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글쓰기 반에서 알게 된 유쾌한 중년 여성이 있다. 그녀는 매사가 시원시원하고 상냥했는데 글 속에 드러내기를 꺼리는 내면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가끔 지적받았다. 그녀의 글은 따뜻하고 유쾌하였지만, 감정의 깊은 곳에 있는 자기의 이야기는 본질을 말하지 못하고 결국 두루뭉술하게 기술하면서 끝을 맺고는 했다.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할 내용을 말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그냥 궁금해하라고요, 엄마에 대해 말하기 싫은 걸 어떡해요.” 글에서 보면 그녀는 엄마와 다시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쓰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자기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동안 인연을 이었다 끊었다 한 횟수가 여러 번이라는 의미일까?’ 나는 잠시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엄마를 이해하고 싶고, 엄마와 화해하고 싶어서 상담 공부도 전문적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글로만 보면 여전히 엄마와 태평양만큼 넓은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어떤 상담이론도 그녀를 치유하지 못했다. 과거 엄마와 있었던 사건이나 현재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못하니 글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드러나는 성격과 반대의 글을 쓰는 중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상처받은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쓰기는 확실히 치유의 효과가 있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글로 표현하면서 스스로 치유한 경험이 있다. 그때의 엄마도, 상처받은 경험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솔직한 글을 쓰다 보면 그때의 일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상처가 아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이전보다 관대한 마음을 선물하였다.
우리 또래의 여성들이 자라면서 받았을 감정의 상처는 대동소이한 면이 있다. 역시나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에게서 들었던 조언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어렸을 때 내가 받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엄마에게 다 해주자.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모든 것을 목록에 적어 놓고 매일 한 가지씩 다 해드려 보자. 하루하루 쌓여가는 그 힘으로 스스로를 치유해야 한다.”
그 어떤 훌륭한 상담이론도 심리치료로도 어릴 때 구멍 난 마음을 메꿀 수 없다. 완벽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조언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나는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상처받았지만, 이제는 베풂으로써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역설의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