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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Dec 27. 2023

멀어지며 미어지기를 택한 마음

영화 <클레오의 세계>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언제 봐도 마법 같은,『데미안』속 문장이다. '새'와 '알'은 세상 모든 성장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사는 동시에 내일을 향한다. 삶의 여정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목적지가 저곳이라면, 지금 발 디딘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잃는 동시에 얻는다.


이 사실을 개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정립할 수 있는 건 시간이 꽤나 흘러서지만, 이제 막 자라는 아이일 때부터 사실 이동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딱 이맘때의 아이 '클레오'를 영화에서 만난다. 한창 자랄 일만 남은 여섯 살 과 그 아이가 훨씬 더 미약했던 시절부터 함께한 유모 '글로리아'.


클레오의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의 시점을 온전히 담고자 노력한 영화이기에, 글로리아뿐인 클레오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필 때다.



*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의 일과는 단순하다. 일어나 글로리아와 유치원에 가고, 끝나면 글로리아와 손을 잡고 조잘조잘 떠들며 집으로 돌아간다. 먹고 씻는 사이사이에 장난도 치다 보면 까무룩 잠들고. 가끔 만나는 아빠와 짤막한 인사를 나누며 또다시 글로리아와 단둘이 하루를 보낸다.


유일하게 글로리아가 없는 유치원에서의 일과는 어떤가. 요리 수업인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생님을 따라 달걀을 깬다. 달걀은 그냥 깨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부딪혀야 한다. 그런데 너무 강한 힘으로 뭉개져서도 안 된다. 껍질이 파편처럼 섞이고 마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작은 손은 그 크기와 달리 어딘가 맹렬한 면이 있어서 조절을 하지 않고, 기꺼이 부딪힌다.


조각조각을 걸러내야 하는 일. 꽤나 성가신 일이 아이들에겐 당연한 과정이다. 그저 재료 속에 숨은 껍질을 찾는 데에 온 집중과 정성을 다한다. 이제 주걱으로 보올에 담긴 재료들을 힘차게 섞는다. 이때도 온 힘을 다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일러둔다. 너무 세게 하지 말라고.


이 장면은 클레오를 비롯한 우리 인간 모두의 겪어온, 겪은, 그리고 겪을 일상의 연속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잊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세계를 깨고 나왔는지를. 아마 깨진 세계의 껍질 조각이 더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피하고 싶어진 때부터인가. 그러자 불현듯 느꼈다. 깨고 나왔을 때의 고통과 낯섦을. 그게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지금의 세계를 깨는 일이 마냥 유쾌하진 못하다.



그러나 잔잔하던 일상에 작은 파동이 일렁인다. 글로리아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그는 경제적 이민자다. 머나먼 섬에서 나고 자라 아이들까지 낳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섬보다는 도시가 훨씬 유리했다. 몇 년을 이곳 프랑스에서 보내며 클레오를 돌봤는데,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밭의 소리와 글로리아의 무거운 목소리. 발걸음을 서성일 때마다 글로리아가 갈대 틈 사이로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다. 어느 밤. 글로리아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고도 덤덤하게 사실을 전한다. 아이는 잠시간 멈칫하다가도 크게 개의치 않아 보인다. 여름방학에 클레오가 섬으로 놀러 오게 해 달라는 글로리아의 부탁에 아빠가 긍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로리아는 맹세의 침까지 뱉었다. 우스꽝스러운 다짐. 궁금해진다. 글로리아는 정말 확신했을까. 클레오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그의 눈동자에는 한치의 거짓이 없었으나, 확신할 순 없다. 클레오를 보내겠다는 아빠의 긍정이 사실 빈말이었는데 감쪽같았듯이. 우리가 깨온 세계 중 하나는 진실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클레오의 세계엔 진실이 유효하다. 그는 아빠의 빈말을 믿고, 글로리아의 맹세의 침 뱉기를 믿는다. 나름 격렬한 투쟁을 거치고 나서 클레오는 드디어 글로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과거는 모두 질감 덩어리가 뭉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 거친 파도의 바다와 들끓는 화산이 있는 섬. 글로리아처럼 보이는 여자, 지금보다 어딘가 어려 보이는 실루엣. 표정은 알 수 없다. 질감과 명암과 움직임을 느낌으로 받아들여 그의 마음을 유추할 뿐이다.


클레오는 그다지 달가운 손님이 아니다. 섬 특성상 폐쇄적인 환경이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만큼 내부인의 자부심이 굉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리아는 내부인이지만 가족 안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외부인 같다.


특히 클레오보다 몇 살 더 많은 듯한 세자르에게 글로리아는 낯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도 잘 모르겠던 사람이 대뜸 제 엄마 행세를 하려 들고, 게다가 생김새도 이질적인 애를 데려와선 저한테 주지도 않은 관심과 사랑을 쏟아붓는다. 세자르의 반항심과 반발심은 바다 위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아찔한 취미로 이어진다.



