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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씨네 Oct 22. 2019

<코코>(Coco) 리뷰

강원, 영화학교 영화읽기 워크숍 4주차

영화소개

<코코> (Coco, 2017)

감독 : 리 언크리치

러닝타임 : 127분

장르 : 애니메이션 / 모험 / 코미디

출연 : 안소니 곤잘레스(미구엘 목소리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헥터 목소리 역), 벤자민 브랫(델라 쿠르즈 목소리 역) 등



겉과 속이 다른 영화, 코코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즐길 수 있었지?)


   서서히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이 놀자 전에 없던 재밌는 얘깃거리가 생겼다. 바로 '로또'다. 친구 중의 몇은 대놓고 꿈이 '로또 1등 당첨'이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우리에게 있어서 당첨이 되면 뭘 할지 이야기 하는 것은 지친 삶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고민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고 모험적 선택은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상황 속에서 로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자 많은 이들의 '꿈'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희망 사항 정도의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그렇다고 그것을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다. 뭐가 되었든 그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니까. '세계평화'나 '로또'나 결국 다 같은 개인의 소망을 담은 꿈이라는 얘기다. 이런 의미에서 '로또 당첨'은 확실히 다수 현대인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웃픈 일이긴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렇게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코코'는 조금은 결이 다른, 아마도 아주 어릴 적에는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뭐였는지 도통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 잊어버린 소중한, 그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꿈'을 찾아 떠났던 헥터를 이 영화가 다루는 방식은 잔인하기 그지 없다. 친구에게 배신당해서 독살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친구를 더 유명하게 만들기 위하여 희화화되었고, 그의 전부였던 음악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줬다. 그리고 기억하는 이라고는 늙어버린 작은 딸 밖에 없어 곧 완벽한 소멸을 앞두고 있는 처지다. 반면에 헥터처럼 음악을 사랑하고 재능도 있었지만 그것을 포기한 채 가족에게 헌신한 이멜다는 후손들에게 존경받으며, 죽었을지언정 여전히 강력한 카리스마로 시종일관 다른 캐릭터들을 압도한다. 심지어 이멜다의 알레브리헤는 그 유명한 예술가 '프리다 칼로'의 것과도 격이 다른 존재감을 보이며 미구엘의 구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다.

   이렇듯 영화 내내 '가족'을 선택한 이멜다와 '꿈을' 선택한 헥터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도 주인공인 미구엘이 헥터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떠나는 일련의 표현방식은 아이러니할 뿐만 아니라 관객을 기만하는 것에 가깝고 심지어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영화는 미구엘의 여정을 통해 표면에 드러나는 주제는 아름답게 '가족'과 '꿈'의 양립이라는 메시지를 덧씌우지만, 미구엘처럼 성공이 보장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보통 사람의 관점으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헥터처럼 '꿈'을 이루려다 비참하게 딸조차 만나러 가지 못한 채 서서히 잊혀 질지, 아니면 이멜다처럼 '가족'을 위해 살면서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어느 한 분야에서 인정받으며 가족들에게 소중히 기억되는 사람이 될지에 대한 선택은 넌지시 강요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삶은 공평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기에 누가 다시금 일깨워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근데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런 대중매체에서조차 죽음 이후의 삶마저 공평하지 않다는 무서운 암시를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각인시킨다. 마치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무의식에 세뇌하듯이 말이다. 가족들이 기억해주지 않아 빈민처럼 살아가며, 죽음 뒤에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가련한 처지가 되기 싫으면 '꿈' 따위는 집어치우고 가족이나 돌보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아 문득 근래의 정치적 사건들과 겹쳐져 너무나도 소름끼치고 속상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가람




꿈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해!


