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변화와 삶의 순환 고리
진한 체리 향이 코끝을 강하게 적신다. 어느덧 공기는 부쩍 따뜻한 기운을 넘어 조금은 더워졌다.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볼까 하고 나와 걷는 거리에서 초록이 더 짙어진 봄의 기운을 맡는다.
걷다 보니 집 가까운 공원에서 화기애애 통나무에 둘러앉아 주말 오후 걸스카웃 모임을 하는 어린아이들의 말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린다.
선생님은 차 트렁크에서 아이들을 위한 또 무언가를 준비하듯 분주하지만 그 분주함이 타인을 위한 것이어서 보는데 기분이 좋다.
그 사이를 뚫고 공원을 걸어가면서 집 안에서 있을 땐 잊고 있던 주말 오후의 여유와 활기를 느끼니 지난밤 나도 모르게 조금 다운되어 있던 감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활력을 느낀다.
거리를 걸으며 미국인들이 자신의 집 앞에 정치색만큼이나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꾸민 정원들을 지나가는 방문객인 나는 허락 없이 마음껏 구경해 본다. 웬만한 대형 식물원에서 종류별로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 봐줄 손님을 기다리듯 미국 집들은 봄이 되면서 겨우 내내 메마른 나무향과 짙은 회색빛의 나뭇가지들이 겨울 색을 버리고 봄의 색을 다시 드러내며 그간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듯 각자가 새싹과 꽃망울을 틔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한 계절의 변화를 매일같이 눈 앞에서 누리게끔 해주는 그들의 알록달록한 정원을 보자니 왜 사람들이 나이를 들면 정원을 가꾸고 그것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서 생물의 죽음과 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는지 알 것 같다. 한 계절이 돌듯 한 사람의 인생도 계절이 순환하듯 그렇게 흘러간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봄이라는 계절이 있고, 언 땅으로 모든 것이 느리고 멈춘 겨울이 있듯이 사람도 인생도 멈춘 그 시간 안에서 에너지를 모으고 다시 드러내는 계절인 봄과 같은 때에 그 에너지를 발산한다.
잘 시작하기 위해서는 잘 멈춰 보는 것도 중요하다. 사람의 생에는 활동기간과 안식기간이 존재하는데 안식기간의 공백은 확실한 쉼을 통해 그다음의 활동기간을 위해 발판이 될만한 것들을 갈고닦고 쌓는 기간일 것이다.
나무에 싹이 나고 싱싱한 꽃망울이 점점 활짝 기지개를 켜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랫동안 볼품없이 앙상한 가지의 자태와 꽃이 필까 싶을 그런 것들에서도 꽃이 피고 새싹이 남에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친구가 말했듯 나는 내 인생의 안식기간에 있으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조급하고 허겁지겁 소비하던 삶을 떠나 쉬면서 그다음 여정을 위해 점들을 하나씩 모으는 때가 되어야 한다.
무언가를 피우고 틔우기 위해 자연이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에너지를 축적하듯 , 나는 내 인생에서도 좀 더 인내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위해 노력하는 시간 안에서 나는 늘 조급하다. 아무것도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은 없고 인내하며 갈고닦는 그 시간을 견뎌야만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는 이론으로 알지만 막상 몸으로는 안된다.
세상 어느 분야에 특출 난 사람들도 다 그들의 첫걸음은 존재했다. 나이가 들면서 무언가를 자기 분야에서 이뤄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특별히 잘나서 뛰어나서라기 보다 무던히도 인내하고 축적해나가는 그 시간을 견딜 줄 아는 자만이 인생에 점이 될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획을 그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득 어디선가 듣기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수히 작고 작은 점들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찍어 나가면서 그 점들이 나중에 연결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내 기준에서 작고 단단한 점들을 찍어 나가며 인내라는 걸 길러 보기로 한다. 지난겨울 언 땅이 녹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처럼 나도 내 인생에 또 다른 계절을 맞이 하기 위해 인내하고 멈춰 있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