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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Jan 06. 2024

저는 동지팥죽을 좋아하지 않아요

어릴 때 동짓날이면 엄마는 찹쌀을 빻아 새알심을 빚고 팥물을 만들어 동지팥죽을 쑤었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자 시골 사람이라 절기에 맞춰 동지팥죽을 꼭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엄마는 그 번거로운 동지팥죽 쑤는 일을 오래도록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떡을 좋아하지 않는다. 찹쌀로 만든 동글동글한 새알심 한 개를 입에 넣으면 온통 끈적거림으로 입안이 가득해서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입에 물고 있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나에게 동지팥죽은 떡국과 더불어 한국음식 중 난이도 최상의 전통음식이었다. 어른이 된 이후로 그나마 떡국은 조금 수월해졌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라 떡국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눈치껏 조금씩만 먹는다.



매년 그렇듯이, 고령의 시부모님은 올해도 손수 빛은 새알심과 곱게 거른 팥물을 얼리고 한 귀퉁이에는 가래떡과 생굴을 얼려 택배를 보내왔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먹고 신년에는 떡국을 끓여 먹으라는 어른들의 주문이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동지팥죽과 떡국을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떡국을 잘 먹는 것은 사실이나, 동지팥죽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남편이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시간은 19년, 나와 함께 한 시간은 30년이 되었다. 지금쯤은 내가 남편의 식성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때 빵을 사준 적이 없으니 내가 빵을 좋아하는 걸 엄마가 모르는 거지.”



그는 밥이나 떡보다 국수와 빵을 더 좋아하는 밀가루 형 인간이다. 해마다 보내오는 새알심과 팥물은 다 먹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나는 한 그릇 끓일 분량을 제외하고 팥죽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모두 배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한 그릇을 끓이는 이유는 ‘팥죽 잘 먹었냐’고 한 번도 빠짐없이 물어보는 시부모님의 질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으로 연결된 가족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기 어렵다. 내 부모에게라면 나는 짜증을 감추지 않고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새알 들어간 팥죽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또 보낸 거야? 제발 인제 그만 보내라고요!”



노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령의 노인은 과거에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잘하던 일을 반복해서 하는 습성이 생긴다고 한다. 인간의 인정욕구는 그토록 강력해서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통해 자식들에게 끝없이 존재감을 인정받아야 하는 노인의 습성에 열심히 맞장구치는 일이 어느 때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만한 호사도 누리지 못하면 여태까지 살아온 날들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내년에는 내가 죽을지 모르고 그러면 못 먹으니 보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계속하셔서 ‘내년에도 또 만들어서 보내주시면 된다’고 동지팥죽 안 먹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시어머니는 아주 기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저는 동지팥죽을 좋아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30년 동안 못 했다.



그래도 어떤 음식은 좋아하니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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