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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Oct 12. 2020

유쾌한 젤리 판타지물이라고 생각했다면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남색 교복, 초록색 체육복, 흰색 가운, 쥐색 바지, 그리고 주황색 젤리. 온갖 색들이 얽히며 첫 화가 시작했다.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다.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을 제목이다. 동명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각색한 작품, 맞다.


기존 창작물(글)을 새로운 채널(영상)에 맞게 각색하는 일은 차고 넘친다. 다만 원작자 정세랑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 과정에 참여했다는 소식에 트레일러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미쓰 홍당무>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원작을 헤칠 우려가 적은 데다가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가 곳곳에 터져 나올 것이 분명하다.


감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예상만큼이나 유쾌하고, 유쾌하기 때문에 슬픈 이야기였다.


나만 아는 세상

주인공 안은영은 제목대로 고등학교 보건교사다. 그런데 수식어가 필요하다. '젤리를 보는' 보건교사 안은영. 여기서 젤리는 우리가 즐겨 먹는 간식거리가 아니다. 사람의 욕망이 형상화된 것이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누구도 볼 수 없다. 표정, 말투, 행동을 통해서 느낄 순 있어도 이를 사물로 빗대어보기는 어렵다. 아니, 그럴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그러나 안은영은 어려서부터 세상에 들끓는 '젤리'들을 보았다. 우리는 그 세상을 화면 너머에서 처음 마주한다. 시꺼멓고 넙데데한 생김새가 꼭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았던 '오물 신' 같던 두꺼비 젤리, 게임에서 레벨이 낮을 때에나 상대했던 몬스터처럼 앙증맞은 문어 젤리. 안은영은 색색깔로 번쩍이는 장난감 칼을 들어 젤리를 무찌른다. 그럴 때마다 젤리는 파티에서 터뜨리는 폭죽처럼 알록달록하게 바뀌어 통, 통, 터진다. 물처럼 어딘가에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 광경을 안은영만 눈에 담는다. 학생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은 어리둥절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괴상한 해프닝이 생겼더라고.


보통 보건교사라 하면 보건실에서 소화제를 꺼내 주거나 흰색 솜으로 상처를 톡톡 두들기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안은영은 보건실만 지키고 있을 수 없다.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젤리를 처치해야 한다. 해야 할 업무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업무가 배로 늘어난 셈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칼을 허공에 휘두르는 안은영. 그 행동을 봐도 다른 사람들은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독특한' 선생님이라서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하다고 느낀다. 되려 안은영이 좋은 선생님이라며 보건실 침대 한 자리를 제 것처럼 차지하는 학생도 있다. 평판이 좋다고는 확신할 수 없으나, 나쁘지는 않다.



학교의 안전을 위협하는 젤리와 그 젤리를 이용해서 학교를 꿰차려는 사람들 틈에서 안은영은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은영의 과거가 살짝 드러난다.


그래도 살고 싶어서

암울한 표정, 상처 난 얼굴, 꾀죄죄한 머리. 안은영은 지금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아이의 모습인데도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겼던 탓이다. 학생인 은영에게 학교는 하루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은영은 교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쟤 귀신 본대, 더러워, 냄새 나, 싫어, 이상해. 은영의 교실 천장에는 꺼멓게 썩어버린 듯한 사람의 상반신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정말 귀신인가? 아니다. 우리가 초반에 보았던 그 젤리들이다. 그러니까 은영의 눈에만 보인다. 젤리의 모습이 점차 변한 것인가? 아니, 젤리는 그대로다. 변한 건 '시선'이다.


안은영 옆에는 그 못지않게 아이들이 피하던 아이가 앉았다. 끔찍한 젤리가 보인다는 은영의 말을 유일하게 들어준 친구이기도 하다. 짝꿍은 제가 그린 만화를 내밀며 말을 얹었다. 도구를 써.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며 살아. 종이 만화에 담긴 은영은 짧은 머리에 긴치마, 운동화 차림으로 허공에 장난감 칼을 가른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처럼 표정도 제법 진지하다. 지금의 모습과 똑 닮았다.



안은영은 세상을 만화처럼 보기 시작했다. 징그럽고 기괴한 젤리가 아니라 우습고 유치한, 죽을 때 펑펑 터지는 젤리. 약간의 점성과 말랑함, 탱탱함을 겸비한 젤리. 친근하고 귀여운 젤리. 자신의 괴이함을 엽기적인 행각쯤으로 커버할 무기도 구한다. 밝고 강렬한 형광색 검. 이제 사람들 눈에 귀신을 보는 우중충한 안은영 대신 우스꽝스럽고 유별난 안은영이 담긴다. 은영의 말투, 성격, 습관까지도 그 사람다운 성질이라고 받아들인다. 툭툭 내뱉는 욕지거리도, 뚱한 표정도, 뜬금없는 엉뚱한 행동도 다 이해 가능한 범주로 들어온다.

그렇게 안은영은 '보통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안은영은 행복해졌을까?

보통의 범주에 들어갔어도 젤리가 보이는 이상 평범하게 사랑받을 수 없다. 지금의 안은영은 젤리에 관해 말해도 학생들이나 선생들에게서 질타를 받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은영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은영다운' 상상이라고 웃어넘기겠지.


젤리와 일생을 보낸 은영에게 꿈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젤리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은영은 보통 사람들이 보는 보통 세상을 본다. 꿈같은 시간은 정말 꿈이었는지 안은영의 시야에는 다시 젤리들이 들어찼다. 야속하다.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안은영이 해왔던 노력을 세상이 알아주었더라면 이토록 박하게 굴 수 있을까. 아마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안은영이 풀어나간 묵직한 이야기를 유쾌한 판타지물로 인지한 대다수가 그러하듯.



편견을 유쾌함으로 맞서고, 유쾌함은 한계에 부딪힌다. 은영의 장난감 칼, 비비탄 총, 봉숭아 물들인 손톱 등은 그럴싸한 방패였을 뿐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 각자가 지닌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껍질의 모양새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민다. 질타하고, 평가하고, 폄하하고, 왜곡한 기록들과 그 기록들이 만든 무수한 상처. 여전히 이어지는 악습의 굴레. 변했다 혹은 이상하다고 누군가를 평하기 전에, 이 생각을 해보길 바란다. 그 사람의 알맹이가 바뀐 건지, 껍질이 바뀐 건지. 껍질 때문에 알맹이가 왜곡된 것은 아닌지. 만화 같은 환상에 속아 진짜 젤리들을 보지 못한 건 아닌지.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판타지, 코미디

원작

도서 보건교사 안은영


감독

이경미

출연

정유미(안은영 役), 남주혁(홍인표 役), 문소리(화수 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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