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가는 7월 말, 일요일 오후 3시. 아내와 아이들은 쾌적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낮잠이 들었고, 나는 별안간 눅눅하고 구린내 나는 수건을 떠올렸다. 지금이다. 그 수건들을 모아 삶기로 했다. 아내가 혼수로 들여온 9년 된 드럼 세탁기로도 수건을 삶을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속이 후련하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모터 달린 기계에 넘겨주기 싫은, 가벼운 자존감 싸움일지도.
월세로 살던 낡은 88년생 복도식 아파트 신혼집에 있을 때 마트에서 사 왔던 삼숙이 냄비를 꺼냈다. 월세에서 전세로 넘어왔지만 외벌이로 네 식구를 먹여 살리기엔 여전히 빠듯하다. 하지만 괜찮다. 삶아 나올 수건들은 보들보들할 것이고, 희미한 비누 냄새를 풍길 것이다. 말하자면, 인생의 기쁨을 수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비누를 뭉개어 수건에 비비고 물을 2/3쯤 채워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순간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빨래를 삶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솥단지처럼 널따랗고 손잡이가 빙 둘려 있는 특이한 냄비에 속옷과 수건들을 가득 담고 약한 불에 밤 새 삶아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엄마를 닮아있다. 엄마도 나처럼 삶아 나온 수건의 희미한 비누 냄새를 맡으며 고단한 삶 속에서 위안을 얻으셨을까.
비눗물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약한 불로 바꾼 뒤 먹구름에 어둑해진 주방에 불을 켜고 식탁에 앉아 책을 집어 든다. 수건 삶는 이 한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아이가 자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름의 집안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운 여름날 낮의 졸음을 이기고 앉아있기 때문에.. 태평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당위성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아름다운 시간. 영원히 정리되지 않을 업무와 사소한 일로 시작되는 아내와의 말싸움, 벌써 학생이 된 첫째의 짜증,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여름휴가, 피곤, 피로, 얼만큼 커져버린 간 혈관종 같은 자잘한 불편함을 잊고 앉아있는 이 아름다운 시간. 계면활성제가 기름과 묵은 때를 벗겨내는 이 아름다운 시간. 수건 삶는 이 한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