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잘 지내시죠? 해가 점차 뜨거워지는 여름입니다. 더위에 취약한 저는 기운 없이 지냅니다.
그래도 제주에서의 생활은 조금씩 자릴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매일 보는 바다는 이제 저의 하루의 고정된 배경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제 생일에 보내주신 엽서는 잘 받았어요.
요즘 같은 시대에 비밀스럽게 봉한 편지도 아니고 엽서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니, 낭만적이고 좋네요.
그게 선생님인 것도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또 주소를 적지 않으셨어요.
답장을 보내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선생님께서 보시라고 블로그에 답장을 씁니다.
아무도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를 테니까 부끄러울 일은 없겠습니다.
하도 글을 쓰지 않아서 머리도 손도 굳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지 형식을 빌려 에이포 용지 한 장 반 정도의 글을 써보려 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을 혼자 소화해내지 못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제 글에 소환당하는 선생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근에 당근 마켓에서 중고 스쿠터를 검색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차량이 필수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연하게도 예쁘거나 신식인 것은 비쌌어요. 그래서 못생긴 구식 스쿠터 중 가장 예쁜 것을 골랐습니다.
배달용 검은색 스쿠터였어요.
판매자에게 채팅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판매자가 전화번호를 보내왔습니다.
판매자는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말했습니다.
"그 오도바이, 아가씨가 타기엔 촌스러울 것인데."
전화 너머로 판매자가 머리를 긁적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수중에 가진 돈이 별로 없었기에 촌스럽기를 따질 때가 아니어서 이렇게 말했어요.
"그냥 주세요. 배달통만 좀 떼주시고요."
판매자는 흐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 후에 트럭을 몰고 판매자가 왔어요. 아버지 뻘이었기에 저는 그분을 사장님이라 불렀습니다.
사장님이 힘겹게 스쿠터를 내리며 말했어요.
"젊은 아가씨가 탄다고 해서 도색까지 싹 했어."
사장님 말대로 검은색 배달통을 떼어낸 자리에는 빨간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어요.
어떤 색이 좋냐기에 빨간색이라 답했더니 아저씨가 직접 페인트칠해놓은 것입니다.
기계 이음새마다 붓이 지난 자국이 보였어요. 왼손으로 오른손 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것처럼 어설펐죠.
사진보다 엉망이 되어버린 게 당혹스러웠지만 겨우 사십팔만 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어요.
탁송이 포함된 스쿠터 가격이 사십팔만 원인 거예요.
면허를 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치고 너무 못생겼지만 주머니 사정과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빈티 나는 겉모습처럼 털털거리는 빨간 스쿠터를 몰고 공터를 몇 번 돌아본 며칠 뒤 실제 도로주행을 나섰습니다.
생각해보니 면허증을 받은 지 겨우 열흘이 된 날이었네요.
첫 주행은 끔찍했습니다. 서귀포시의 아주 한적한 도로였기에 망정이지, 시내로 향하는 도로였으면 경적 소리가 온통 저를 향해 울렸을 거예요.
첫 주유도 끔찍했어요. 자신 있게 "가득 넣어주세요!"라고 말했고, 꽉 채우니 겨우 만 오천 원 나왔어요. 기쁜 마음으로 출발하려는데 주유소 사장님이 갑자기 손가락질하시더라고요. 손가락은 스쿠터 아래를 가리켰고,
거기엔 기름이 줄줄 새고 있었어요. 아............... 내 돈............
다행히 둘 다 대처할 수 있었어요. 주행은 최대한 차가 없는 해안 도로를 이용하면 되고 주유는 기름을 가득 채우지만 않으면 되었어요. 진짜 문제는 도로 한 복판에서 갑자기 계기판이 고장 난 건데요. 제가 얼마큼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 속도를 얼마나 더 줄여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어요.
방향지시등도 안 먹혀서 차선 변경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향지시등이 왼쪽 오른쪽 번갈아 깜빡이는데, 꺼지지도 않고.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방향을 못 바꿔 엄한 곳으로 빠지는 바람에 한참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싼 쓰레기를 샀다고 주변에서 놀리더라고요.
잘 지내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런 멍청한 일들이 간간히 일어나는 제주살이 중입니다.
선생님, 솔직히 저는 제주도에 오면 제 인생이 더 특별해질 것 같았는데, 저는 그냥 저네요.
마음속의 화살표가 가리켜서 온 게 제주도인데, 어딜 가나 헤매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제가 저인 이상은요.
그런 의미에서 가끔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멍청한 스쿠터라도 정 붙이면서 탈까 싶습니다.
정비하는 데 돈이 꽤 들긴 하겠지만 고쳐 쓰다 보면 또 탈만하지 않을까요.
선생님, 선생님께 수업을 받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무척 기쁩니다. 긴장도 되고요. 솜씨가 줄은 건 확실하거든요.
이런 편지글이라도 종종 쓰며 손을 달궈놓아야겠습니다. 막상 쓰면 괴로울 게 분명한데 또 글을 써보겠다고 시동거는 제가 바보같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성격이 참 그래요. 하고 싶으면 후회를 하더라도 해봐야 하는 거.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못 미덥지만 뭐 어쩔 수 있나요. 헤매면서 쓰다 보면 어디라도 도착할 테지요.
일단 이번 편지글은 선생님께 잘 도착하길 바랍니다. 다음에 또 쓰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