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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N잡러 Sep 13. 2020

버스는 나의 이동식 집무실

멀미를 안 해서 다행이에요, 네 참 다행이고 말고요.

카드 내역서를 보면 교통비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시내버스, 시외버스를 가리지 않았다. 버스를 많이 탔던 이유는 일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호프 서빙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술집이 아니면 새벽 시간에 일할 곳이 없었으니, 호프 서빙을 그만뒀다는 것은 그 시간대에 일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대신 낮 시간대는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밤낮 구분하지 않고 일했던 이유는 당장 목돈이 필요해서였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목돈을 해결한 후부터는 매월 몇 백 단위의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수업을 늘려가며 메꾸기 시작했다.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를 반 바퀴씩 도는 일은 일상이었다. 우선 1호선 지하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갔다. 노량진에서 수업을 마치면, 컵밥을 하나 사 먹었다. 노량진 수업을 할 때면 꼭 밥을 챙겨 먹었는데, 나와 같이 서서 먹거나 심지어 걸어 다니면서 먹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서서 먹는 일이 흉이 아니었다. 컵밥의 종류도 다양했다. 김치볶음밥, 베트남 쌀국수, 돈가스 덮밥, 스테이크 등. 그 날 그 날 사람이 덜 붐비는 곳에서 사 먹었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폭탄밥을 먹었다. 


폭탄밥은 양념장과 고기 가루, 계란 프라이가 들어간 음식으로 맛있게 매웠다. 몇 년 전 스터디를 하러 이 곳에 왔을 때는 폭탄밥을 먹고 배가 쓰렸지만 이제 물 없이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쯤 사람들이 왜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것을 먹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0분간 후다닥 밥을 먹은 후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분당으로 가는 빨간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다음 수업 준비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분당에서의 다음 수업을 소화하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고맙게도 분당에서 일산으로 한 번에 가는 빨간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를 타면 서울을 뚫고 가는 것보다 시간이 절약됐다. 일산 수업을 마지막으로 잡은 것은 그 시간대에 도로가 밀리지 않아서였다. 이때는 버스에서 1시간에서 1시간 30분가량 보냈다. 이 시간에도 수업 준비를 하고 책을 읽고 잠도 잤다. 일산에서 수업을 마치면 무조건 뛰어야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졌고, 신촌에 도착해서도 몇 번 더 환승을 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어서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서울과 그 주변 도심들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나의 버스노선은 점점 확장되었다. 편도 두 시간 걸리는 지방에서도 수업을 시작했다. 학원 수업은 10시면 끝났고, 버스는 10시 30분 막차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집에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게 미쳤다고 했다. 서울에서 수업을 더 하면 되지, 왜 먼 곳까지 자처해서 가느냐고 물었다. 친구들 말대로 서울에서, 한 곳에서 전임강사를 하면 몸은 더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임강사는 파트타임 강사보다 더 오랜 시간 학원에 상주함에도 불구하고, 추가된 시간만큼 월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수업연구시간은 학원이 아닌 버스 안에서 하는 것이 나에게는 효율적이었다. 도착하면 그 순간부터 바로 수업하고 끝나자마자 잡무 없이 퇴근할 수 있는 학원. 이것이 나의 학원 선택의 기준이었다. 


지방으로 출강을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서울에 비해 학원 강사의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의 값어치는 더 높게 매겨졌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원은 10시면 끝나기 때문에 지방에서 10시에 끝난다 한들, 그때부터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더 일할 수 있는 시간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 어릴 적 수학여행 가는 버스를 타면 멀미하는 아이들이 귀 밑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귀 밑에 멀미 방지 스티커를 붙이면 ‘가녀린 여자애’ 인증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멀미를 하고 싶어서 손가락을 입 안 깊숙이 넣어보기도 했지만, 우웩!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멀미한 적이 없고 결국 그 스티커는 한 번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때는 멀미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강점인지 몰랐다.


내게 버스는 놀이터였고 독서실이었다. 중학생 때는 일부러 친구와 버스에 탔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다 보면 종점이었고, 우리는 다시 돈을 내고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아마도 버스 기사님은 종점에서도 내리지 않고 다시 돈을 내고 앉아있는 우리가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버스 안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수학 문제집을 들고 버스에 타서 버스 안에서 문제를 풀었다. 서울 파란 버스는 이동거리가 꽤 길고 길도 막혀서 버스를 타고 돌고 돌면 시험 범위를 다 풀 수 있었다. 친구들은, 머리 아픈 수학을 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공부하냐며 나보고 별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 정거장마다 1문제 풀기, 남대문시장까지 20페이지를 풀면 내려서 칼국수 사 먹기. 이런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공부하는 게 재미있었다.      


대학 입학 후에는 그렇게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었지만, 여전히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지하철을 타면 20분이면 오는 거리도 버스를 타고 1시간을 채웠다. 나는 주로 버스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한동안 100문 100답이란 게 유행했다. 그때 스트레스 푸는 방법으로 이것을 적었다.

‘버스 오른쪽 맨 앞자리에서 창문 열고 바람맞기’


버스를 나만의 공간으로 이용하다 보니 내릴 곳을 자주 지나쳤고, 잘못 환승하여 아예 다른 지역으로 가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몇 배 더 오래 걸렸지만 책 읽을 시간은 늘어났다. 멀미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예전엔 버스를 재미있게 탔다면, 이제 살기 위해 타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버스를 좋아했다. 버스에서 책도 읽고 노트북으로 수업준비도 하고 잠도 자고...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입 논술시험이 코앞일 때는 일주일에 전국의 반을 돌았다. 서울에서 경남 사천으로. 경남 사천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경북 포항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강릉을 찍고서 마지막에 홈그라운드를 찍었다. 이렇게 멀미하지 않은 덕분에 꽤 먼 곳으로도 수업을 갈 수 있었고, 이것은 나의 강점이 되었다. 


만약 멀미를 했다면, 버스 타고 특강을 다니는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니, 그전부터 짚어보면, 친구와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왔다 갔다 하거나, 버스 안에서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대학생 때도 시간을 절약한다고 종로에서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면, 버스로는 1시간 걸리는 시간을 20분으로 단축했다면, 나는 집에서 책을 읽었을까? 오히려 20분 동안 지하철에서 서서 오면서 그 20분마저 허비하지 않았을까? 경북 사천은 너무 멀다고 수업 제의를 거절했다면 평생 수도권을 벗어날 일이 있었을까? 사천, 포항, 대구의 돼지국밥이 얼마나 맛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게 분명하다. 비록 연약해 보이는 일은 실패했지만, 멀미하지 않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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