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구경을 하다가 공황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나오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의 캡처본을 봤다. 공황장애가 생겼는데도 악착같이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며 프로그램이 유도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은 '감동'이다.
과도한 노력 숭상이 상식인 사회 안에서 쭉 살아오고 있으면 그게 과도한지 잘 모른다.
옛날에는 효 숭상이 과했다. 지금도 서구 사회에 비하면 센 편이긴 한데, 예전만큼은 아니다. 과한 효 숭상이 보통인 상태에선 부모가 아프다고 자기 허벅지살을 잘라 먹였다는 얘기에 '감동' 할 뿐이지만, 오늘날 보기엔 좀 그로테스크할 수 있다. 옛날엔 또한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걸 좋은 일로 보았는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극도로 애쓰는 게 그 시절엔 '감동'을 주었겠지만, 오늘날엔 많은 이들이 생각을 달리하여 자식이 부모의 소망을 대리 실현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여기므로 그런 일이 더 이상 '감동' 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셔널리즘이 공기처럼 퍼져있던 시절엔 북한 공비 앞에서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고 입이 찢겨 죽은 어린이의 이야기가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생각을 달리하여 그럴 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게 맞다고 여기며, 이승복을 찬양하며 어린이들에게 이승복처럼 죽어도 공산당이 싫다고 말하라고 독려하는 게 끔찍하다고 느낀다.
종교도 비슷할 수 있는데, 어느 종교의 내부에서 보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심지어 죽음을 감내하는 행동이 '감동'을 일으키겠지만, 그 종교랑 무관한 사람이 보면 그게 기괴할 수 있다. 옛날에 배에 물이 차오르는 병을 얻은 한 소녀의 사례가 방송을 탄 적이 있다. 소녀의 부모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는 딸 옆에서 신이 도울 거라며 기도만 계속했다. 이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거룩하다 하며 '감동' 하겠지만, 그 종교 외부의 사람이 보기엔 끔찍한 일이다.
일본에서 열린 팀 달리기 대회에서 어느 여자 선수가 발목을 다쳐 못 뛰게 되자 아스팔트 길을 기어서 간 적이 있다. 관중은 박수를 쳤고, 언론은 미담으로 보도를 했다. 팀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감동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은 그걸 보고 경악했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잔인하고 끔찍한 문화가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노력 이데올로기 (대강 이렇게 불러본다)의 바깥에서 보면 공황발작으로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무대에 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 보고 '감동' 하는 모습은 좀 끔찍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정도가 강력한 고통의 수준이 되면 이는 통상 약간의 끔찍함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어느 사회든 어떤 욕망에 있어서는 이 욕망을 추구하면서 겪는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느끼게 하고 어떤 욕망의 경우에는 같은 것을 끔찍함으로 느끼게 하는 그런 상식이랄까, 그런 게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정한 방향의 욕망 추구를 노력이라고 부르고, 이 노력이라 불리는 것이 그런 특수성을 띤다.
한국에는 노력이 쾌락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고수하려 애쓰는 모습과, 노력은 소용없다는 냉소적인 담론 (수저론이 대표적) 이 공존한다. 예컨대 건물 몇 채를 상속받은 젊은이의 예를 들면서 이런 것이 불공정하다는 주장을 하는 글에 왜 그 젊은이의 부모가 노력해 손에 넣은 재산을 인정해주지 않냐고 항의하는 댓글들이 달린다. 이것이 바로 노력이 쾌락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고수하려 애쓰는 모습의 예시다. 언뜻 보면 "그게 아니라 그냥 노력에 따르는 성취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할 뿐인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이다.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하는 이유는 노력이 쾌락의 보증수표로 제대로 작동한다는 믿음을 이들이 아직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 고수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이 믿음이 깨진다는 건 자기가 발견한 욕망의 길이 폐기되어야 함을, 그리고 지금껏 의지해왔던 삶의 나침반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반면에 노력이 쾌락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나름의 욕망의 길을 찾아낸 이들이라면 대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쾌락을 얻을 수 있다), 또는 없다, 하는 논쟁에 큰 흥미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런 논쟁에 자주 끼어들게 된다. 한 때 노력교의 신자였다가 배신당하고 (=노력이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 현실을 겪음) 좌절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항상 노력교 신앙을 완전히 버렸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냉소하면서 동시에 믿는 것도 가능하다. "나도 노력한다고 꼭 성공하는 건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그래도... 걔가 성공하지 못한 건 노력을 안 해서야. 난 알아."
객관적으로 봐서, 노력은 성공 (쾌락)을 보장하는가? 이 질문에 정답은 없을 거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도 노력해서 원하던 바를 이루는 사람도 있고, 노력했는데 원하던 걸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노력교 신자와 노력교를 이탈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이들 간의 논쟁은 이어질 거다.