   영화는 가족 간의 사랑과,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는 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얼핏 생각해보면

그 두 가지는 양립 불가능인 것처럼 묘사된다. 주인공 미구엘은 음악을 좋아하고 가수가 되길 원하지

만, 가족들은 음악을 혐오하고 미구엘이 음악 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한다. 영화 초반에 묘사된 장면

들을 볼 때마다 미구엘이 꿈을 꾸기 위해서는 가족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들이 음악을

혐오하게 된 계기는 또다 른 주인공 헥터 때문이다.

   헥터는 음악을 좇았고 가족을 떠나 있었지만 결국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하던 중 독살되었다. 그렇담

헥터는 결국 꿈과 가족 중에 꿈을 택한 것이 된 걸까? 헥터가 딸 코코를 위해 지었던 노래 '기억해

줘' 는 헥터의 가족에 대한 사랑 노래라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그런 점에서 헥터는 꿈도 가족도 모

두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는 끝에서 헥터와 가족 간의 오해를 풀어주고, 헥터의 노래였던 '기억해 줘

'를 다시 헥터 에게 되돌려준다.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두개 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

닐까?

   꿈도 가족도 모두 중요하다. 어느 한 가지만 선택하기엔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또 영화는 기존에 우리가 생각해 왔던 생각 '꿈을 이루려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해.' '꿈만 바라봐야

해.' 같은 생각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꿈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게 아니야.'라고. 어찌 보면 디즈니식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해피엔딩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현실에선 이런 일들이, 가

족도 행복하고 나도 꿈을 이뤄 행복한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기에. 영화 속에서 만이라도 모두 행복

해 지는 것을 보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한 현실이 행복한

영화속 세상과 대비해서 더욱 선명해지곤 해서, 이미 별 볼일 없는 어른이 되어 영화를 봤을 때 그

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폄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다시

영화를 봤던 그때 그 시절, 행복하게 영화를 받아들이는 순수함이 살짝 그리워진다.


솔마




사랑하는 이들과 오늘의 일을 나누자


   코코가 아무래도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영화다보니 멀리 떨어져있는 가족들 생각이 났다. 좀 일찍이 독립을 해서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명절을 제외하곤 가족들이 모여서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래서 인지 중반부를 지나면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헥터에게 이입을 하며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그 사실도 알리지 못하고 죽어버려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며 이승으로 향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저승에서 다시 만난 아내와는 오해를 풀지 못해 이승에서의 시간보다 더 길게 마주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쌍한 영혼이었다.      


   영화의 스토리를 위해서라지만 마음에 안 드는 설정이 있었는데, 바로 이승의 부와 명예가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죽어서까지 이런 차별이라니 어떻게 살든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지 않은가? 기억하는 이들이 없는 자의 죽음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죽임을 당하고 노래까지 빼앗겼던 헥터가 소시지를 먹고 죽은 이라고 놀림을 받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델라 크루즈가 처음 리멤버 미를 부를 때는 미구엘의 조상이라고 생각해서 저 할아버지는 가족이 그립지도 않은 걸까? 막 다른 여자와 키스하고 혼자 멋진 영화에 나오면서 가족을 전혀 찾지 않는다니. 이멜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며 보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니! 결국 델라 크루즈를 처단한 것이 하나가 된 헥터와 이멜다라는 것이 좋았다.      


   가족이라고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가족이기에 더 기대하는 것이 있어 상처받기도 한다. 이멜다가 헥터를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았던 그로 인해 음악을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큰 선물을 하거나 거창한 말을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솔직히 말했을 뿐인데 둘을 오해를 풀었다. 가족이라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때론 가까이 있는 이들과의 대화가 더 적을 때도 많은 것 같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지만, 언젠간 떠나게 될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의 날’이 흥미로운 것을 죽음이라는 고통의 사건을 가족과 나누면서 기쁜 축제의 날로 승화시키기 때문인 것 같다. 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 이 시간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아가야 할 명분이 생긴 것 같다.


