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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인의 도적 Sep 03. 2021

여행 멀미를 잠재운

[나의 남미1] 슈퍼문, 볼리비아 라파스

미리 알고 떠난 건 아니었다.

하필 1월말에서 2월초에 걸쳐 여행을 하기로 한 건 무더운 한여름의 강의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2019년 1월 21일, 첫 기착지는 볼리비아의 라파스(La Paz)였다. 내 신경은 온통 고산증에 쏠려 있었다. 쿠스코에서 이미 증상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컸다. 세계에서 가장 공기가 희박한 도시라는 라파스.

미리 약을 먹고 비행기에 올라 이른 새벽 라파스 공항에 도착했다. 해발 4,100m에 이르는,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항’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곳.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작은 공항 전면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색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내쉬며 일찍 문을 연 공항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몸이 이 높이에 적응해주길 기다리며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했다.


라파스 중심가의 성당 앞 광장. 고산에서 보는 하늘은 정말 가깝고 푸르다.

  

하루 종일 오르막 내리막을 천천히 거닐며 뭔지 모르게 우울한 도시를 둘러봤다. 가끔 어지럽고 숨이 차올라와 아무데서나 앉아 쉬어야 했다. 라파스는 그저 우유니를 지나 아타카마 사막에 이르기 위한 여정을 준비하는 기착지일 뿐이었기에 별 기대도 감흥도 없었다. 서울의 70년대 풍경을 보는 듯했다.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국민소득 따위가 뭔 대수겠나. 하지만 거리 노점상들의 표정은 권태로워 보인다. 노점을 양성화하려 만든 것으로 보이는 캐비넷 같은 가게들은 대부분 아직 문을 안 열었다.  


라파스의 색다른 운송수단인 텔레페리코, 이를 올라타고 이동하며 내려다본 라파스 시내 모습.

  

라파스는 해가 드니 춥지 않다. 언덕이 많아 대부분 길이 가파른 오르막 아니면 내리막이다. 텔레페리코(teleférico, 케이블카 버스)는 이런 도시 상황에 딱 떨어지는 영리한 교통수단으로 보인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텔레페리코를 타본 게 이곳에서의 유일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고 깔끔한 정류장과 비싼 차비는 여행자의 눈에도 아직은 어색해 보였다.


여행 멀미 시작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시작은 늘 어려웠다. 준비할 때의 설렘은 사라지고 막연한 불안감과 떠나기 싫은 마음이 커진다. 지겨워서 잠시 떠나고 싶었던 그 일상이, 바꾸고 싶지 않은 편안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낯선 곳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신경을 곤두서게 하기도 하고 때론 잠시 남겨놓고 떠나는 일이나 사람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혼자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슬프고 우울하다. 나는 이걸 ‘여행 멀미’라고 부르며 빨리 지나가길 기다린다. 멀미의 정도와 시간은 여행마다 다르지만 혼자 떠날 때마다 예외없이 찾아오곤 한다.


이번 여행은 그 멀미가 좀 심했다. 일찍 늙어버린 이처럼 여행 전의 설렘이 통 오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예정되었던 휴가였는데 여행지도 결정하지 못해 갈팡질팡이었고 항공권 사이트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다 귀찮았다. 인터넷에는 많은 이들의 여행기록과 정보가 넘쳐나는데 찾아보기도 싫어 옛날 사람처럼 가이드북이라도 하나 사서 대충 들춰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인데 굳이 떠나야 하나, 그냥 말자 하는 마음도 들었다. 결국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에 라파스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웃으로 비행기표를 샀다. 그러고도 중간 일정을 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설렘 없는 여행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언제 다시 오겠어 하며 남들 다 하는 것, 다들 가본다는 곳을 찍듯이 다니고 싶은 건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여러 정보를 꼼꼼히 전달하려는 것도, 남들 안 가본 곳만 골라 가며 남다름을 자랑하고픈 것도 아니다. 특별한 호기심이나 주제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일상을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유일한 바람이라면 파타고니아의 서늘한 공기를 만나보고 싶다는 정도.

 

비루한 휴대폰 카메라는 그 밤의 분위기도, 그 거대했던 달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유난히 커다랗고 동그란 

지쳐 들어온 숙소 방에는 나 말고 세 명이 더 있었다. 시작하는 여행에 달뜬 이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지쳐 있어 분위기가 무거웠다. 나는 다음날 새벽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병이 도지기 시작해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 때였다. 저것 좀 봐! 커튼에 가려졌던 방 한쪽은 커다란 통창이었는데 누군가 커튼을 젖히니 도시의 불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언덕 위에 걸린 달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주 크고, 동그란, 노란 달이었다. 달이 저렇게 컸던가, 저렇게나 커 보인적이 있었나. 과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류의 수식어를 잔뜩 달고 있는 곳이어서 달이 더 가까이, 더 낮게 보이는건가. 바보 같은 생각이 들락거리는 가운데서도 점차 달에 빠져들었다.


방 안의 여행자들은 모두 말없이 행동을 멈추고 한동안 달을 바라보았다. 고산이 버거워 지친 몸과 묘한 우울함에 내려앉던 마음이 편안하고 너그러워지는 듯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첫날부터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던 이번 여행도, 천천히 한번 가보자 하는 마음이 들만큼 진정되었다. 잠들기 전 누군가에게 달을 보라고 문자를 보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거지만 이 날 뜬 달은 유난히 커 보인다는 '슈퍼문(Supermoon)'이었다. 슈퍼문은 달이 공전하면서 지구에 가장 가까이 다가와 그 크기가 평소보다 크고 밝게 보이는 현상이다. 달과 지구의 거리는 평균치로 약 38만4400km이지만 이날은 그 거리가 35만7000km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선물처럼 맞닥뜨린 '커다랗고 예쁜 달'. 그 드문 달을 오래 바라본 덕분이었는지 심했던 여행 멀미가 가라앉고 나는 비로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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