이 두 세력은 공히 노력 숭상이라 부를만한 어떤 흐름이 (노력 이데올로기)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신분석의 개념을 빌어 말하자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신경증자는 자신의 증상, 즉 자신이 욕망하는 방식을 고수하고자 한다. 이는 그의 증상 (그가 욕망하는 방식) 이 그가 세상을 살아내 오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구성한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통해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가 원하는 건 그가 욕망하던 대로 계속 욕망하면서 쾌락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증상을 계속 즐기게 해 달라는 것이 신경증자의 요청이다. 노력 이데올로기의 사회에서 신경증자는 노력으로 쾌락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럽다. 공황장애로 식은땀을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무대에 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런 고통을 수반한다. 잠을 줄여가며 수능 준비 공부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재수를 한다.
수능 때가 되면 다들 수험생에게 행운을 빌어준다. 하지만 수험생들은 결코 다 같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1등급은 4% 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수험생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마음과 행동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짐에도, 노력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줄 세우기를 당하는 현실은 그대로 놔둬진다. 서바이벌 노래 프로그램에서 다수는 탈락해야만 하고 수능에서도 다수는 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적에는 꼭 수능이 아니라도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류의 변호의 말들이 날아든다.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믿음을 지켜내려는 행동이다.) 이 구조는 그대로 두면서 죽도록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 이게 우리나라 사회의 증상이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노력해야만 하는 상황을 두고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면서 (공황발작을 겪으며 무대에 기어오르는 참가자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패널처럼) 그 상황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게 바로 욕망을 가능케 해 주는 틀이기 때문이다. 이 틀이 증상이고,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버릴 생각이 없다. 증상에 대한 지적이 있으면 거부감을 보인다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남들 노는 만큼 다 놀고 그럴 수 없다. 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열심히 해야, 노력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게 세상 이치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경향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이 글에 거부감을 심하게 느낄 것이다. 이 생각엔 남들과의 경쟁이라는 요소가 이미 배경처럼 깔려있다. 여러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며 그래서 경쟁이 발생하고 따라서 욕망의 대상을 얻기 위해선 남들을 이겨야 하며 그 이김의 방식이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것이라는 세상 이해.
이 이해-믿음을 지탱하려면 누군가의 성공은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야만 하고 실패한 자의 실패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세상 이해는 실제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완전히 공상적인 믿음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거기서 경쟁이 발생한다. 노력 이데올로기 내에선 이 경쟁의 승패를 가르는 게 노력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노력이라는 요소가 많이 개입하는 게 실제 현실의 사정이기도 하다. 다만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을 따름이다.
노력의 압박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는 다수 사람들이 같은 것을 욕망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달성이 노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노력 이데올로기를) 바꾸는 것일 거다.
이미 욕망이 다원화되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고, 한국 사회는 예전보다는 획일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그저 수월하기만 하진 않다. 앞서 언급한 서바이벌 류의 TV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참가자들 각자가 개성껏 노래를 하고 사람들은 취향껏 마음에 드는 사람의 노래를 즐길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경쟁을 시키고 탈락자를 만드는 형식의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그걸 많은 이들이 본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 제작에 큰돈을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증상을 보여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욕망을 갖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명문대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명문대생인지 체크하려고 하며, 만약 아니라면 비웃는다. 돈이 행복의 열쇠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부자인지 확인하려 하고, 만약 아니라면 비웃는다. 이 비웃음은 "사실 너도 같은 욕망을 갖고 있잖아! 하지만 달성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실은 명문대가/돈이 중요치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정신승리하는 거잖아!"와 같은 류의 믿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믿음을 유지하려는 제스처다. 또, SNS 같은 미디어 환경 또한 다수 대중의 욕망의 획일화에 기여하기도 하는 듯하다. 다수 대중이 많이 공유된 같은 콘텐츠를 보며 같은 욕망을 키워가는 것이다. 물론 마이너한 자신만의 욕망-취향을 가진 이들이 과거라면 물리적 한계로 못했을 교류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적 통로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노력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방법은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노력보다는 실제로 타고난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런 믿음이 노력 이데올로기보다 더 널리 퍼지면 사회가 우울증에 빠질 공산도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노력과 달리 타고난 능력은 나의 행동으로 바꿀 여지가 없으니까 남는 건 좌절뿐이다. 노력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회엔 노력을 거듭하다가 번아웃되는 사람과 나는 왜 충분히 노력을 안 할까 라고 자책하는 사람이 많을 거고.
내가 보기에 더 근본적인 접근은 욕망의 획일성과 이에 따른 경쟁 및 불평등 발생에 주목하는 것일 듯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획일화 된 욕망에서 벗어나 각자의 고유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도 한 해결책이지 않을까 싶다. 그게 항상 가능하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