아침밥




노을은 죽음의 색깔


   <코코>는 언젠간 꼭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 첫 번째에 올라있던 영화였다. 개봉했을 때 친구 때문에 보지 못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기대는 점차 부풀어 있던 차였다. 영화는 물론 유쾌하고 예쁘고 즐거웠지만, 음, 막상 보고 나니 보기 전보다도 할 말이 없다. 내 상상 속의 <코코>가 좀 더 좋았던 탓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처음 든 생각은, <뮬란> 같은 것을 봤을 때와 비슷했다. 멕시코 꼬마가 스페인어 억양의 영어를 하는 그 이질감이란. (이런 느낌이 가장 극악했던 것은 옛날꽃날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다. 거기서 사무라이의 마지막 지도자 역 와타나베 켄은 죽어가며 영어로 유언을 남기기까지 한다!) 뭐, 제작자와 주요 소비층이 영어 사용자이므로 불가피하게 선택된 일이겠으나, 미국-자본이라는 거대한 필터로 걸러진 타국의 전통문화라는, 그 사실 자체가 자못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꾸만 미국-멕시코 국경에 세워진 거대한 장벽이 떠오르고 말이지. 그 국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헥터처럼 입(출)국을 거절당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죽음의 색깔에 대해서 생각했다. 할머니들은 왜 붉은색을 좋아할까? 이 영화에서 죽음의 색은 어두운 공간을 뒤덮은 빛나는 주황색이다. 예쁜 노을의 색깔, 실제로 그 뒤에는 검은 밤이 오겠지. 하루가 저무는 것처럼, 인생도 지난다. 노을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색깔이라서, 할머니들은 그 색을 좋아하는 걸까. 나도 나이가 들면 그런 색을 좋아하게 될까? 

   세 번째로는, 명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것이 진짜일까? 델라 크루즈의 명성은, 거짓과 악에서 비롯했음에도, 사후세계까지 이어진다. 미구엘이 난입해 깨트리지 않았다면, 노래와 스토리텔링의 원 주인인 헥터는 달동네에서 쓸쓸히 잊혀 사라졌을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헥터가 가족을 버렸다는 오해로 명절에 기억되지 않는 건 이해가 되지만, 음악적 성취는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용지물처럼 여겨졌다. 인간의 삶은 스스로의 평가가 아니라, 타인(후예)의 인정 여부로 평가되는 걸까? 멕시코의 사후 세계가 정말 그런 식일까?

   아무튼. 죽음이 두려운 것은 잊히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게 두렵기 때문에 사람은 기록을 하고, 아이를 낳고, 망자를 추존하는 이런저런 관습도 만들어 내었겠지. 하지만 기억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인생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곳곳마다 지는 노을의 색깔이 어떻게 모두 기억되겠는가.


새보미야




‘권선징악 속 고진감래’

-집 나가면 고생이다     


   영화 속 코코는 백발의 할머니다. 나는 그녀의 손자인 미구엘이 코코인 줄 알았다가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심지어 미구엘이 언뜻봐서는 여자아인줄) 하지만 영화가 끝이 나고 나서는 이해가 되었다. 나이가 들고 기억도 잊어가는 코코를 대신해서 서로를 잃어버린 코코아빠와 코코를 이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깐 말이다.   

   

   가족대신 음악을 선택한 고조 할아버지가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버린 코코네 가문에서는 음악은 고조할아버지와 동급으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다. 그런 금기를 깨고 코코의 손자 미구엘이 집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했거늘. 고조 할아버지나 미구엘이나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가족들의 의견은 저버린채 본인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간 댓가를 두 사람은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다만, 가족들의 손길이 닿지 못하고 커다란 방해물인 친구 때문에 고조 할아버지 헥터는 죽음을 맞이했고, 가족들의 사랑과 힘으로 역경을 견뎌낼 수 있게된 손자 미구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큰 차이가 있다.      


