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연인
[space story] 10. 전화
“저와 데이트 하실래요?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라는 건 너무 쓸쓸해서…….”
드디어 그녀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크리스마스 연인(戀人).
나는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마흔을 넘겼다. 친구 녀석들이 하나둘씩 장가를 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한 거라고 자위를 했었다. 그러나 이제 청첩장 대신 백일잔치, 돌잔치에 불려 다니다 보니 조급증이 더해왔다.
집에서는 어디가 못나서 여자하나 데려오지 못하냐고 호통을 하시고, 주위에서도 마흔이 될 때까지 연애를 못하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슬슬 아랫배가 불거져 나오는데다가 앞머리도 벗겨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내 청춘은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갑갑증이 심화되면서 매일 밤 소주병을 비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마흔 한 살의 크리스마스이브에 낮선 여자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오늘 저와 데이트 하실래요?”
“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이런 날 혼자라는 건 너무 쓸쓸해서…….”
처음에는 장난전화 이거나, 상대를 잘 못 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목소리 또한 진지했다. 나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그녀와 약속을 하고, 명동으로 나갔다.
성탄 전야의 명동거리는 화려함 자체였다. 보석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네온 빛 속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눈동자들이 남실남실 행복을 흩뿌려대고 있었다. 나는 그 기쁨에 겨운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헤치고 나갔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면 나는 남자 건 여자 건 가리지 않고 인상을 썼고, 사람들은 그러한 나를 무슨 범죄자처럼 흘겨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깊은 곳에서는 어떤 신열 같은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날, 낯선 여자의 전화를 받고 이런 거리에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남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크리스마스이브의 행복 같은 것을 나는 저당 잡힌 인생처럼 한 번도 즐겨보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나 전화를 건 그녀가 무슨 착각을 한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크리스마스이브보다 죽고 싶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더 나를 다잡기 위해 툴툴거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약속한 카페 문 앞에서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40년 인생에 처음으로 여자와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좋아, 까짓 것. 부딪혀 보는 거야. 나는 힘차게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는 눈보다 하얀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하얀 모직 원피스를 세련되게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했다. 날 보며 웃을 때 보이는 하얀 치아하며, 결이 고운 블루 블랙의 머리카락까지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 이건 잘못된 거야. 이런 여자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엉거주춤 그녀 앞에 앉았다. 괜한 기대가 더 생기기 전에 이 만남이 잘못된 거라고 그녀가 말해 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전화해서 놀라셨죠? 혹시나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 까봐 걱정했어요.”
“아, 아닙니다. 단지 전…….”
“우리, 아무 생각 말고 오늘 재밌게 보내요. 네?”
카페 안의 캐럴 송은 귀를 간질이며 속삭였고, 그녀의 향수 내음이 은은하게 나를 감싸왔다. 그녀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지적(知的)이었으며 유모감각까지 갖추고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 주눅이 들어있었던 나는, 그녀의 쾌활함에 동화되어 점차 마음을 열수가 있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서 왠지 내가 그녀의 연인(戀人)이라도 된 듯한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지만, 지금은 아까의 짜증스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깨를 부딪쳐 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내 형제였고 자매였으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이웃이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이렇데 달라 보이다니! 그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연인들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날이겠지만, 나 같은 싱글 들에게는 그보다 더 비참한 날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을 하고, 손을 꼭 잡고 눈 오는 이브를 보내고 싶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레는 이브를 생으로 혼자, 혹은 냄새 풀풀 나는 노총각 친구 놈들과 보내면서 한숨 쉰 것이 벌써 몇 십 해던가.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늦은 밤거리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았다. 오늘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가 날 보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내 심장 박동소리가 온 카페 안에 넘치고 있었다.
“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이대로 그녀를 놓칠 수는 없다. 그녀가 날 어떻게 알게 되어 전화를 했건, 이제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당신이 또 혼자라면…….”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요정처럼 사라졌다. 그녀를 태운 택시 넘버를 외우면서, 나는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택시 넘버 따위 외우면 무슨 소용인가. 그녀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어떤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 그래도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택시 넘버를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처음 몇 달은 넋이 빠져 전화기만 바라보며 지냈다.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다른 용건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한달 두 달, 5개월여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움이 꿈틀꿈틀 묻어났지만, 그냥 잊으려하니 편해지기도 했다. 사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지만…….
하지만 그 해 12월 24일이 되었을 때, 그녀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와 데이트 하실래요?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는 너무 쓸쓸하잖아요.”
그녀는 여전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왠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해서, 붉은 초를 파는 거리의 포장마차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데이트는 작년과 비슷했지만, 내 가슴의 불은 더욱 그녀를 향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 택시를 타고 가버렸고, 나는 확인하지도 못할 택시 번호를 또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내년에 다시 전화가 온다면, 그 때는 결코 그녀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런 그녀에게서 올해도 역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나의 크리스마스 연인(戀人).
나는 서랍 깊은 곳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녀를 보내고, 혼자 산 반지였다. 이 반지를 건네며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이제 마흔셋이 된 나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연인처럼 다정했다. 그것이 더 가슴이 미어져 왔음을 그녀는 눈치나 채고 있었을까. 그녀와의 데이트 마지막 코스는 늘, 칵테일 바였다. 레인보우 빛깔의 고운 칵테일을 앞에 두고, 나는 드디어 그녀 앞에 상자를 꺼내 놓았다. 의아한 눈빛을 띄며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1년 동안 수천 번도 더 연습한 말을 꺼냈다. 설사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겠다는 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후유,…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봐야겠어요. 이러시지 않았다면 내년에 또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도 아쉬워요.”
마지막이란 말인가. 그녀는 택시를 탔지만 이번에는 택시 번호를 외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버린 다면 평생 나는 혼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출발하는 택시를 향해 뛰어가 뒷좌석 문을 벌컥 열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어째서 크리스마스이브에만 나에게 나타나는 겁니까?”
그녀는 대답대신 지갑에서 작은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명함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손끝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택시는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떨리는 시선을 내려, 명함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크리스마스 연인 대여해 드립니다. 322 - ****>
그리고 곧장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3년 전에 결혼하고 미국에 이민 갔던 죽마고우였다. 그 녀석이 결혼하기 전에는 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친구였다.
“어, 나야. 잘 지냈니? 나 결혼하고 네 놈이 크리스마스 혼자 보낼 거 생각하니까 맘이 안 좋더라고. 그래서 연인(戀人) 대여점에 부탁했었거든. 3년 동안 대여했는데 데이트 잘했냐?”
찬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을 보니 눈이 날리고 있다. 이것이 몇 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눈(雪)물 인지, 눈(眼)물 인지 모를 무엇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