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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연 Aug 17. 2019

우체통이 있는 카페

[space story]  11. 카페

한 시간 전쯤 청량리 역을 서성거렸을 때는 어디를 가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여자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잿빛 하늘 어느 한 점을 구심으로 해서 엷은 빗줄기가 방사선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있는 얼굴에 이슬처럼 부딪혀 오는 작은 방울들. 그래서 여자는 버스를 탔나 보다. 여자는 버스를 타기 직전, <양평>이란 글씨를 언뜻 본 듯도 했다.


하이힐을 신은 구두에 진창이 묻어져 온다.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은 자꾸만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여자는,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그래도 열심히 걷는다.


이 산자락만 돌면, 그러면 그곳에 갈 수 있을 거야. 무작정 버스를 탄 여자가, 내릴 때는 무작정 내리지 않았나 보다. 가냘픈 몸을 적시는 비에 상관없이, 여자는 열심히 걷는다. 물을 잔뜩 먹은 흙덩이들이 원피스에 갈색 꽃을 더 만든다. 짓이겨진 갈색 꽃들.


여자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주인 남자가 히터를 막 키고 있었다. 카페라고 해봤자 지붕과 기둥만 있다. 사방으로 트여진 공간 밖으로는 통나무를 듬성듬성 잘라 만들어 놓은 나무의자가 둥그렇게 놓여져 있다.


여자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계속 두리번거린다. 여자의 눈자위가 불안정하다. 뭘 찾는지 여자는 구석구석 카페 안이며, 바깥이며 훑어본다. 여자는 작은 한숨을 쉬며 밖과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엉거주춤 걸터앉는다. 멀리 기찻길이 보인다. 기차선로를 따라 자갈들이 온통 알몸을 드러내놓고 찬비를 맞고 있다. 여자는 괜스레 춥다.


주인 남자가 메뉴 판을 갖다 놓는다. 타는 것처럼 붉은 색지에 흰 포스터 칼라 글씨를 써서 코팅했다. 여자는 메뉴 판이 낯설어 오래도록 바라만 본다.


“뭐 드시겠어요?”


심드렁한 남자의 목소리. 그러고 보니 남자도 낯설다.


“메뉴 판이 바뀐 것 같아요.”


“바뀐 지 오래 되었죠. 뭐 드시겠어요?”


여자는 메뉴 판이 낯설어 자꾸만 바라본다. 나무판에 글씨 모양대로 판 후 검정 숯을 입힌 낡은 나무판이 아닌 탓이다.


“헤이즐넛…….”


남자는 여자의 시선에서 메뉴 판을 앗아간다. 갑자기 타는 듯한 불길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 같다.


‘헤이즐넛, 내가 이걸 시켰구나…….’ 여자는 가만히 중얼거려본다.


   *  *  *


“헤이즐넛 두 잔 주세요.”


“난 헤이즐넛 과자 냄새나서 싫단 말야. 딴 거 시킬래.”


“바보야, 낭군님이 먹는 걸로 먹어. 웬 아녀자가 이리도 말이 많을까?”


여자는 남자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미소를 짓는다.  


“저기 봐.”


남자의 손가락이 머무는 곳에 여자의 시선도 머문다. 유럽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작은 우체통이 흰 나무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빨간 통 위로 < POST > 라고 써진 흰 글씨가 선명하다.


“우체부 아저씨가 여기까지 와서 편지를 가져가?”


“풋, 바보.”


남자는 여자의 동그랗게 뜬눈이 귀여운지 가볍게 알밤을 준다.


“손님들이 저기다 편지를 넣어두면 주인이 잘 간직하고 있다가, 찾으러 오는 손님에게 주는 거야.”


“배달은 안 해주고?”


“파퓨아뉴기니라는 나라 알지? 거기는 아직도 우체국에 직접 편지를 찾으러 가야 하거든. 여기도 마찬가지야. 재밌지?”


“피이, 누가 편지를 부치러 여기까지 와?”


“누구긴. 너하고 나 같은 연인들이지.”


   *  *  *


 여자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잔이 놓여져 있다. 덩그러니 한잔이다. 여자는 설탕도 넣지 않고 커피 잔을 든다. 막 구워낸 쿠키 향이 난다. 여자는 다시 커피 잔을 내려놓는다. 여자는 시선을 비가 내리는 밖으로 가져간다.


빗줄기가 더 세진 것 같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체통이 있을 자리에 우체통은 없다.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미세해서 필름을 느리게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저… 밖에 있던 우체통은…….”


컵을 씻던 주인 남자가 여자를 흘긋 본다.


“기둥이 낡아서요. 더 이상 편지 넣으시는 분도 안 계시구요.”


“혹시…….”


여자는 말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린다. 남자는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 같은 여자들이 꽤 있다는 표정이다.


“우체통 없어진 후로 편지 남긴 분은 없었어요.”


남자는 여자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앞질러 얘기를 해버린다. 여자는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는 듯 하다. 여자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다가 잠시 멈칫한다. 모서리가 삐죽이 나와 있는 흰 봉투…….


여자가 가만히 봉투를 꺼내 본다. 선명하게 쓰여 있는 세 글자, 남자 이름이다. 여자는 망설이는 것 같다. 흰 봉투 위로 여자의 숨결이 다가갔다 날아오른다.     


비가,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쏟아진다. 여자의 어깨며, 솜털이 일어난 가는 팔이며, 갈색꽃무늬가 짓이겨진 원피스에 비가 내리 듣는다. 가늘게 내리던 비가 방향을 바꾼다. 헤이즐넛 향을 품은 바람 한줄기가 여자의 곁을 맴돌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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