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미3] 당근 호수와 플라밍고, 그리고 비
라구나 콜로라다(Laguna Colorada)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아주 세차게 불고 주변이 온통 먹구름으로 둘러 있었다. 언덕 위쪽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규모가 상당했다. 호수 왼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른편에선 플라밍고 떼가 열심히 먹이를 먹고 있었다.
당근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카로틴이 풍부해 호수가 당근 색깔을 띤다는 가이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살 레아는 "당근이다!"라고 외치며 즐거워한다. 호수의 색깔은 아름다웠다. 붉은색과 분홍색의 중간쯤, 정말 당근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볼리비아에 위치한 라구나 콜로라다(Laguna Colorada).
플라밍고는 '당신 먹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라는 명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까. 호수 빛을 당근색으로 만드는 성분을 비롯해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호수 속 먹이를 먹고 그들의 몸도 호수 빛과 같은 색을 띤다. 알다시피 안데스 산맥은 원래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형성된 곳이다. 그래서 안데스에 있는 호수들은 염도도 높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가 오지 않아 사막화된 우유니에 소금이 드러난 것도 그래서다. 다른 호수에서 본 플라밍고들은 날개 끝이나 꼬리, 목 등 몸의 일부가 핑크색인 경우가 많았는데, 라구나 콜로라다의 플라밍고들은 온통 핑크빛이다. 호수와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다.
여행을 하다보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먹고 싸고 자는 부분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나는 먹을만한 것을 찾는 일이 신경쓰이기 마련인데, 외국 여행자들이 많이 가는 곳에선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 어딜 가나 채식 메뉴가 준비되어 있고 아예 비건 식당이 있는 마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형성된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여행자가 적은 곳에서는 약간 불편을 겪기도 한다. 고기류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를 찾다보면 주재료를 뺀 샐러드나 맨빵만 먹어야할 때도 있다. 보통은 요리에 고기를 빼달라고 하면 들어주는 곳이 많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내가 집어드는 먹을거리에는 나의 선택과 신념, 생활태도가 묻어난다. 그리고 그걸 먹음으로써 내 몸에 영향을 미치고 그건 어떤 순간에 어떤 형태로든 드러날 것이다. 플라밍고처럼 먹은 것들의 빛깔이 늘 겉으로 비춰진다면 내 먹거리는 좀 더 달라질까. 인간이야 홍학처럼 입으로 먹는 것은 물론 보고 듣고 읽는 형태로 섭취하는 것까지 해당하는 명제가 될 것이다. 왜 고기를 먹지 않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사람들이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동물권, 환경, 체질, 종교적 신념, 건강 등. 어떤 이유에서건 시작하게 되면 이게 단순히 '먹는 문제'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십여 년 전 오랫동안 고려만 하고 있던 채식을 결단했다. 현대인의 과도한 육식으로 인한 지구 환경의 문제를 더는 외면만 할 수 없어서였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기후위기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자 그룹과 시민사회 그룹에서 경고해온 문제였다. 발등에 불이 튄 지금에야 탄소 저감에 집중해 해법을 논하고 있는데, 그마저 '성장'이란 화두를 놓지 못하고 시늉만 하는 '그린 워싱'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현실을 냉혹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탄소 저감은 더 과감히, 더 적극적으로 방안을 강구하고 진행해야 하는 문제인데, 여기엔 정부와 산업계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대전환이 필요해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탄소 저감만으로는 절대 기후위기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메탄가스와 아산화질소 등 온실가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지만 지구온난화에 끼치는 영향은 탄소의 80배 이상에 달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스들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기르고 있는 반추동물, 즉 소의 숫자는 40억 마리에 달한다. 숫자로도 인류의 절반을 넘었고 무게로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다. 모든 식용가축의 수를 더하면 240억 마리에 달한다. 축산업 자체에서 발생하는 오염 요소뿐 아니라 사료 재배를 위해 불타 사라지는 숲과 대규모 단일경작으로 인한 비료, 농약 사용도 모두 기후위기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지구는 인류가 먹기 위해 키우는 동물과 그들을 먹이기 위한 곡물 재배로 망가지고 위기에 처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모두 현대인의 '과도한' 육식에서 비롯한다. 인류의 등장 후에도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인간이 이토록 많은 소와 동물 고기를 먹은 적은 없었다. 과도하다.
채식이 가장 쉽게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장 저렴한 기후위기 해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래서이다. 우리가 채식을 선택하면 공장식 축산은 줄어들 것이고 사료 재배를 위해 숲이 불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축산과 그 주변 산업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메탄가스와 아산화질소의 발생량이 크게 줄면 기후위기의 데드라인을 늦출 수 있다.
하루 아침에 완전 채식을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어떤 식으로든 실천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하루는 채식을 한다든가(고기없는 월요일), 하루 한 끼는 채식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한 걸음 내딛으면 다음 걸음은 훨씬 쉽고 편안하다는 걸 느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 자신이다.
레아는 이번 여정을 시작할 때부터 플라밍고 타령을 하며 고대해왔다. 그리고 앞서 본 몇 개의 호수에서 아주 가까이 플라밍고를 만났다. 하지만 이렇게 온통 분홍빛인 플라밍고라니! 바람이 너무 심하니 차에 머물라고 하는데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니나가 스카프를 빌려주었지만 민소매 원피스만 걸친 레아에겐 어림없어 보였다. 내가 경량 패딩을 걸쳐주니 좀 낫긴 했지만 여전히 벌벌 떨면서도 기어이 호수와 플라밍고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바람이 거세 나는 중간쯤에서 호숫가로 내려가기를 포기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어느 스팟에서건 탐험가마냥 누비고 다니던 니나만 호수까지 내려가 플라밍고와 물을 만나고 왔다.
오래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이었다. 바람이 심하고 한쪽에선 비가 계속 내리다보니 물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호수의 당근 빛이 가려지며 환상적인 광경을 만들어낸다. 여행사에서 본 화장한 날의 호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달라서 좋았다. 특별한 당근 호수로구나.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 그날의 라구나 콜로라다.
다시 차에 올라 호수를 떠나면서 레아가 소리쳤다.
"Bye Carrot! Bye flamin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