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이름은N잡러 Sep 12. 2020

돈 버는 기계가 되리라

우리 가족은 내가 지킨다

신문사 인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학생기자를 했던 터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언론고시반 지도교수님께서 그 신문사에 입사한 제자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고 전화하셨다. 그렇게 알게 된 선배는 나의 멘토가 되었다. 만약 선배가 내게, ‘기자가 되려면 구정물을 마셔야 한다’라고 했으면 구정물을 마셨을 것이다. 선배의 말은 나에게 계시였다. 나는 선배로부터 기사 쓰는 방식, 필사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선배는 기사를 쓸 때도 발상이 중요하다고 했다. 풍부한 예시를 들어줬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예시는 바나나였다. 선배는 바나나가 옛날에는 부잣집에서만 먹을 수 있던 과일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싼 과일 중에 하나라고 지적했다. 필리핀의 환율을 바나나 예시를 시작으로 풀어나가면 참신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동안 기사와 창의력은 다른 차원에 속해있다고 생각했기에, 선배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입사할 때 받았던 기사 작성 매뉴얼 책도 내게 주었다. 그동안 받은 그 어떤 상보다 값졌고, 그 어떤 상을 받았을 때보다 기뻤다.   

  

어느 날, 선배가 계시를 내렸다. 대학원 진학을 고려해보란다. 신문사 입사 후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다들 힘들어한다고 했다. 선배도 그렇단다. 그러니 대학원을 다니면서 언론고시 공부를 해서,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입사하라고 했다. 즉시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경희대학교 언론대학원과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총 두 곳을 골랐다. 경희대학교는 모교이기도 하고, 언론고시반 지도교수님이 계셨기에 지원했다. 서강대학교는 언론학과가 유명한 곳이라 지원했다. 


경희대 면접이 먼저 있었다. 대학원에 지원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내가 면접장에 가니 교수님께서 놀라셨다. 언론고시반에서 내가 모범생 이미지는 아니어서, 대학원에 진학할 거란 생각은 못하셨던 것 같다. 놀라는 교수님을 보니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리 말씀드리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서강대학교 시험이 남아있었다.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드디어 하루 전 날이 되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전화 한 통이 왔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가던 길인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주저앉았다. 다음 날, 시험 보러 가지 않았다. 나는 대학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집에 경제위기가 닥쳤다. 부동산 투자를 하는 우리 집은 매달 고정적인 지출이 있었다. 레버리지 효과를 이용해 투자를 해왔기 때문이다. 매 달 몇십이 아닌 몇 백만 원의 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동업자의 배신으로 이자 감당이 어려워졌다. 빚이 무서운 이유는 자칫 이자상환의 박자를 놓치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어서다. 이자 납부일에서 하루만 연체되어도 연체이자가 30만 원씩 추가되었다. 30만 원은 월 이자가 아니라 하루 이자였다. 그 마저도 두 달간 연체되면 경매가 진행된다. 밀린 이자를 납입하여 경매가 중단되면, 경매 대상 부동산의 측량비 등 몇 백만 원의 청구서가 날아왔다. 한 박자라도 놓치면 그대로 끝이었다. 나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우리 집이 빈털터리가 될까 봐 걱정했던 건 아니다. 그저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일평생 오직 하나, 가족뿐이기에. 우리 집에 닥친 경제 위기가 우리 가족을 할퀴고 갈까 봐 불안했다. 더 이상 목표는 대학원 진학이 아니었다. 대학원은커녕 신문사 문턱에 가보지 못해도 좋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꿈이 기자였지만, 내 꿈 따위는 이제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몸이 약한 엄마가 행여나 충격을 받아 건강이 악화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 때부터 우리 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연기했다. 아빠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태연한 척했다. 집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소란스럽게 지냈다.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종영일이 없었다. 나는 일일드라마의 주인공들보다 더 오랜 시간 연기했다. 가끔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면, 이불속에서 울었다. 이미 친구들보다 좀 더 많은 위기를 겪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위기가 남아있다니. 이제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추운 칼바람에도 무너졌다. 나는 들키지 않는 선에서 슬퍼했다.     


면접을 봤던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메일 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을 쯤에는 마음을 추스르던 때였다. 그래도 합격통지서가 아파서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면접장에서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깜짝 놀랐을 교수님은, 아마 개강 날 내가 보이지 않아서 한 번 더 놀라셨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을 찾아뵐 용기는 없었다. 나는 숨었다. 교수님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돌아섰다. 어느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나는 부재중이었다.


동생은 군 입대를 했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 집을 둘러싸고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서 동생은 벗어나 있는 편이 좋았다. 2년 남짓한 군 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순간, 이 누나가 모든 상황을 해결해놓겠노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내 동생만큼은 꽃길만 걷게 하고 싶었다. 나이차 많이 나는 누나의 마음이었다.     


나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원래 꾸준히 돈을 벌어오던 내가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은, ‘돈만’ 벌겠다는 뜻이었다. 눈을 뜨면 돈을 벌기 위해 나갔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돈을 벌었다. 가끔 꿈에서도 돈을 벌었다. 돈 버는 일만 생각하고 사니 당연한 일이었다. 꿈에서마저 고되게 일한 날은 두 배로 일한 기분이어서 억울하기도 했다. 매일 일을 하고 쉬는 시간에는 인터넷에 들어가 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며 매 달 공휴일이 며칠인지 세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365일 일했다. 일 년이 1000일이었다면 1000일을 꽉 채워 일했을 것이다.      


당시 나의 다이어리는 시간대별로 스케줄이 적혀있었다. 한 친구가 내 다이어리를 보고 얘기했다. 

“밥은 언제 먹어?” 

“밥시간?”


밥 먹는 시간이 없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동시간에 끼니를 해결해서다. 지나가다가 김밥 한 줄이 1500원인 곳이 보이면 한 줄 샀다. 일 하나가 끝나고 다음 일자리로 이동하면서 먹었다. 가끔은 김밥 한 줄조차 다 먹을 시간이 없어서 김밥 한 줄을 두 끼로 나눠 먹었다. 김밥집에서 김밥을 주문하곤 곧바로 가져온 텀블러에 정수기 물을 담아왔다. 그리고 함께 먹었다. 김밥과 값이 엇비슷한 음료수를 사 먹는 건 호사였다. 어쩌다 1+1 행사를 하면, ‘이 정도는 사 먹어도 되겠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허락을 받고 구매했다. 분명 가방은  음료수 무게만큼 더 무거워졌겠지만, 1+1으로 구매한 음료수는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결국 부재중이던 소셜 네트워크마저 모두 탈퇴했다. 어쩌다 한 번씩 로그인하여 들어가면, 누군가의 안부 글이 올라와 있곤 했다. 데면데면 아는 사람들이 인사치레 남긴 ‘잘 지내고 있어?’, ‘뭐하고 지내?’라는 말은 폭력처럼 느껴졌다. 그 질문에 잘 지내고 있다고도 답할 수 없었으며, 뭐하고 지내는지는 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보통은 결혼 준비를 하고 청첩장을 보낼 때 처음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된다고 하던데, 나는 그보다 훨씬 일찍 ‘자발적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대학원 합격 통지 메일도 삭제했다. 돈 버는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지웠다. 일하는 기계가 되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빚쟁이가 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