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은 아프다
남편아, 몰디브 가서 모히토 한잔 하고 올게
오늘 하늘은 정말 예쁜 하늘색이고 푸들 모양을 한 구름들은 참 사랑스럽지만....... 내 기분은 왜 이렇게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일단 컴퓨터 앞에는 앉았지만 뭔가를 막 두드릴 의욕이 전혀 없다. 카톡을 열고 동생에게 기분이 왜 이렇게 다운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생리 전주 아니 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럼 pms인가? pms 대처 방법에 대해 찾아본다. 규칙적인 운동, 건강한 식생활,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관리로 삶의 질을 높이란다. 건강검진 결과지 제일 뒷장에 나올 법한, 하나마나한 소리하고 있네.
생각해보면 어제 언짢은 일이 하나 있었다. 고망이랑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는 실내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잘 놀고 있는데 중간에 고망이 또래 무리 넷이 우르르 들어왔다. 최근 부쩍 또래와 놀고 싶어하는 고망이가 그들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아직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법은 몰랐지만 곁에서 놀다보면 형, 누나들 같은 경우는 자연스럽게 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누나도 냉정한 얼굴로 "싫은데?" 했고 동갑인 친구도 "나는 친구 만들 생각이 없어"라는 조숙한 표현으로 일침을 날렸다. 그리고 왜 따라오냐고 아주 대놓고 거절을 했다. 고망이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그래도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큰지 말려도 따라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마다 성향이 틀리고 그때그때 기분도 다르니 껴주지 않을 수 있고, 특히나 무리지어 놀고 있을 때는 텃세 아닌 텃세를 부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고망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새삼 못되게 생겨 보이는 그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고망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저렇게 냉대 잘하는 애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별 까칠하게 말 잘하는 것들이 있더라며 J에게 뒷담화도 했다. 근데 그렇게 욕하고 넘겨버린 일로 왜 다음날까지 우중충해 있나.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글을 쓰니 문제가 명료해진다.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해 기분이 다운된 것이 분명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망이가 가진 발달적 어려움을 내가 잘 소화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으로. 머리로는 양육 방향도 분명하고 운 좋게 좋은 전문가들을 만나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으며 그래서 착착 그만의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무력감은 뭘까. 차가운 현실이 언제든 내 뺨을 후려칠 것 같은 불안감은? 엇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친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놨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구멍 좀 있으면 어때? 메우면 되지."
그런가. 그냥 허덕허덕 구멍 많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건가. 불안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건가. 그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딘가 마비되어 있나. 전화를 끊고 점심으로 비빔라면을 끓여 먹었다. 힘내자는 뜻으로 계란은 두 개나 반숙해 삶아 올렸다. 글을 쓰고, 대화를 하고, 먹었더니 훨씬 기분이 나아진다. 속이 차고 머리가 다소 명쾌해지자 어제의 일이 또 좀 다르게 보인다.
거절로 끝나긴 했지만 고망이는 분명, "잠깐 기다려 줄래?", "형아 같이 탈래?" 등등의 의미있는 대화 시도를 했다. 열심히 사회 경험을 한 것이다. 그렇다. 거절의 상처는 내 것이지 고망이는 아니다. 그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자 따라 나가려고도 했다. 고망이가 속상할 때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냉정하게 굴고 화를 낼 때다. 어쩌면 누구보다 '내'가 저기압이고 화를 낼 때일 것이다.
유독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도 이야기를 안 해 답답하던 어느 밤, 고망이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좋아요."
"응? 뭐가?"
어둠 속에서 내 품을 파고들며 로맨티스트가 말했다.
"엄마가."
다른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내가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는 거예요.
언제나 중요한 건 지금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우리가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보다.
#잊지_말자_이밤
#번아웃_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