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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N잡러 Sep 14. 2020

빚쟁이의 중간정산

아무리 힘들어도 끝은 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2년 정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이 일, 저 일에 휩쓸렸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우리 집이 어려워진 것을 보고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뭐라도 뜯어먹으려고 주변에서 맴돌았다. 여기저기서 줄줄이 연락도 왔다. 돕겠다는 연락이 아니었다. 아직 기한이 많이 남은 돈을 일시 상환하라는 전화부터, 경매에 넘기겠다는 협박까지 꽤 많았다.    

  

매 달 나가는 이자도 몇 백이었다. 일정하게 나가는 돈에 맞춰서 나도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소송비용이라며 500만 원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돈이 더 필요했다. 마치 상대 팀에 둘러싸여 있는 투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한 명을 삼진 아웃시키면 다음 타자가 나왔다. 그 타자를 처리하면 다음 타자가 있었다. 9명의 타자를 모두 상대하고 이제 끝났으려니 하면 금방 다음 회 경기가 시작되었다.    


결국 손을 들었다.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나를 대신할 투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용병을 쓰기로 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용병은 저축은행이었다. 그곳에서 29%의 금리로 몇 백만 원을 빌렸다. 4대 보험을 내고 일하는 곳이 없으며, 안정적인 회사원이 아닌 나에게 1금융권 은행이 돈을 빌려줄 리 없었다. 여러 번 퇴짜를 맞은 후에 저축은행을 찾았고 그곳에서 돈을 빌린 거다. 이후에 돈이 필요할 때는 나를 받아주는 저축은행이 한 곳도 없었다. 결국 사채를 쓰기로 했다. 39%로의 금리로 팔백만 원을 빌렸다. 월 이자는 30만 원에 다다랐다. 나로서는 거액의 돈을 주고 데려온 용병이었다. 무리한 출혈을 했지만 결국 경기에서 이기고 내려올 수 있었다.     


저축은행과 사채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매 달 이자를 보내는 날만 되면 기분이 안 좋았다. 도둑놈에게 돈을 뺏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절실하게 돈이 필요할 때 빌려준 곳이라는 것을 자꾸 생각해야 했다. 만약 적기에 돈을 빌리지 못했으면, 한 달이 아닌 하루에 30만 원의 이자를 물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결국 4년간 원금을 웃도는 수준의 이자를 이체한 후에 용병과의 관계를 끝낼 수 있었다.     


한꺼번에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이체했다. 5만 원, 10만 원, 30만 원, 보낼 때마다 액수도 달랐다.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그 물건의 가격만큼을 이체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였다. 저축은행, 사채에 마지막 원금을 이체할 때 느낀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채가 저축은행보다 이자율이 높았기 때문에 사채를 먼저 갚았다. 먼저 전화를 걸어 총 보내야 할 돈을 물어봤다. 원금이 140만 원 남았다고 했다. 그 돈을 보냈다. 상환했다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자도 있다고 했다. 남은 이자 101,330원을 이체했다.


상환했다고 전화를 걸지도 않았는데 문자 한 통이 왔다.

‘0000-김00님 101,330원 상환처리 대출금 완제 처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완납 증명서 발급은 홈페이지 또는 모바일에서 본인 확인 후 바로 발급 가능합니다.’

그 문자를 캡처했다. 삭제할 수가 없었다.     


두 곳의 저축은행에서 빌린 돈도 순차적으로 갚았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원금이 얼마인지도 잊고 지냈다. 두 곳을 합하면 800만 원이 되겠거니 짐작만 했다. 전화해서 확인해보면 될 일이었지만, 굳이 내 빚을 정확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훨씬 시간이 지나서 원금을 갚기 위해 전화해보고 나서 알았다. 내가 두 곳의 저축은행에서 빌린 돈은 200만 원, 300만 원이었다. 이자가 비싸서 당연히 원금이 더 될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허탈했고, 이내 황당했다. 고작 저축은행에서 500만 원 빌렸을 뿐인데, 아무 곳에서도 내게 대출을 안 해줬다니. 사채로 800만 원을 빌린 후에는 사채시장에서도 더 이상 빌릴 수 없었다. 저축은행 500만 원과 사채 800만 원, 총 1100만 원이 정규직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나의 신용도였다.     


결국 다 갚았다. 내가 은행 빚을 먼저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의 배려였다. 자신들은 당장 쓸 돈이 아니니 은행에서 빌린 돈부터 갚으라고 했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서 내게 빌려줬던 친구는 내게 이자도 받지 않았다. 그 친구는 자기소개서 쓸 일이 생기면 부탁한다고 그걸 이자로 생각하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가 결혼하기 직전에서야 돈을 갚을 수 있었다. 그것도 원래 주기로 했던 때보다 더 늦게 갚아서,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빌려 혼수 비용을 마련했다. 이제 친구는 아기 엄마가 됐다. 가끔 친구의 카톡 사진에 있는 아기 얼굴을 보고 혼잣말을 한다.

‘아가야, 네가 필요한 거라면 다 내가 사줄게’

이자는 갚지 못했지만, 튼살크림과 임산부 옷 등을 자잘하게 선물하고 있다.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몇 년이 더 흘러 친구들에게 빌린 '원금'도 모두 갚았다. 친구들이 손사래 치며 받지 않은 이자는 어떻게 갚을지 계속 고민해봐야 한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경기는 끝났다. 힘든 척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힘들었다.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계속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물질적인 부침 뒤에는 어김없이 가족의 해체가 따라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단 하나, 가족이었다.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는 속수무책으로 동생을 잃었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사실은 오래도록 나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물론 나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었다. 나를 항상 지켜봐 주는 관중들과, 우리 팀 타자들이 힘을 보태줬다.     


불행이 한꺼번에 찾아올 수 있다. 그 대상은 한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고도 없다. 불행이 지진처럼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먼저 정신을 수습하고 그제서 불행의 잔해를 바라보게 된다. 잔해를 보며 뒤늦게 불행을 인식할 뿐이다. 잔인하게도 여진이 계속되기도 한다.     


큰 그릇이 되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물론 큰 그릇이 되기 위해 일부러 불행을 불러올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불행이 닥쳤다면, 수습할 정신은 붙잡고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무너진 집들을 보면서 ‘이걸 언제 다 치우지?’라고 생각하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지금 내 발 바로 앞부터 묵묵히 치우기 시작하면 된다. 한참이 지난 후에 뒤를 돌아보면 생각보다 멀리 나아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불행도 어느새 정리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불행이 찾아와 매우 아팠지만, 나의 그릇이 보다 커졌다’고 회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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