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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자미상 Aug 05. 2019

사회부적응자

"시발 *나 피곤하네"

나의 사수이자 나보다 한 살 어린 과장은 시도 때도 없이 중얼거린다. 그의 말은 늘 쌍시옷이 아닌 시옷 발음으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욕이 아닌 가벼운 불평의 표출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늘 피곤하다 하고, 늘 하기 싫다 하지만 사실은 능숙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 능숙함의 수준이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하다기보다는 그의 야망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윗사람들의 구미에 맞춘,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면서 공격적인 모습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한 파티션 구획 안에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은 말이 없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는 자기들만의 비밀을 나누듯 나직이 수군거린다. 분주하게 딸깍거리는 마우스 좌클릭, 타자 소리, 또 마우스 우클릭,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조심스러운 마른기침. 그래서 그런지 사수의 '시'발은 더욱 도드라져 뇌리에 박힌다.


십 년 가까이 함께하던,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것 같은 이전 팀과 업무를 내려놓고 새로운 팀에 합류한 지 한 달. 신입도 리더도 아닌 어중간히 나이 든 초보를 환영해줄 리 만무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업무라는 것은 이미 줄기에 줄기를, 뿌리에 뿌리를 내려 당최 정형화할 수 없고, 예민한 상사의 재촉과 타박에 마음이 황폐해져 있다. 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두리번거리고 간혹 의문스러운 질문들을 던지며 이 시간을 지나 보낸다.


회사는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문학적인 고민을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직장인이 로봇처럼 움직이길 얼마나 기대할까. 로봇은 새 로봇을 만난다고 쭈뼛대거나 어렵게 인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 내가 인간인 탓에, 그리고 남들보다 훨 씬 더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인 탓 나는 늘 불안해하고 늘 어려워한다. 나는 사회부적응자다.


아, 사회부적응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 사회란 필시 적응을 요하는 곳인가. '사회부적격자'나 '사회불충분자' 라는 말은 없고 사회부적응자라는 말이 살아남은 걸 보면 적응이 중요하긴 한가보다. 그런데 직장이란 사회는 적응에 정성을 쏟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꽤 불편해 보인다. 다시, 신입이든 옮겨온 나 같은 인간이든 로봇처럼 무심하게 일만 할 수 있다면 전혀 비용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닌가.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적응의 기억이 십수 년 전으로 밀려나 가물가물한 기득권자들의 생각으로는 나 같은 이들의 부적응의 까닭을 모를 것이다. 마치 어릴 적 먹었던 불량식품의 맛이 분명히 달았는데 그 단 맛이 얼마나 달았는지, 포도의 단맛이었는지 오렌지의 단맛이었는지 콜라의 단맛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뭉뚱그려진 그런 이미지가 아닐까. 맛보지 못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



서글픈 것은, 나란 존재는 서른 줄이 이제 끝자락에 다다르는데도 아직도 적응이라는 첫 단추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을 오래 다니면 좀 좋아지겠지 하던 대학생 시절의 나, 더 거슬러올라가 어른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싶던 유년기의 내가 지금의 내 꼴을 보자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면서도 이런 내 모습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어쩌면 위로가 될는지도 모른다. 나랑 같은 고민을 한다는 동질감. 이 인간보단 내가 낫다는 우월감. 그게 뭐든 간에, 위로가 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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