   꿈이냐 가족이냐의 단순한 선택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에 가족을 위해서라면 꿈도 포기할 수 있다고 한 미구엘처럼 헥터도 사실은 가족은 저버리고 자신의 꿈만 쫓으려던게 아니었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두 사람의 선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가족들의 이해와 포용, 그리고 서로가 함께 보여주는 가족애가 중요한 것 같다. 저승에서 끝내 모든걸 이해하고 도와주던 고조 할머니 이멜다를 포함한 죽은 가족들이나, 돌아온 미구엘의 꿈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이승 가족들 모두를 통해 충분히 보여주었다.  

   

   가족들간의 이해와 사랑을 깨닫기도 전에 못되고 사악한 에르네스토 때문에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죽어서도 사라질 뻔 했던 헥터의 삶은 훗날 미구엘이 풀어나가지만 너무 잔인했다. 헥터가 무작정 집을 나서지 않고 가족들 곁에서 해나갔다면 코코는 아빠를 잃어버리지도 기억을 잊지도 않고 함께 행복했을까? 잘 모르겠다. 물론 헥터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들이 아닌 다른 삶이 펼쳐졌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코코 또한 평생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지는 않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꿈을 선택했다고 해서 헥터에게 펼쳐진 일들은 가족이 먼저라고, 꿈이 중요한게 아니라고 강요하며 당연하게 일어난 것처럼 보여지는 부분이나 그의 선택이 흑백처럼 딱 떨어지는 하나의 선택,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것 같은 부분은 불편했고 안타까웠다.      


   너무 먼길을 돌고 돌아 왔지만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 행복한 결말로 끝이난 영화<코코>. 헥터와 가족들 서로가 함께하지 못하고 각자의 생각만 고집해서 멀어졌었지만 마지막까지 아빠를 기억 한 켠에서 간직하던 코코의 마음처럼 가족의 사랑과 가정이란 울타리는 결국 모든 것을 품어준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양보가 필요함을 잊지 않으면 말이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저승세계를 보며 즐겁기도 하고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고 묘한 안도감과 씁쓸함을 느꼈다. 상상 속 세상에서 예쁜 꽃길을 걷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모두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버리지말고 가족의 손을 꼭 잡고 꽃길을 걷길 희망한다.


새보미야




   브런치에 올릴만한 예쁜 글을 써야하는데 코코가 보여준 색채만큼 예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 글을 여러 번 쓰고 지웠다. 코코를 본 직후, 떠난 이들이 망연히 떠올라 울컥했던 그 심상으로 쓸 말들을 계속 떠올려 봤지만, 감정이 가라앉으니 영화를 보면서 재처 두었던 잡생각만 가득해졌다. 그래서 코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불편들에 대해 써보려 한다.      


   한국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길가에 널려 있다. 죽음은 이렇게 징벌적인 요소로 산자들을 위협하는데, 멕시코에서는 죽은 자의 날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가 “기억”이라는 매개로 연결될 수 있으며 죽음이 언제나 삶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축제로써 환영한다. 금잔화 꽃길을 따라 이승을 향하는 죽은 이들 만을 위한 날이 있다니, 얼마나 인간적이고 멋진 상상력인가. 그러나 이 상상력에 미국의 자본이 서사를 주입시키면 결이 달라진다.      


