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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비율 이대일 Mar 26. 2019

밑줄 그은 책들

 논문을 써나가다가 인용문의 출전을 찾아 이것 저것 책을 뒤적이다보니 여기저기 밑줄 쳐둔 글귀가 새삼스럽다. 이 때문에 논문과 무관한 책까지 열어보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것 같은 문장 밑으로 연필 선들이 고물고물 따라가고 있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실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삶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갈등, 절망, 외로움, 고립에 갇힌 우리의 일상생활은 정말로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매일 눈 뜨고 숨 쉬고 잠들고 다시 깨어나는 전쟁터 속에 있다. 우리는 이 삶에서 벗어나고자 별의 별 방법을 동원한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박물관에 가기도 하고 또 온갖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지식에 사로잡혀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오락을 즐긴다. 평생을 살아봐야 슬픔을 안겨다주는 일의 연속일 뿐인, 삶이라 부르는 이 갈등, 이 전쟁을 끝내는 일 말고는 이렇게 뭐든 다 한다.”


 삶에 대한 묘사가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렇게 뭐든 다 하는’ 세계로 되돌아와 ‘이 갈등, 이 전쟁을 끝내는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갈등과 전쟁뿐인 세상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이 글귀가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디 이뿐인가. 또 다른 책에는 “고난과 불행을 온유함으로 이겨내라” 라는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가 하면 “판단을 내리기 보다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균형 감각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안전과 확신을 이루게 됩니다” 라거나 “<화엄경>에 따르면 그대가 한 순간을 깊이 느끼는 순간, 그 순간 속으로 모든 과거와 미래가 들어온다”는 구절, 또 “모든 존재를 위한 관심에서 비롯된 사랑으로부터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이 책 저 책을 열어보아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글귀가 흘러간 밑줄 위에 곤히 잠들어 있다. 책에서 눈길을 들자 나 자신에 대해 답답하고도 한심스러운 생각과 더불어 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어왔는가 하는 의문이 와락 솟구쳐 올랐다.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든다는 베이컨(Francis Bacon ; 1561~1626)의 말도 그릇된 게 아니요. 책은 세계의 귀중한 유산이라는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 1817~1862)의 목소리를 거스르고픈 생각도 없다. 그러나 정작 소중한 건 무얼 알고 어떤 힘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자기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는 것도, 역사를 아는 것도, 사회생활을 위한 제반 지식을 갖추는 것도 긴요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생명에 대한 관심이며 이해일 게다. 그리고 이보다 귀한 건 지식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알게된 것의 실천이리라.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지식이 직접적인 활용을 통해 효용성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스스로의 변화에 작용하지 않는 거라면 그것은 이해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독서란 단순한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으며 지식의 축적은 재물 축적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고 만다. 더구나 인격적 성장이 아우러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지식의 축적이란 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오히려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니 자칫 나쁜 취미생활의 하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것은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이렇게 뭐든 다’의 한 가닥으로서 우리가 눈을 뜬 채로 잠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역시 밑줄 그어진 한 구절이다. 그리고 또 한 구절, 

 “산스크리트어로 buddha라는 동사는 ‘잠에서 깨어나다’라는 뜻이다. 깨어난 사람은 붓다로 불린다. 붓다는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의미 깊다고 생각되어 밑줄로 도드라진 글귀가 이렇게 새삼스러움은 내가 잠에서 깨어나 있지 못함을 이르는 증거일 뿐이다. 더구나 이는 나만의 일도 아닌 것 같으니 19세기 영국의 문인 기싱(George Robert Gissing: 1857~1903)의 다음과 같은 한탄은 내게 은근한 위안이기까지 하다. 

 “나는 죽는 날까지 책을 읽을 것이며 또 읽은 내용을 잊어버릴 것이다. 아, 책을 읽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읽은 내용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끈질기게 그리고 즐겁게 책을 읽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밑줄 구절 하나는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당신에겐 그 경험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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