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잉크부터 극대노 다이어리까지 문학의 여운을 신박하게 풀어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하이드가 쓸 것 같은 ‘극대노 다이어리’, 세계문학 15편을 색으로 구현해 낸 ‘잉크 전집’, 윤동주 시인의 책가방을 모티프로 한 다이어리까지 문학 작품의 여운을 이처럼 다채로운 제품으로 풀어내는 문학 디자인 브랜드 글입다(Wearingeul)는 벌써 텀블벅에서 20건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인기 창작자입니다. 덕후가 아닌 사람도 덕후로 만드는 글입다의 기획 비결이 무엇인지, 안동혁 대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글입다(Wearingeul) 팔로우
문화와 예술의 공감각적 해석을 더하는 브랜드, 글입다(Wearingeul). 글이 문학을 향기와 색으로 새롭게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글입다’는 캘리그라피 필명이었다고?
2013년~2014년 SNS에 한창 캘리그라피 붐이 일었다. 당시 행정병으로 복무할 때였는데, 붓펜으로 한두 번 끄적거리다가 재미가 붙어 딥펜을 사용해가며 군생활 내내 열심히 연습했다. 전역 후에는 본격적으로 SNS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브랜드로 나아가게 된 계기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이벤트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폰케이스에 원하는 글을 캘리그라피로 써서 만들어주는 이벤트를 했다가 주문을 받아줄 수 없느냐는 요청을 받아 브랜드를 시작하게 됐다.
캘리그라피는 글씨를 쓰는 작업이지만, 글을 깊게 읽고 새롭게 창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이나 영화, 노래 등을 인용하는 경우 압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정수’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 나의 생각을 덧붙여가면 창작력/문장력을 기를 수 있다. 글씨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쓸지 보다 어떤 글을 쓸까를 훨씬 더 오래 고민하게 하는 매력적인 취미다.
글입다를 널리 알리게 된, 책에 뿌리는 향수 ‘북퍼퓸'은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
글입다 브랜드를 시작하고 제품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리프레시를 위해 친구와 해외여행을 가게 됐다. 공항 면세점에서 향수들을 시향 해보다가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자리에 앉아보니 여권과 비행기 티켓에서 은은한 향이 나더라. 향수가 우연히 여권에도 뿌려진 것이었다. 종이에서 향기가 나다니 너무 새롭고 좋았다. 그때, “향이 책이나 다이어리에 더해지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책에 뿌려서 사용하면 책장을 넘길 때마다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북퍼퓸을 기획하게 됐다. 단순히 라벤더, 로즈마리처럼 흔한 향이 아닌 문학 작품을 모티브로 한 입체적인 향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전까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장이고 새로운 제품이라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많은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문학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걸까? 북퍼퓸부터 잉크까지 글입다의 모든 제품은 문학 작품에서 출발한다.
캘리그라피에 인용하기 위해 문학 작품들을 탐색하면서 좋은 문학 작품들을 흰 종이 위 활자로만 향유하는 것이 아쉬웠다. 활자 기반의 종이책 시장은 줄어들고 있다지만 문학 작품의 감성 자체는 시대가 변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북퍼퓸, 잉크 프로젝트 모두 종이 위에 누워있는 활자를 입체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콘텐츠로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다. 글입다 브랜드에서는 단순히 판촉물처럼 문학 작품의 제목이나 캐릭터만을 복사, 붙여넣기하는 제품은 지양한다.
사실 브랜드 히스토리로 보면 고전소설만 주야장천 읽을 것 같지만 현대소설, 현대시, 에세이, 웹소설, 웹툰 두루 본다. 소설 중에서는 성장 서사가 있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주인공이 먼치킨이든,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든 일사천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깨지고 좌절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가는 서사가 좋다. 최근에는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소설집을 재밌게 읽었다.
텀블벅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보면 윤동주 <별 헤는 밤>부터 헤르만 헤세 <데미안>, <오즈의 마법사>까지 하나의 장르, 국가로 분류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작품 선정 기준은?
2020년까지는 한국 문학 작품에만 집중을 했다면, 21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세계 문학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시와 소설을 넘나들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작가 및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인기도 분명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기획 과정도 재밌고 후원자의 반응도 좋았던 프로젝트는 대부분 작품을 관통하는 콘셉트를 제품에 잘 녹여냈을 때였던 것 같다. 작품 속의 이야기가 재밌어야 제품도 재밌게 나오는 것 같아 요즘은 이야기에 집중해 작품들을 선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텀블벅에서 18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시작 계기는?
텀블벅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는 <별빛의 색을 담아 시를 쓰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잉크>였다. 처음에는 수요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고, 이전에 사용자로만 있다가 본격적으로 처음 도전하게 되는 분야라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텀블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글입다(Wearingeul) 브랜드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하고 제품 이면의 스토리를 알아야 시너지가 나는데, 텀블벅에서는 그 스토리를 온전히 풀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아 계속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이전 프로젝트들에 대한 좋은 반응들이 누적되면서 그다음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줄었다.
