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순삭된 기분이다. 생리기간인 데다 날씨도 저기압이라 텐션이 좀 떨어지고 뭐든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중간엔 결혼기념일이 있었는데 운 좋게 남편 J의 휴일이라 같이 근사한 레스로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기념일 같은 걸 잘 챙기지 못하는 나는 나보다 더 개념 없는 남편을 만나서 매번 부모님이 알람을 줘야 알아차린다.(이상하게 부모님은 두 분 다 그런 데 밝은 사람들임;)
처음에는 이벤트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쪽으로는 전혀 발전이 없는 남편을 타박이나 하는 것도 허무해서 부모님께 그 알람을 우리 친정 식구랑 남편 포함된 단톡방에 올려 달라고 해뒀다. 그랬더니 J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우리 결혼기념일이래~ 너무 늦게 알았다~"
"늦게 알긴. 하루 미리 축하해 주신 거니까 낼 갈 식당 예약해 놔~"
"아, 내일이야?"
언제는 미리 안 적이 있던가? 여하튼 부모님 덕에 식사는 하게 되었으니 올해는 무난하다. 선물은 당연히 생략. 여기에 선물이 괜히 끼어들다가는 빈정 상함의 미끼만 될 뿐이다. 그저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요구하거나 상의하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나는 어느 시점부터 미니멀리즘에 살짝 경도되어 중년 부인이 흔히들 좋아하는 명품 가방이니 액세서리, 옷 등에 관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가끔 좋은 신발을 갖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수년에 한 번씩 있는 일이다.
결혼 선물로 시어머니가 L사의 가방을 사주셨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가장 비싼 가방이었던 것 같은데 분가할 때 돌려드렸다. 어머니가 더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전혀 미련이 없었다. 가방은 아예 안 드는 편이 좋았고 아기가 생기고는 백 팩이나 에코백, 핸드백 같이 최대한 기동성 좋은 것이 최고다.
대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좀 더 중요해졌다. 물건은 수명도 짧고(굉장히 좋은 기간) 나중에는 짐이 되기 십상이지만 추억은 수명도 길고 언제까지나 함께해도 좋으니까. 그래서 좋아하는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가는 것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둘 다 그런 부분에서 뜻이 잘 맞았다.
어느 겨울의 이승환 콘서트, 서울 곳곳의 재즈 클럽들, 5월의 서울재즈페스티벌 등 추억들이 갑자기 촤라락 떠오른다. 그리고 여행은 일본으로 주로 갔는데 J의 휴일이 단 이틀임에도 교토 여행을 성사시키고 통장의 돈을 긁어모아 홋카이도 여행을 추진했었다. 모든 것이 P인간들의 즉흥적인, 의기투합으로 이뤄졌다. 홋카이도 여행은 코로나 팬데믹이 오기 직전의 일이었다. 코로나는 '즐거운 것은 미루지 말자'라는 나의 신조를 강화해 주었다.
J와는 여행의 시작과 끝 그 사이에서 다투거나 빈정이 상하거나 굉장히 지친 기억이 없다. 그저 웃겼고 즐거웠던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함께한 첫 여행 때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도쿄 여행이었는데 내가 도쿄 여행 경험이 있는 데다 언어가 조금 가능해서 여행 초반부터 많이 리드했었다. 그러다 마지막 날 공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리무진 정류장을 못 찾고 한참을 헤맸다. 일본인 안내 도우미에게 설명을 듣고 의기양양 리드했던 나는 어느 순간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가도 가도 뱅뱅 도는 듯한 길만 나왔던 것이다. 시간이 점점 촉박해지자 나는 이성적 판단력을 완전히 잃고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따라만 걷던 J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지도를 펼쳐 자기만의 방식으로 결국 정류장을 제대로 찾았고, 우리는 무사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었다. J는 결혼 결심 계기에 대해 질문받을 때마다 늘 그 일을 얘기했고 길을 처음 찾는 자신을 묵묵히 따라줬던 것이 고마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혼인 지인들에게 결혼을 할 만한 상대인가를 알고 싶으면 여행을 같이 가보라고 설파하고 다녔다. 그 말을 믿고 몇몇은 진짜 실행에 옮기기도 했으나 대체로 다녀온 직후 이별하는 사태가 벌어져 우리를 곤란하게 했는데, 따지고 보면 결혼할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 증명된 거 아니겠냐고 위안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일단, 다소 단단치 못한 멘털을 붙잡아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뢰가 갔고 무엇보다 이 만큼 잘 맞는 여행 메이트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인생도 흔히 여행에 비유되지 않나. 여행 메이트로 잘 맞는다면 인생 메이트로도 잘 맞겠지. 물론 그 시기쯤 결혼이 꽤나 급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단순히 나이가 주는 압박이 아니라 DNA가 요구하는 기분이었다. 너는 결혼을 해야 좀 길게 생존할 수 있어, 뭐 그런? 그래서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이 성사된 거다.
하지만 가족과 가족이 복잡하게 엮이고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은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살아온 역사가 판이한데 너무 공통점이 많다고 놀랐던 것들이 알고 보니 착시현상이었고 공작날개처럼 나를 현혹시켰던 J의 술수도 상당했다. 알면 알수록 너무나 다르고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결혼 사기 당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여덟 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오전에 일을 처리하느라 날이 섰던 나는 기어이 싫은 소리를 쏴댔고 J는 빈정이 제대로 상했다. 날도 날이라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이내 사과를 했지만 트리플 A형인 J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부띠끄 호텔 방불케 하는 로비가 짜잔 등장했다. 인테리어에 현혹되어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는데 J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장실 다녀온다고 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들려면 한도 끝도 없지만 뭐 하러 따지러 드냐, 귀찮게라고 생각해 버리면 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그러니 사과도 어렵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아낀다는 것이고, 지금 맛있고 멋진 곳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취향은 또 잘 맞으니까 이제부터 기분 좋을 일만 남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 보니 결혼기념일 특집이 되어버렸네? 에라 모르겠다. 우리가 서로에게 잘하는 한 마디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자긴 진짜 결혼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