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귀찮아서 잘 받지 않았었지만 이것저것 하다보니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어서 혹시 모르는 마음에 초록 버튼을 밀었다. 아니 그냥 홈버튼을 눌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고객님! SK 텔레콤입니다.
지금 쓰시는 기기를 새 기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
이런 전화들은 받자마자 3초만에 알 수 있다. 고객님을 반기는 인사는 대개 날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말이다. 아직까지 저들에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객은 내가 아닌 우리 아빠니까. 내 통신비, 식비, 자취방 월세, 내 명의로 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내 명의로 된 신용카드를 쓰지만 그 모든 돈의 출처는 아빠 계좌라는 사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이 하나 있다.
"죄송한데 제가 학생이라서요"
이 한 마디면 상담사는 알겠다며 곧 전화를 끊어준다.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는 일이 너무 어려웠던 내가 찾은 방법. 엄마도 전에 학생인 척 하면서 어른 안 계신다고 끊은 적이 있다고 하던데. 적당히 앳된, 너무 지긋하게 성숙하진 않은 목소리가 엄마를 닮았나.
다른 날 같으면 전화를 끊고 금세 잊어버렸을 텐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이것저것 지원해보고, 처음으로 기업의 홈페이지를 검색해 들어가고, 평생 생각도 안 해본 사업보고서라는 걸 들여다보고, 남들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4학년답게 먹고 살 궁리를 해온 지난 며칠이라 그랬는지. 문득 지난 번, 오빠가 자기 통신플랜을 직접 전화로 상담하고 바꾸던 게 떠올랐다. 전자기기를 잘 아는 똑똑한 아빠를 두었단 이유로 핸드폰도, 노트북도, 무엇 하나 내가 알아보고 산 적이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딸이 못 미더우면서도, 더 좋은 걸 알아봐서 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셨겠지. 지난 주말엔 졸업하기 전에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바꿔주겠다고 하셨었다. 분명 지금 쓰고 있는 핸드폰을 사 주면서도 들었던 말이다.
언제까지 아빠 뒤에 숨어사는 딸일 수는 없을텐데.
학생이라 잘 모른다는 변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별 것 아닌 광고 전화 따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