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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Oct 23. 2020

살기 위해 베를린에 가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자유로움이 담긴 그라피티, 알록달록한 카페와 식당, 웃고 떠드는 사람들. 이렇게 활기찬 곳에서 오래된 전통을 고수하는 공동체가 있다.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실화 바탕의 원작을 영상으로 옮겼다.



구레나룻을 길게 땋은 남자들의 까만 롱코트. 머리에 가발을 쓰거나 두건을 두른 여성들. 유대교 하시디즘을 믿는 신실한 종교인들이다.  음식, 관습, 문화, 규율 모두 21세기 사회가 아닌 성서를 따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 가정, 무엇보다 아이이다.



탄생과 함께 짊어지는 의무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기리는 의미로, 여성들에게 임무가 생긴다. 죽은 목숨을 대신하여 새로운 유대인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일생의 목표가 탄생하기도 전에 정해진다.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고 잘 기르는 것.'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하므로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


결혼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서 성관계에 관한 조언을 받는다. 피를 흘리지 않을 때에만 남편과 같은 침대를 쓴다. 그리고 매주 정해진 날에 관계를 맺는다. 누구도 강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성한 축복이다. '가정을 꾸리면 인생이 달라질 거야.' 주인공 에스티는 할머니 바비의 말을 믿었다. 면사포가 얼굴을 완전히 덮고, 앉아서 기도문만 읊고, 불편함 차림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결혼식. 기나긴 시간을 버텨낸 에스티는 환하게 웃었다.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으로.


하지만 에스티는 달랐다. 음악을 좋아해서 피아노를 몰래 배우러 다니고, 남성만 배우는 『탈무드』를 안다. 이 정도의 다름은 알게 모르게 용인되었다. 에스티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받은 건 다른 이유다. 관계를 할 때마다 아프다고 하고, 아이를 갖지도 못하고, 다른 기혼 여성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남편 얀키는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 에스티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본인이 문제인 줄도 모르는 얀키. 되려 에스티를 탓한다. 네 가족 사이에 감히 나만 두고 갔다, 너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네가 문제다. 끝으로 이혼을 들먹인다.


에스티가 먼저 집에 돌아온 건 몸상태가 나빠서였다. 이유가 밝혀졌다. 자신도 남들처럼 아이를 품었다. 에스티는 또 기대했다. 모두 자신이 문제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이제 정말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기대는 금방 무너져 내린다. 어머니의 말을 따라 이혼하겠다는 얀키. 줏대 없는 남편, 숨 막히는 공동체, 맞지 않는 규율과 규칙. 이곳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그렇게 에스티는 몇 푼의 돈과 할머니 바비의 사진, 여권만 들고 베를린에 도착한다. 탈출을 도와준 피아노 선생님의 선물, 나침반도 함께.



신실한 유대 사회에 살던 유대인이 독일을 택했다. 어떻게 보일지 에스티도 안다. 왜 독일을 택했을까? 사실 에스티는 독일 시민이기도 하다. 조모•부가 독일인이다. 에스티의 어머니가 알려준 사실이다. 어린 에스티를 버리고 유대 사회를 떠난 어머니이지만, 베를린에 온 이상 선택지가 없다. 어머니의 집으로 가 벨을 누른다. 어떤 응답도 들리지 않는다.


근처에서 어머니를 마주친 에스티. 조금씩 다가가던 에스티는 이내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어머니가 어떤 여성과 다정한 스킨십을 나눈다. 여태 '틀렸다'라고 배워 온 관계의 형태였다.



족쇄를 벗어던지다

에스티는 카페에서 한 남자의 커피 배달을 돕는다. 근처 음악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다. 남자와 그의 친구들은 에스티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연습 중인 홀로 들어간다.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여러 악기가 얽히고 얽혀 선율을 이룬다. 에스티의 꿈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에스티는 연습이 끝난 그들과 마주친다. 호수로 놀러 가는 무리들. 에스티도 합류한다. 다섯 명 모두 살아온 배경이 달랐다. 이스라엘, 나이지리아, 예멘, 폴란드, 독일. 공통점밖에 없었던 좁은 사회에서 나와 커다란 세상과 마주한 에스티.


남자는 짧게 호수의 역사를 들려준다. 호수 건너 저택에서 유대인 학살을 결정한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며 헤엄쳐 온 사람들을 동독 경비대가 죽였다. 잔혹한 과거. 에스티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은?' 남자는 답했다. '마음껏 수영할 수 있지.' 과거의 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현재에 산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간다. 에스티도 이곳에 과거를 내려놓는다면, 나중엔 현재를 즐길 수 있을까.


수영복을 갖춘 사람들과 달리 앞 뒤로 꽉 막힌 옷을 입고 한 발, 두 발, 호수로 다가선다. 가발을 벗고, 제 머리카락에 닿는 물의 흐름을 그대로 느껴본다.