   미구엘은 죽은 고조부의 기타를 훔치게 되면서 망인의 세계로 접속할 수 있는 몸이 된다. 미구엘이 마주한 망인의 공간은 SF영화에서 볼법한 미래도시와 같은 이미지로 설계되어 있는데 공중엔 이동수단이 날아다니고 망자들은 도시인들처럼 바쁘게 다닌다. 망자들이 하고 있는 차림새들도 이승의 것과 다른 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뚜렷하게 보이는 망자들의 차림. 그리고 입국심사대는 이승에 준비된 재단에 망자의 사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허가, 불허가를 판단한다. 이 과정은 망자의 공간에서 조차 행정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아이러니로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귀신들이 행정절차에 순순히 응하는 장면을 보면서 관리체계가 소시민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관료적인 행정절차를 저승에서까지 경험해야 한단 생각에 죽어서도 참 어렵게 사는 구나(?) 싶었다. 이런 현실적인 생각과 맞물린 불편한 지점들은 영화가 진행 되는 동안 피상적인 이미지들로 등장한다. 작가는 서사에 몰입도를 더 보충하기 위해 기억되지 못한 망자를 현실에 존재하는 연민의 이미지들로 만들어내는데, 가족들에게 잊혀진 영혼들을 현실의 빈민층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로 구현해낸 것, 그리고 그런 잊혀진 영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실제 슬럼, 달동네(지금은 없지만)와 같이 소외된 공간으로 그려내는 구체적인 설정을 통해 관객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망자의 세계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조차 완전히 혼자가 된 영혼이 고통스럽게 소멸하는 장면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산 자들에게 죄책감을 동반하는 교훈적 메시지를 폭력적으로 던진다. 이는 죽음이 산 자에게 남겨둔 다양한 감정들을 배제한 채, 오로지 가족 안에서만 작동하는 책임감과 결속만이 최선의 추모이자 궁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가족드라마를 추구하는 영화에 가족 안에서만 작동하는 결속과 감정이 불편하다는 말을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코코>가 보편적인 가족의 사랑을 말하는 영화라는 감상에 조금 동의하지 못했을 뿐이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가족을 구성하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인적자원들을 얻는 것엔 보편이 따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이런 단순한 사실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장주희




변화한 디즈니의 시선과 코코


   아이들을 꿈과 희망의 나라로 인도한다는 디즈니, 한 때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는 온갖 차별적인 요소들이 가득했다. 백설공주부터 신데렐라까지, 초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수동적이었다. 백인 왕자로부터 인생을 구원 받았던 신데렐라는 지금도 그 이름이 비슷한 내용의 드라마 주제를 가리키는데 쓰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인종 차별적인 요소들도 두드러진다. 라이온킹의 애니메이션의 선한 역할인 밝은 색 털을 가진 무파사는 백인을 떠올리게 하고, 악한 역할로 짙은 색 털을 가진 스카는 유색 인종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사자 무리들은 백인의 영어 억양을 가지고 있고, 하이에나떼는 흑인과 히스패닉의 영어 억양을 가지고 있다. 이쯤 되면 노골적이다. 

   

   시간이 흘러 그랬던 디즈니가 변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한 아프리카의 나라에서 흑인 히어로들이 백인 악역들을 제압하고 어벤져스에서 가장 강력한 히어로는 여성 캐릭터다. 디즈니는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시대의 변화를 읽어냈고, 이들의 이런 판단은 적중했다. <블랙팬서>는 2018년 북미 박스오피스 전체 1위를 기록했고, <캡틴마블>도 2019년 상반기 독주를 이어갔다. 물론 이 영화들이 바르기만 하고 재미가 없었다면 이렇게 흥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디즈니의 상업 영화는 재미로 나무랄 것이 없다. 


   그리고 이제 멕시코 배경의 애니메이션 <코코>다. 이 역시 인구에서 히스패닉계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현재 미국의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리한 선택이다.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영화는 오프닝부터 파펠 피카도라는 멕시코 전통 종이 공예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흥행을 고려해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는 못하고, 대신 스페인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를 사용한다는 단점을 제하면 이 영화는 곳곳에서 멕시코 여러 문화를 잘 담아내었다. 과거의 <뮬란>과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배경만 가져왔던 것과는 다르다. <코코>에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프리다 칼로부터 멕시코 프로레슬링인 루차리브레 영웅 엘산토까지 멕시코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부분들로 가득하다. 


   영화를 보면서 디즈니의 이런 기획과 여기에 더해진 픽사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연출에 감탄을 하면서 보았다. 디즈니의 변화와 새로운 시선은 매 년 디즈니의 새로운 작품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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