클레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관찰하고 습득해 간다. 세자르의 날 선 모습을 아이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툴툴대고 인상 쓴 얼굴을 하고서도 세자르는 클레오를 자신이 돌볼 대상임을 인지한다. 잠든 아이를 업고 집으로 걸어가는 식으로. 어쩌면 돌봄 받지 못한 자신을 클레오에게 투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건 아니다. 영화의 시선은 내내 오묘하다. 클레오와 글로리아의 깊고 오래된 사랑과 유대감을, 유모가 된 계기를 얼굴 없는 애니메이션으로 유추할 뿐이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손쉽게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그저 눈빛과 행동, 웃음으로 감각하게 된다.



클레오는 글로리아의 세계에 들어와 사진에서 보았던 추억의 대상들을 몸소 겪었다. 그의 세계는 다양하고 넓은 반면, 자신의 세계는 여전히 글로리아밖에 없었고. 환경을 바꿨지만 여전히 새는 알에서 나오지 못한 거다. 원치 않았을 테지만, 클레오의 알은 깨지고 만다. 글로리아의 손자가 태어나면서.


갓난아기는 빽빽 울고 어른들은 달려들어 그를 어르고 달랜다. 클레오는 제가 온몸으로 받던 글로리아의 관심을 모조리 '뺏겼다'. 한참 자라난 이들의 눈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이제 막 세계가 깨어진 존재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다. 글로리아의 모든 관심을 저 작은 애가 앗아갔다. 단잠 자는 글로리아를 깨우려고까지 하는 저 아기는 악마처럼 보일 따름이다.


결국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클레오는 아이들이 지닌 특유의 맹목스러움을 아기에게 분출하고, 글로리아가 이를 엄하게 꾸짖는다. 집밖으로 뛰쳐나가 마구잡이로 걷던 클레오의 발걸음은 남자아이들이 깔깔대며 뛰놀고 있는 바다 위 절벽으로 향한다. 그리고 비장하게, 다이빙한다.



앞서 말했듯 어른의 세계는 이것저것 복잡하고 많은 것들이 담긴다. 글로리아는 딸과 아들이, 손주가, 마음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공사 중인 호텔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하나가 없어져도 상실감이 아주 클 테지만 남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이의 세계엔 어느 딱 하나밖에 없어서 그 하나가 사라지면 세상을 잃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마지막 발악처럼 무모한 게 당연하고, 글로리아도 아이의 마음을 듣고 헤아린다. 클레오에 대한 사랑과 별개로 그를 돌보는 건 돈을 받는 일이라서 글로리아는 아이에게 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장난치려 들 때도 받아주듯. 그런데 세자르에겐 어딘가 모르게 엄했다. 행동을 교정하려 들고 책임을 요구하고.


그래서 클레오를 바다에서 꺼내준 세자르에게 '엄마에게 뽀뽀해 줘'라며 사랑의 표현을 요구했다. 세자르가 뚱하게 그냥 고맙다고 말하라고 하자, 그제야 진심의 말을 전한다. 어딘가 모르게 따듯해진 찰나의 표정이 잔상에 남았고.


글로리아는 일로서 아이를 돌보는 게 익숙하더라도 가족으로서 아이를 돌보는 건 다소 서툴었던 걸까. 아무리 성인이라고 한들 언제나 부족한 면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건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별.


클레오를 돌봐줄 새 유모가 생기고, 글로리아는 한 번 고향에 돌아온 이상 나갈 생각이 없다. 이곳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클레오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세계가 다르다. 클레오에겐 글로리아밖에 없어서, 오히려 둘은 멀어져야 한다.


각자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어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깨어지고 부서지며 나눠진 조각조각이 또 다른 추억을 만든다는 것을 배워야 하니까. 기억의 총합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또 다음 세계를 깨고 나온다는 것을. 


그렇게 클레오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던 때. 이번엔 전과 다르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글로리아는 제가 오래도록 찼던 고래 목걸이를 클레오에게 둘러준다. 자신의 몸과 다를 바 없던 무언가를 떼어내는 감각. 지금 당장은 클레오가 매끈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을 테지만 느낌으로는 알았을 테다.


꽤 의연해 보이던 글로리아는 몸을 돌려 걷자마자 엉엉 울고 싶던 마음을, 끝에서야 터뜨린다. 아프다. 너무너무 아프다. 언제나처럼 목에 있던 목걸이가 사라진 무게만큼 허전하다. 우리는 그의 눈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다. 비워진 무게에 문득 익숙해질 것임을. 클레오가 글로리아 세계에서 완전히 제거된다는 게 아니다. 사랑스러운 일부로 존재할 테다. 다만 빈자리는 곧 새로움으로 채워지기에. 글로리아가 그래왔듯 클레오도.





* 씨네랩에서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관람 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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