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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파라거스 숲 (7/10)

by 걍마늘
아침에 서가를 정리하다 전날까지 없던 정체불명의 노란색 양장본을 발견한다. 집주인은 임대 조건의 변경을 요구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여자의 전화를 받는다.


서가 정리를 마치고 내친 김에 대대적으로 서점을 청소했다. 어질러진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고양이 밥그릇과 사료도 한쪽으로 잘 치워 둔다. 공간은 자아의 은유다. 흙만 남은 아스파라거스 화분은, 아무래도 좋았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빨랫감과 노란색 양장본을 챙겨들고 빨래방에 갔다. 빨래방에서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싶었다. 빨래와 독서.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결과는 깔끔하다. 나에게는 그런 암시가 필요했다.

차분히 세탁조에 빨랫감을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킨 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스툴에 앉아 책을 펼친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책이 존재했다. 끝내주는 책도 끝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해마다 수만 종의 신간이 쏟아져 나온다. 언제나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이 훨씬 많았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러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군가는 아랑곳없이 책을 썼다.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남은 분량이 줄어들고 있어 아쉬우면서도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다행히 두께가 있는 책이었고 세탁기가 동작을 멈출 때까지도 결말에는 이르지 못했다. 문득 책을 쓴 사람과 책을 서점에 갖다 놓은 사람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빨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계속되었다. 세탁한 옷가지를 옷장 안에 대충 던져두고 침대로 올라가 베개를 허리에 받쳤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는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제야 책을 내려놓았다. 결말은 완벽했다. 더는 읽을 내용이 없어 서운할 따름이다.

책을 훔친 사람도 그였을까. 다시 책을 살펴보려는데 책이 보이지 않는다. 침대 아래로 떨어졌나 싶어 살펴보았으나 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뜨린 적이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책에 푹 빠진 탓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불을 걷고 털어도 보았으나 나오는 것이라고는 오래된 먼지뿐이다.

달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가 고양이 밥그릇을 건드렸다. 책 도둑일까. 스탠드를 끄고 코드를 뽑았다. 소리 나지 않게 전등갓과 전구를 분리한 뒤 지지대를 해머처럼 들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 가리개를 걷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가로등 불빛이 서점 안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인기척은 없다.

걸음을 뗐다. 빛 웅덩이 속의 검은 덩어리가 안광 같은 동그란 두 개의 빛을 번뜩인다. 꼬리처럼 기다란 것을 안테나처럼 세운다. 놀란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고양이일까. 스탠드 지지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겁내지 말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러자 태연히 테이블 위로, 다시 그림책 서가로 훌쩍 훌쩍 뛰어오른다. 자세히 보니 네모난 뭔가를 입에 물었다. 책 같았다. 설마 이 녀석이.

고양이는 따라오라는 듯 나를 돌아보더니, 비고 페데르센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나는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몸을 날렸다. 그림책 속으로 사라져가는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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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고양이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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