머리칼이 이렇게나 가벼웠다.

해방감.

에스티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꿈이 생겼다. 음악원에서 자신도 음악을 배우고 싶다. 다행히 특별 장학금 제도가 있다.


오디션을 보기 며칠 전, 친구들과의 디너파티에서 에스티는 피아노를 친다. 실력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친구 중 하나가 거친 말을 쏟는다. 수준이 안 맞아. 우리에게 모욕이야. 뛰쳐나온 에스티는 집에 전화를 건다. 언제나 에스티를 지지해준 할머니 바비가 응답한다. 하지만 에스티가 말을 건네자 전화가 끊긴다.


아무도 에스티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유대인 사회에서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다. 그것을 견디다 못해 더 넓은 세상에 나왔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놀고 싶은 곳에서 노는 자유로운 세상. 하지만 이 세상도 말한다. 너는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에스티.


에스티가 떠난 유대인 사회에서는 행방을 쫓는다. 남편 얀키와 그의 사촌이 랍비의 명을 받아 직접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들이 에스티를 데려오려는 이유는 하나다. 얀키의 아이, 즉 유대인의 아이를 가졌으니 이 곳에서 살아야 한다. 누구도 에스티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미친 애'가 되었다.

얀키의 사촌은 이전에 유대 사회에서 제명당했다. 랍비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사촌은 이번에도 교리에 어긋난 방식으로 손쓸 것이다. 랍비는 안다. 그러나 침묵한다. 유대인의 아이와 아이를 키울 여성을 제자리에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족쇄를 에스티는 저항할 수 있을까?



달라도 괜찮은 세상

에스티는 길가에서 사촌을 만난다. 뛰고, 뿌리치고, 저항해도 무력은 이기지 못했다. 사촌은 회유와 협박을 오가다 리볼버를 내민다. 능력도 없이 타지에서 살다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것이라며. 벌벌 떨던 에스티는 어머니의 집에 다시 찾아간다. 이번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얀키와 그의 사촌이 들이닥친 터라 에스티의 상황을 알았다. 얀키와 사촌의 위협에 애인은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에스티가 직접 선택할 일이라면서. 에스티는 모를 테지만, 에스티의 생각이 처음으로 존중받았다.


어머니는 진실을 알려준다. 에스티를 버리고 도망친 게 아니라 유대 사회에 뺏겼다고. 그리고 약속한다. 에스티도, 에스티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들 가족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못할 것이다. 어머니도 충분히 교육받지 못해, 노인 요양시설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제 삶을 선택한 두 사람이 만들 이야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오디션 날, 에스티는 피아노 대신 성악으로 종목을 바꾼다. 반주자도 불러두었다. 남자가 요전에 소개해준 반주자와 합을 맞춘다. 노래가 끝나고, 심사위원이 묻는다. 에스티의 음역대와 맞지 않는 노래라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고. 에스티는 고민 끝에 이시디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 결혼식 때 남자들이 불렀던 노래다. 에스티가 살던 곳에서는 여성이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 행위가 유혹이라고 여겨진다. 에스티는 제 목소리로 홀을 채운다.


얀키는 안으로 들어와 에스티의 노랫말을 듣는다.

울분에 찬 목소리, 자유를 갈망하는 손.



오디션이 끝나고 에스티는 얀키와 걷는다. 전에 없이 활기찬 에스티의 모습. 얀키는 선물이 있다며 제가 묵는 호텔방으로 초대한다. 목걸이를 건네며 에스티에게 말한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같이 돌아가자고, 모두에게 용서받을 것이라고. 에스티는 거절한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자, 얀키는 에스티처럼 '다름'을 택하겠다며 구레나룻을 자른다. 하지만 얀키는 너무 늦었다. 진짜 삶을 느낀 에스티에게 보여주기 식은 통하지 않는다.


호텔에서 나가던 중, 사촌을 마주친 에스티. 술에 취한 사촌은 또 에스티를 붙잡는다. 이번엔 에스티가 한숨에 사촌의 팔을 뿌리친다. 자유롭게 길을 걷고, 사람들을 스친다. 다른 머리, 다른 옷차림, 다른 생김새. 이렇게 다름이 가득 찬 세상에서 에스티의 다름은 배척당하지 않는다. 에스티를 믿어주는 어머니와 그의 애인이, 에스티가 지닌 힘을 알아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다름이 이상함으로 치부되지 않는 세상에서 에스티의 노래가 더 멀리 뻗어가기를.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원작

도서 Unorthodox: The Scandalous Rejection of My Hasidic Roots


감독

마리아 슈레이더


출연

시라 하스(에스티 役), 알렉스 레이드(에스티 어머니 役), 아미트 라하브(얀키 役), 제프 빌부슈(사촌 모이셰 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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