문학작품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어떻게 근거를 마련하고 있나?
글입다의 문학 디자인 제품들은 주관적인 해석에 설득력을 어떻게 갖출지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이다. 사람마다 감상이 달라질 수 있는 세부적인 포인트를 주된 기획 테마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문학 작품의 모든 텍스트를 제품에 녹일 수도 없고, 모든 캐릭터를 전부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작품의 중심이 되는 핵심 키워드를 찾고 반영하는 게 관건이다. 담고 싶은 이야기가 아무리 많아도 그 욕심이 과하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게 기획인 것 같다. 그래서 핵심을 잃지 않는 선에서 덜어낼 것들은 덜어내고, 깨알 같은 디테일을 살려서 글입다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잉크>는 대단한 서사가 있기보다는 독특한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인 작품이어서 ‘정신 나간(lunatic)’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컬러 디자인을 했다. 렌티큘러 라벨도 조금은 어지러울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잘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지킬 투 하이드 잉크>는 후속 구매 문의나 해외에서의 수출 문의가 많았던 프로젝트다. 지킬 투 하이드 잉크의 핵심 키워드는 ‘변신(Transformation)’이었다.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변신하는 것을 잉크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선악 분리 실험을 사용자들이 해볼 수는 없을까 하여 주사기로 약물을 직접 주입하면 하이드 잉크로 변신하는 콘셉트를 고안하게 됐다. 다른 프로젝트들보다 훨씬 오랜 기간 준비했다.
덕후가 아닌 사람도 덕후로 만드는 글입다만의 스토리 작성 비결이 있을까?
누군가 펀딩 프로젝트의 스토리를 부분 부분 캡처해서 SNS에 업로드하더라도 프로젝트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흥미를 느낄 수 있게 광고 카피 만들 듯 스토리를 쓰고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보다 진중하게만 스토리를 작성했는데, 점점 드립 욕심이 생기더라. 그래서 봉인을 어느 정도 풀고 스토리를 작성하고 있다. 그렇게 작성한 스토리들이 보다 널리 홍보되기도 했다.
많은 후원자들의 동공 지진을 일으킨 만우절 치킨 잉크는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
일상에서 대화 중 “어라? 잠깐만” 하는 유레카 모먼트가 있을 때가 있는데 ‘극대노다이어리’, ‘독중감’, ‘단군일력’, ‘만우절 잉크’들이 모두 이런 맥락에서 기획의 물꼬가 트였던 프로젝트들이다. 만우절 글입닭 치킨 잉크는 잉크 제조사 대표님과 저녁 메뉴를 얘기하다가 만우절을 타깃으로 작정하고 만든 프로젝트였다. ‘이.왜.진?’이라는 생각이 들고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였는데 펀딩 금액이 어마어마하지는 않았지만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 같다. “이것이 묘하게 킹받는다는 거구나”라는 반응이었다.
펀딩을 많이 진행해 본 창작자로서 글입다가 생각하는 펀딩 프로젝트 기획의 핵심은 무엇일까
특정 필요에 의해서 구매를 하는 쇼핑과는 달리 펀딩 프로젝트에서는 후원자분들이 신박함을 느낄 수 있어야 실제 적극적인 후원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그게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고, 새로운 디자인일 수도 있는데 판매자/창작자가 느끼기에 새로움이 아닌 소비자/후원자가 봤을 때의 새로움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 프로젝트들을 진행할 때 과거의 글입다랑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현재 시장의 제품들과는 무엇이 다른가를 항상 고민하고 실현하려고 한다.
리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도 있다. <하이드의 극대노 다이어리>는 <지킬 투 하이드> 잉크에서 함께 소개했던 ‘The Confrontation Note’를 한쪽 면은 좋았던 일을, 한쪽 면은 안 좋았던 일로 기록한다는 리뷰를 보고 “어라? 나는 화났을 때만 쓰는데?”하면서 시작된 기획이다. 실제로 내 일기장은 극대노 다이어리가 아닌데도 대노(大怒) 이상의 기분으로만 채워져있다. 여기에 하이드 열 스푼과 지킬 한 스푼을 더해서 만들어진 게 하이드의 극대노 다이어리다.
앞으로 텀블벅 프로젝트 계획은?
‘문학의 색을 읽다’ 프로젝트인 문학 잉크는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시도들을 하면서 소개할 계획이다. 해외에서도 많이 찾고 있어서 한국 문학과 세계 문학들을 병행해서 진행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고전 문학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의 작품들로 넘어와서 여러 콜라보 프로젝트들을 준비 중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공개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실 수 있는 텀블벅 프로젝트들이 올해 하반기에는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한다. 항상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아쉽지 않게 예약되어 있으니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
인터뷰 글입다
편집 홍비
디자인 최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