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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Aug 18. 2019

남자의 조건

[space story]  12.  은행

우리 은행 종로지점의 김연주씨는 콧대가 높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167cm의 훤칠한 키에 날씬한 각선미가 일품인 그녀가 처음 입행를 했을 때만 해도, 남자 행원들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는 다른 지점에까지 소문이 퍼져 별일 아닌 용건으로 전화를 걸어와 한동안 종로지점의 전화가 폭주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다.


그것은 행 내에서 뿐이 아니라 남자고객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번호표 순서를 넘겨 일부러 그녀에게 통장을 내미는가 하면, 한 번에 입금시켜도 될 금액을 2만원씩, 3만원씩 나누어 입금시키기도 했다. 가끔 통장 속에 “몇 시에 어디서 기다리겠다.” 라는 메모지를 넣는가 하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꽃바구니를 배달시키는 열성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남자도 그녀의 사랑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고 라이벌 의식을 갖던 남자들이 점차 시간이 흐르자 그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참 내, 지가 이쁘면 얼마나 이쁘다고 저렇게 도도한 거야?”


“남자한테 한 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을 거야. 그래서 남자를 터부시하는 거라구.”


“아니야. 어쩌면 미혼모일지도 몰라.”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소문은 소문을 낳아, 그녀가 6살짜리 사내애의 엄마라는 등, 아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한 달에 한 번 찾아간다는 등의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쯤 되자 지점 내에서 그녀의 평판은 심하게 떨어졌고, 암암리에 그녀를 멀리하며 왕따를 시키는 경향도 생겼다.


그러나 어떤 소문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다. 소문이 허황된 것이라면 반박하는 어떤 제스처도 취할 법 한데, 그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늘 도도한 태도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사실 그녀가 모든 남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의 몇은 그녀에게서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녀의 테스트란 ‘남자의 조건’을 ‘A에서 Z'까지 나열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했다.


그녀의 조건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새로운 신입 행원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는 아주 볼품없는 외모를 한 K가 끼어 있었다. 165cm가 될까 말까한 키에 단추 구멍을 붙여 놓은 듯한 작은 눈을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K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K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입행원을 위한 회식자리였다. 신입행원들이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K의 순서가 되자 그는 노래대신 콧대 높은 김연주씨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김연주씨, 일주일 동안 지켜봤습니다. 당신을 내 반려자로 삼을 생각이니까, 그리 아십시오.”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연주에게 저런 말이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에게 망신당한 남자들도 K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김연주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술잔을 집어던지던가, 코웃음을 치며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김연주의 반응은 의외였다.


“남자의 조건을 A에서 Z까지 말할 수 있다면, 고려해 보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김연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 동안 그녀에게 접근했던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도 그녀가 테스트를 시킨 남자는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였다. 그런데 저런 볼품없는 신입행원에게 그녀가 기회를 준 것이다.


실내는 순식간에 긴장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제 사람들은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K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일대일도 아니고,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 망신을 당할 K를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도 느껴졌다.


그러나 일순 K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A는 alcohol입니다. 남자라면 대인관계를 위해 술을 약간 하는 것이 좋습니다.

B는 billiards, 우정을 위해 친구와 당구 한 게임 정도는 할 수 있어야죠.

C는 cigarette,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니 담배 한 개비의 위안도 괜찮겠죠.


D는 dream, 꿈을 키워야 할 것이며,

E는 erase,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욕을 지울 수 있어야 하고,

F는 friend, 진실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G는 gamble, 인생은 도박임을 알아야 하며,

H는 hero, 영웅의 기질을 발휘해야 하고,

I는 image, 남들에게 부각되는 이미지를 신중히 해야 합니다.


J는 joke, 농담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K는 kill, 때로는 냉혹함도 필요합니다.

L은 leader, 리더 쉽을 길러야 하며,

M은 manner, 좋은 매너가 필요하고,

N은 new,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합니다.


O는 object, 목적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P는 play, 놀 땐 확실히 놀고,

Q는 question, 의문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며,

R은 recreation, 여가를 보람되게 보내야 합니다.


S는 speech,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T는 thanks,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U는 useful,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V는 victory, 승자가 되어야 하고,

W는 way, 진로를 확실히,

X는 x-mas, 늘 크리스마스처럼 살면 좋겠지요.


마지막으로 Z은 zzz, 영원히 잠들 때 가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K의 말이 끝나자 우리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김연주씨의 테스트에 저런 깊은 의미가 숨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제 K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직 김연주만 있는 듯, 그녀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은 진지함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동작을 하도록 조작된 로봇처럼 일제히 김연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파벳 중에 Y가 빠졌군요.”


김연주 자신도 놀랐는지, 저렇게 묻는 목소리에도 약간의 떨림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K는 그녀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Y는 young, 젊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Y의 의미는 다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K는 언제 준비했는지 양복 안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김연주 앞에 보석함을 놓고서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Y는 바로 you, 당신이 있어야 내 삶은 완성됩니다.”


거기서 김연주는 보석 같은 눈물 한 방울을 흘렸고, 우리는 환호성을 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K에게 뻑 간 것이다.


두 달 후에 우리는 K와 김연주씨의 청첩장을 받았다. 결혼식장에서 김연주씨는 하이힐을 신지 못했고, K는 키 높이 구두를 신어야 했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남자들은 같은 생각으로 한숨을 쉬어야 했다.


‘남자가 되는 조건은 너무나 힘겹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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