줬다.

“예쁘게 키워주세요.”


식물을 내 돈 주고 사본 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그러나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솟구쳤다. 첫인상 그대로 수박이라는 이름부터 지은 이 예쁜 식물을 죽이지 않고 잘 길러내고 싶어 졌다. 물은 일주일에 한 번 줄 것, 가끔 햇빛을 쪼여줄 것. 명함에 쓰여있는 주의사항은 그것뿐이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선반 하나를 정리해 수박이의 자리를 마련해줬다.

식물의 이파리가 시들었는지, 흙이 말랐는지를 확인하는 행위는 내가 세수를 하거나 양치를 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이루어졌다. 피로하면 수박이를 꺼내 둔 비상계단에 함께 앉아 광합성을 했다. 함께 목을 축이고 바람을 맞았다. 눈을 뜨면 일을 하고 눈을 감으면 잠을 잘 뿐인 숙소 생활에서 수박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 하나 추가되었을 뿐인데 일상이 조금 분주해졌다. 외로움이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날이 많았으나 수박이의 상태를 체크하는 일에서만큼은 부지런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숙소에 혼자 있는 수박이도 나처럼 외로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집에서 수박이 곁에 나란히 있었던 화이트스타를 구입해온 건 그 때문이었다. 레드스타와 색만 다른 화이트스타에게는 메론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하루를 식물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 지 벌써 5개월 째다. 이 작고 어두운 숙소에 한발 늦게 합류한 메론이는 어째서인지 수박이보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에 비하면 수박이는 처음 왔을 때와 다를 바가 없어 룸메이트인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하던 것과 결이 다른 걱정이었다. 가벼운 걱정으로 시작하는 하루는 아무래도 무거운 걱정으로 시작하던 것보다 다정하고 무해하게 굴러갔다. 수박이와 메론이 덕분에 가지게 된 새로운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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